〈 9화 〉 모략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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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동문 성벽 위는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무슨 일이냐?"
"오랑캐들이 우리 군사를 쫓고 있습니다요!"
성첩을 순시하던 병조판서 겸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이 병사들이 가리키는 쪽을 보자 과연 조선군 하나가 산성을 향해 죽어라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뒤에는 무장을 갖춘 팔기 셋이 말을 타고 뒤쫓는 중이었다.
"빨리 나가서 저자를 도와라!"
신경진의 호령에 급히 조선군들이 움직였지만 말을 탄 청군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살려주시오!"
조선군들이 몰려오는 것을 눈치챈 청군 셋은 일제히 화살을 재었다.
"히익!"
조금만 더 달리면 동료들에게 닿을 수 있건만, 쏘아진 화살들은 기어이 도망치는 자의 등에 꽂혔다.
두 발은 등에, 한 발은 목에 꽂혔으니 두번 볼것도 없는 절명이었다.
팔기들은 그것을 확인하자 곧장 뒤돌아 후퇴했다.
"이런."
신경진은 안타까움에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명복을 빌기 전에 우선 해야할 일이 있었다.
"혹 근왕군의 전갈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품 속을 뒤져 보아라."
신경진의 명에 병사들이 시체의 옷고름을 풀어헤치자 과연 종이 뭉치 하나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신경진은 그것을 펼쳐보았다.
잠시간 읽어내려가던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
인조는 이자원을 내보낸 후 며칠 동안 끝없는 불안증세에 시달렸다.
청군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도외시한채 공격해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틀 전에는 홍이포까지 동원해 대대적으로 포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자연 인조는 이런 후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자원의 말에 넘어간 것이 잘못이었나?'
애초에 그가 지금쯤 살아있는지도 모르겠다.
포위망을 빠져나가다 죽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같이 데려간 도감군들과 작당해서 도망쳤을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화친을 구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행궁에서 멀리 들려오는 포성을 들으며 그렇게 고민하던 인조였으니, 바로 그날밤 산성의 남동쪽에서 봉화가 오르자 크게 기뻐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근왕군이 도달했구나!"
이리하여 이틀간 조정의 공기는 제법 낙관적인 상태였는데, 신경진이 문서를 가져온 것은 이런 분위기에서 벌어지는 조회의 와중이었다.
"근왕군의 장계라?"
신경진이 방금 있었던 일을 소상히 아뢰고 문서를 바치자 인조가 화색이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장계에 이르기를, 봉화를 올린 근왕군은 경상도의 군대라 하옵고 경상 감사 심연 본인이 이끌고 있다 하였사옵니다."
"그리고?"
"또한 이달 엿새, 즉 오늘밤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에 동문 밖 청군을 들이칠테니 안에서 호응하여 포위를 뚫자고 하였사온데 어찌 처결해야 하오리까?"
신경진의 말에 인조는 우선 죽은 도승지 이경직을 대신해 임명된 정광경(鄭廣敬)에게 하문했다.
"심연의 필체가 맞는가?"
그러자 정광경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장계라 하더라도 글 잘쓰는 하리(下吏)가 대필하는 경우가 적잖으니 그것으로는 확신할 수 없사옵니다. 다만 관인의 유무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온데 백문(白文, 관인이 찍히지 않은 문서)이 아니옵고 경상 감사의 관인이 분명히 찍혀 있사옵니다."
"그렇단 말이냐?"
장계를 가지고 온 자가 죽지 않았더라면 자세히 바깥의 상황을 캐물을 수 있건만, 못내 아쉬운 인조였다.
"이자원을 만났다는 말은 있는가?"
이자원이 교지를 가지고 갔으니 만났다면 반드시 그 내용이 있을 것이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런 내용은 없사옵니다."
"죽거나 도망쳤다는 말이구나."
인조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지금은 어찌 움직여야할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다.
"전하, 신중하셔야 하옵니다."
최명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신이 보건대 이자원은 자못 광오(狂傲)한데가 있사오나 쉬이 뜻을 꺾을 위인은 아니옵니다. 또 장계의 진위도 시간을 두고 확인을 해보아야 할 일이 아니겠나이까?"
담담히 듣고 있던 인조는 옆에 좌정한 세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세자는 어찌 생각하느냐?"
