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쌍령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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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츠게키(돌격)!"
일본도를 뽑아든 항왜들은 거침없이 적을 베어넘겼다.
왜인의 검술은 대적할 자가 없다던 선조의 평가대로 백병전에 있어 뛰어난 항왜들이었다.
비록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구성원 대부분은 태어나 일본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2세대들이었으나 실력만큼은 아버지 세대 못지 않았다.
대구와 밀양 등지에 조성된 항왜촌에서 자라나 어려서부터 칼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패주하는 조선군의 등을 치느라 전열이 흐트러져 있던 청군이다.
항왜들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자 그대로 일격을 얻어맞은 청군은 그대로 도륙당했다.
"이 왜노(倭奴)들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이냐!"
드디어 돌격을 성공시켰거늘!
아이신기오로 요토는 황당한 표정으로 외쳤다.
"너희는 기병이다! 어찌 저깟 놈들에게 무너진단 말이냐?"
기병의 위력은 속도에서 발휘되는 것이다.
좁은 목책 안으로 짓쳐들어온 지금 청군 기병들은 좋은 표적일 뿐이었다.
항왜는 두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한 사람은 말을 찌르고, 다른 한 사람은 청군을 베어냈다.
"버일러! 서둘러 후퇴해야 합니다!"
"빌어먹을!"
요토는 그러나 상황 판단이 빠른 지휘관이었다.
조선군의 흉계(凶計)에 걸려들고 말았으니 지금은 최대한 전력을 온존하면서 퇴각하는 편이 나았다.
"모두 퇴각하라 전하라!"
그리 말하는 요토의 눈에 저 앞의 원앙진이 스쳤다..
조선군이 패주하는 와중에도 대형을 유지하며 분투를 벌이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 대장과 눈이 마주친 순간, 요토는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자였지만 어쩐지 이 흉수가 저자에게서 비롯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에 정신이 팔려있을 틈은 없었다.
"왜놈들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
"청졸은 목을 내놓아라!"
근처까지 육박해오는 항왜들의 칼날에 요토 또한 말을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
육량시를 쏘았던 적 지휘관과 시선이 얽힌 것 같은 찰나, 청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번 예봉이 꺾인데다 질서마저 유지되지 않은 청군의 속도는 돌격할 때보다 한참 못했다.
"이 파총!"
뒤늦게 선세강이 겨우 수습한 병력 일부를 데리고 뛰어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우병영에서 급히 지원온 요량의 장수가 말을 타고 서있었다. 민영의 막사로 그를 안내한 의병장 허득량이었다.
"영장 영감, 적을 뒤쫓는 일이 급합니다. 도감군은 영장 영감께서 이끌어주십시오."
이자원은 그리 외치고 쓰러진 청군이 타고 있던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지금 도주하는 적기는 평범한 청군이 아닙니다. 저자를 잡을 수 있다면 큰 공을 세울지 모릅니다."
"자, 잠깐!"
선세강이 뭐라 할 틈도 없이 이자원은 말에게 박차를 가했다.
- 히히힝!
어찌보면 이자원이 제 주인을 죽인 셈이지만, 본래가 등 위에 올라탄 인간을 섬기게 조련되어 있는 전마(戰馬)는 불평없이 잘 움직였다.
"본관도 따르겠네!"
허득량을 비롯한 대여섯 기가 이자원의 뒤를 따랐다.
이자원은 승마 경험이래봤자 오래 전 군마대에서 교육받은게 전부였으나 본신의 덕택인지 제법 능숙하게 말을 몰 수 있었다.
짓이겨진 목책을 뛰어넘어 지휘관을 쫓았으나 이미 거리가 꽤 벌어진 상태였다.
"거기 서라, 오랑캐 놈아!"
허득량이 외치자 별안간 놈이 상체를 돌려 활을 쏘았다.
"이런!"
화살은 다행히 빗나갔으나 지휘관은 미련없이 계속해서 달아나고 있었다.
기마술에 있어서도 확연히 차이가 나니 이대로 가다간 놓칠게 뻔했다.
이자원은 잠시 생각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소리쳤다.
"비, 수웨니 한, 홍타이지, 수삼비!"
그 말에 지휘관과 같이 달리던 청군 몇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되자 이자원은 다시 외쳤다.
"비, 수웨니 한, 홍타이지, 수삼비!"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병자호란사를 개수할 때 참고한다고 만문노당(満文老檔)을 뒤적거린 것이 다행이었다. 거기 적혀 있던 만주어 단어 몇개는 기억에 남았으니 말이다.
직역하자면,
'내가, 너희 한, 홍타이지, 죽였다.'
그러니 저들은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뒤돌아 볼 수 밖에 없었다.
홍타이지를 죽였다는 자가 눈 앞에 있지 않은가!
'이정도의 패배라면 누가 지휘관이라 한들 문책을 면하기 어렵다. 하지만 홍타이지를 죽인 범인을 잡아갈 수 있다면?'
감히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리라.
윗몸만 돌려 달아나는 지휘관의 눈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끝내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시르투, 부탐비(잡아라)!"
그 즉시 옆에 서있던 또다른 장수가 청군 두세 명과 함께 말을 돌려 달려들었다.
"아깝군!"
이자원은 진심으로 그리 외쳤다.
난데없이 만주어가 오가는 탓에 어리둥절해 있던 허득량과 조선군들은 청군이 접근하자 허겁지겁 창칼과 편곤을 휘둘렀다.
"자, 와라! 내가 너희 한을 도살한 이자원이다!"
조선 기병과 청 기병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
해가 동쪽에서 터오를 때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물제에야 끝났다.
대부분의 격전은 좌병영이 치렀지만 우병영도 만만치 않은 싸움을 벌였다.
청군 본영이 자군 병력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기겁하여 구원을 위해 경안천을 넘어 진군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군의 진군로에는 당초 조선군 수뇌부가 의도했던대로 양 언덕 위에 선 조선군 진영이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결국 청군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그대로 퇴각해야 했다.
쌍령 전투는 역사와 달리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자는 청장(淸將) 석이도(席爾圖)라 하고 한의 조카 요토(要土)의 휘하에 있던 자랍니다."
포로로 잡힌 청군 하나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만주어를 조금 할줄 아는 박철균이 통역했다.
그의 앞에는 방금 전까지 창칼을 겨루던 시르투의 수급이 놓여져 있었다.
"시르투는 옆에서 말을 달리던 장수의 명을 받고 움직였다. 그 자가 혹시 요토냐?"
이자원의 물음이 다시 박철균을 거치자 청군은 덜덜 떨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대어를 놓쳤군.'
입맛이 썼다.
요토는 청의 여덟 버일러 중 한 명으로 한과 다른 버일러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자였다. 죽거나 사로잡았으면 상당한 이득이 있었을터다.
하지만 미끼에 걸려들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시르투도 잘란 어전(甲喇額眞)에 상응하는 높은 신분이었고 말이다.
그 외에도 조선군은 많은 청군들을 사살했는데, 요도고이(岳多貴, 악다귀), 부당카러(布當克勒, 포당극륵) 등 여러 청나라 장수가 죽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야말로 대승이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긴장과 미묘한 두려움이 서려있던 우병사 민영의 막사는 웃음으로 넘쳤다.
"좌병영에서만 적 수급 3백을 참획했고, 좌우병영이 대로에서 힘껏 싸워 얻은 수급도 1백여에 달합니다. 오랑캐들은 전방위적으로 타격을 입은 셈이니 감히 더 머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원부사 백선남(白善男)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백선남의 말에 장수들의 분위기는 당장에라도 진격해야할 것처럼 들떴지만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었다.
"잠깐!"
바로 좌병사 허완이었다.
"우병사, 설마 바로 남한산성으로 진격할 생각이오?"