"······신도 조금 두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인조의 물음에 조금 머뭇대던 세자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인조의 생각은 달랐다.
'세자는 총명하긴 하나 나와 달리 결단력이 부족하구나.'
지금과 같은 난세에는 결점이라 할 수 있었다.
제법 만족스러운 후계자였지만 이런 유약한 부분은 차차 고쳐나가야 하리라.
인조는 단호하게 말했다.
"본조가 시작한 이래로 관인을 위조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는데 더러는 거꾸로 찍기도 하고 혹은 서툰 솜씨로 마구 다듬어 글자의 획을 분별할 수 없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하물며 오랑캐가 우리 관원의 관인을 어찌 알겠느냐?"
"하오나······."
"또한 길이 막혀 답서를 보내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우리가 호응하지 않으면 근왕군이 홀로 포위를 뚫고자 할 터인데 그 수고로움도 말할 수 없거니와, 자칫 패주한다면 성이 다시 외로운 형세에 놓이지 않겠는가."
인조의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이미 강원도 근왕군이 접근해 한번 봉화를 올렸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격퇴당한 일을 기억했다.
"나(余)는 마음을 정했다!"
기회가 왔는데도 칼을 뽑지 못하면 앉아서 죽을 뿐이다.
'그래, 반정 때도 한번 굳은 결단을 내려 대위를 얻었다. 하물며 호랑이 아가리에서 벗어나는 일이겠는가.'
그가 판단하기로는 지금이 치고 나갈 기회였다.
"어영별장 이기축은 군사를 이끌고 적도들을 쳐라!"
그리하여 광교산에서는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던 1월 6일 밤.
이기축이 이끄는 1,800명의 조선군은 출성을 감행했다.
===
조선에는 계제사(稽制司)라는 관청이 있다.
의식과 제도를 관장하는 부서로 모든 조선 관리의 인장(官印)은 이곳에서 만든다.
한양을 점령한 청군은 철군할 때 끌고 가기 위해 장인들을 잡아들였는데,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이 계제사의 장인들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그들의 생사는 저 무시무시한 오랑캐들이 쥐고 있으니 협력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관인을 위조할 수 있다면, 장계를 거짓으로 꾸미기는 더욱 쉽다.
청군은 매복을 위해 움직였다.
===
얕은 잠에 빠져들어 있자면 떠오르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다.
사단장실. 맨 안쪽 책상에 앉아있는 중년 남성. 그리고 그 앞에 열중쉬어 자세로 서있는 자신.
또 그날이다.
'그 보니까······ 자네는 야전이랑 안맞는거 같애.'
중년의 벗겨진 머리 위에 맺힌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것을 가만 응시하고 있던 그에게 중년은 서류 한장을 내밀었다.
'내 동기가 여기 소장으로 있는데······. 한 몇년 있다오는게 어때? 육사 전공도 군사사라며.'
대답을 뭐라고 했더라.
나는 최선을 다한 것 뿐이다?
- 부스럭
가물가물하던 의식이 부유한다.
이자원은 재빨리 몸을 뒤집어 상체를 일으켰다. 어느새 환도는 뽑혀있었다.
접근한 자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소, 소관이오이다!"
박철균은 기겁해서 외쳤다.
이자원은 칼을 갈무리해넣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이자원의 물음에 박철균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이번 승리로 다들 품계가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사오이다. 꼼짝없이 패할 뻔했던 부대를 살린 것이 파총 나리 아니오이까. 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사오이다."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니니 설레발치지 마라."
이자원은 냉정하게 말했다.
모든 논공행상은 전쟁이 끝난 뒤에야 있을 터. 가능성은 높았지만 뚜껑은 열어보아야 아는 것이다.
이자원의 말에도 박철균은 계속 옆을 쭈뼛거렸다.
"헌데 파총 나리, 궁금한 것이 있사오이다."
"뭐냐."
"처음 소관의 이름을 물어보신 것은 어째서였습니까?"
이자원은 '당연히 초면이니까'라고 대답하려다 멈칫했다.
대신 그는 말없이 박철균을 노려보았다.
침묵이 계속되자 박철균이 황급히 부연했다.
"아 그러니까, 같이 서북에서도 근무했지 않사오이까? 똑같은 초관이었습니다만은······."
이자원은 이제야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자원이 박철균의 이름을 물었으니, 그로서는 이상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파총께서 이놈과 친하지 않았으니 이름을 까먹었어도 이상하지 않겠습니다만은······ 혹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요컨대 자신이 무슨 일로 눈 밖에 난거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냥 잊었을 뿐이다. 신경 쓰지마라."
알아서 핑계를 찾아주는 모습에 이자원은 손쉽게 그리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변덕이었는지 한마디 질문을 던졌다.
"네가 보는 나는 어땠느냐?"
"······원체 말이 없고 또 사람을 꺼리는 듯 했지요. 누가 말을 걸어도 쳐내기 일쑤였지 않습니까."
잠시 머뭇대던 박철균이 대답했다.
"······."
본신은 그런 인간이었던가.
"하, 하지만 지금은 조선 남아 백 명을 데려놓아도 지지 않을 정도로 파총의 위엄이 대단하지요. 소관의 말은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이자원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전생에 남겨두고 온 삶이든,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본신의 삶이든.
그런 것에 신경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이쪽 진영과 인접한 청군 부대에서 함성이 울려퍼졌다.
"무슨 일인가?"
이자원이 급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뛰어갈 때, 이번에는 산성 쪽에서 조선군들이 함성을 외쳤다.
마치, 호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대체 어째서?'
이자원은 이리저리 켜지는 횃불로 전황을 파악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뭘 잘못 먹었는지 산성에서는 일단의 조선군들이 고함을 지르며 내려오고 있었다!
"이런 젠장할!"
이건 잘못됐다.
이자원이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선세강도 이 소란 때문에 잠을 깼는지 밖으로 뛰쳐나왔다.
"야습인가? 청군의 공격에 대비해야 하네!"
"영장 영감! 저들이 노리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산성군이 포위를 뚫으려 내려오고 있고, 청군은 그걸 노리고 있습니다! 어서 병력을 준비해주십시오!"
그러나 소수 경비 병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막 잠에서 깬터라 그리 금방 병력을 모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장수들은 이 함성이 근왕군을 노리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때문에 이자원이 민영과 허완을 설득하고, 병력을 모아 산성군을 구원하러 간 것은 반 시진이 훌쩍 넘은 시점에서였다.
하지만 청군의 공세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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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축이 이끄는 조선군이 매복에 걸려 살육당하던 그 시각.
온 조선군의 시선이 동문에 향해있을 때 은밀히 산성에 접근하는 한 무리의 청군이 있었다.
달빛이 비치는 것을 막기 위해 은색 갑주 위에 전포를 덧입은 그들은 바야라(bayara)였다.
각 기에서 뽑힌 정예병으로서 한에게 직속된 금위군.
그들은 청군 최강의 철기라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렇기에 말단 병사까지 수은갑을 갖춰 입을 정도로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다이샨은 바로 이 바야라까지 꺼내들어 야습을 감행하는 것이다.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의지였다.
"공격하라!"
성벽 여기저기 운제(雲梯)가 걸리고, 바야라들은 망설임없이 타고 올랐다.
"야습이다! 오랑캐들이 쳐들어왔다!"
급히 몇볓 병사들이 나섰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공성에 시달린데다 야심찬 출성 공격을 위해 상당한 병력이 빠져있던 조선군은 허무하게 붕괴했다.
실력에 있어서도 상대가 되지 않는 조선군 병사들을 간단하게 베어넘긴 바야라들은 곧장 암문으로 향했다.
이제 성문이 열리고 대기하고 있던 청군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기대하는 표정으로 잠자리에 들었던 인조는 의관을 정제할 새도 없이 놀라 달아날 것이고, 각 성벽에 분산되어 있던 조선군은 손쉽게 격파당할 것이다.
이조판서 최명길은 공격이 어드메서 들어왔는지 확인하고 서문으로 왕과 세자를 안내할 것이고, 신경진은 끝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분투하며, 다른 문무백관들은 더러는 청군의 칼에 맞아 명을 달리할 것이다.
사대부와 상놈, 병사와 백성을 가리지 않고 퍼지는 혼란은 방어를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그렇게 온 산성에 참상이 퍼지고 있을 때,
이자원이 피칠갑이 된채로 성 안에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