"물론이지요. 우리가 주상 전하를 구출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민영의 말에 허완은 신중하게 반론을 펼쳤다.
"오늘의 싸움으로 화약 소모가 극심하오. 또 우리군은 8천에 불과하니 바로 산성 구원에 나설 수 없소."
허완은 하도 전쟁에 진저리를 치는 까닭에 장수들의 신망을 얻진 못했지만 그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적어도 감사 대감이 이끌고 있는 병력이 올라올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지 않겠소? 경상도에서 물자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도 감사 대감이니 말이오."
"음······."
민영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 말했다.
"하지만 전하께서 우리 근왕군을 기다리기를 하루를 백년처럼 하실 터인데 신하로서 어찌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겠습니까?"
"다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소?"
허완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두 병마사 간의 의견이 대립하고 있을 때 이자원이 입을 열었다.
"허면 우선 두리봉까지 나아가 봉화를 올려 근왕군이 왔음을 알리시지요. 그것만으로도 조정과 군민의 사기가 크게 오를 것입니다."
홍타이지를 저격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 와중에 청장의 수급까지 직접 베어온 그였다.
이중 이자원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파총의 말이 옳은 듯합니다."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던 허득량이 찬성하고 나섰다.
시르투와의 싸움에서 다친 것이다.
곧 이어 허득량의 종제(從弟) 허복량(許復良)과 충청병사 이의배(李義培)도 찬동하자 잠시 서로를 쳐다보던 민영과 허완은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감사께 파발을 띄워 승첩을 알리고 두리봉으로 가겠다 전해야겠습니다."
"또한 전라도 근왕군에게도 이 소식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이자원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임금의 교지 내용은 어제 이미 사방에 파발을 띄워 전하게 했지만 이 쌍령에서의 승전도 알려야 했다.
'전라도 근왕군은 승전하고도 남한산성을 구원하진 못했다.'
광교산 전투는 김화 전투와 함께 병자호란의 몇 안되는 승전 중 하나이다.
전라병사 김준룡이 청군을 물리치고 누르하치의 부마인 양구리를 죽이는 성과까지 올렸지만 화약과 물자가 떨어져 수원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쌍령에서 경상도 근왕군이 승리했음을 알게된다면 적극적으로 연계할 수 있을 것이었다.
"감사께서 오실 때까지는 별 일이 없어야 할 터인데······."
회의가 파할 즈음 허완이 말꼬리를 흐리며 내뱉었다.
원래 걱정이 태산인 노인네였기에 다들 허투로 넘겼지만 이자원은 어쩐지 그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
1월 4일.
"네가 조선군에게 당한 패배가 이런 결과를 불러왔다."
저 멀리 불빛이 오른 봉우리를 보며 다이샨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토가 면목 없다는 듯이 머리를 숙였다.
"죽고 다친 양홍기가 얼마인줄 아느냐? 네가 기주로 있다고 진정으로 양홍기가 네것이라 생각하는게냐?"
명목상으로는 정홍기의 기주는 다이샨, 양홍기의 기주는 요토이다. 그러나 한도 아닌 버일러가 두 기를 아우르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요토가 맡았을 뿐, 다이샨은 양홍기 또한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시라도 빨리 성을 깨도 모자랄 판에, 저 봉화를 본 조선놈들이 추위와 굶주림도 잊고 날아다니고 있지. 다 네놈 덕분이다."
다이샨은 요토를 노려보았다.
부자(父子)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생모가 일찍 죽은 요토는 계모와 사이가 나빴고, 다이샨은 아예 그를 죽이려 들었다. 그 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감정의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기에 한을 죽였다는 군관을 앞에 두고 퇴각했다는 얘기까지 하면 어떻게 될까.
아버지는 옳다꾸나 하고 참형을 명하겠지.
"저에게 계책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새기전에 만회를 해야했다.
최소한 목숨은 붙어 있을 수 있게 말이다.
"조선의 도성에서 물건 하나만 찾아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