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쌍령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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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 임박했다.
서쪽 목책의 방비를 맡은 이자원은 곧장 병졸들을 다그쳤다.
"서둘러 단단한 나무를 골라 목책을 보강하라!"
본영이 예상한 청군의 진로는 북쪽을 지나는 대로였던 탓에 이쪽은 확연히 경계가 해이했다.
병졸들은 괜히 처음 보는 인간이 지휘관이랍시고 와 귀찮게 한다고 투덜거렸지만, 다행일지 불행일지 서쪽 목책에는 초관 이상 가는 지휘관이 없었다. 고로 이자원의 명령에도 정면으로 맞받지는 않았다.
뜻대로 목책을 높고 두텁게 보강하면서도, 이자원은 병사들의 상태를 보고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제대로 훈련을 받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운 병력, 각지의 속오군과 의병이 섞인 잡탕군, 그리고 죽창 하나 들고 있는 이들이 심심찮게 보일 정도로 빈약한 무장······.'
그러나 이들을 데리고 청군의 돌격을 버텨내야 한다.
왜란 직후부터 꾸준히 국가적으로 포수의 비율을 증가시켜온 탓에 조총수들의 숫자는 제법되었지만, 그들의 숙련도도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그나마 경험많은 정포수(精砲手)들은 모두 진 가운데에서 대기 중인 상황.
'이래서는 안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허완의 막사를 찾자, 허완은 모습을 비치지 않고 대신 안동영장(安東營將) 선세강(宣世綱)이 그를 맞이했다.
"병사께서 두통이 심하다 하시니 만나뵙기 힘들 것 같네."
'가지가지하는군.'
선세강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설명하자 이자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영장께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한데 모아둔 정포수들을 고루 배치하여 주십시오."
"정포수들을?"
선세강은 진중한 표정으로 듣더니 이내 반론을 펼쳤다.
"포수는 한 곳에 밀집되어 있을 때 그 위력을 발휘하는 법일세. 우리군에 총을 제대로 쏠줄 아는 자들은 그들 밖에 없는데 흩어놓으면 화력이 제대로 나오겠는가?"
"영장 영감의 말도 일리는 있사오만, 그대로 진이 붕괴되면 정포수들이라 한들 제대로 총을 쏠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이자원은 강하게 주장했다.
선세강이 그럼에도 미묘한 반응을 보이자 그는 끝내 정치적인 카드를 들이밀었다.
"조정에서 이 일을 알게 되면 분명 좌병사 영감이 신변을 염려하여 주위에 정예군을 두었다 생각할 것입니다. 조그마한 패배라도 당하면 필시 문책이 있겠지요."
일부러 소리를 높여 허완의 막사까지 들리도록 외친 이자원이었다.
당상(堂上)에 오른 무관이라고는 하나 외관(外官)으로만 나돌아 조정의 이야기를 잘 모르는 선세강이 당황하는 사이, 잠시 침묵하던 막사 안에서 무어라 소리가 들렸다. 허완이 부르는 모양이었다.
막사를 들어갔다 나온 선세강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좌병사께서 정포수 몇을 서쪽 목책에 배치해주겠다 하시었네. 허나 전부를 흩어놓는 것은······."
"알겠습니다. 대신 화약을 넉넉하게 지급해주십시오. 포수들이 고작 화약 두 냥을 받았는데, 그것으로는 열 발도 채 쏘지 못할 것입니다."
"끄응······."
숙련도가 부족한 포수들이 공연히 화약을 낭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실전에서는 화약을 본영에 받으러갈 시간 따윈 없다. 오히려 진이 무너지는 결과만 낳을 것이었다.
"영장 영감, 소관은 훈련도감의 파총입니다."
이자원은 자신이 중앙군 출신이라는 것까지 강조하며 선세강을 압박했다.
그것도 임금이 직접 명을 내려 승차시킨 사례였으니 그 후광을 빌려오기도 좋았다. 정작 인조는 지금 자신을 내보낸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결국 이자원은 뜻을 이뤄냈다.
===
동쪽서 해가 떠오르며 어슴푸레하게나마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그 덕에 조선군은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깃발이 봉우리에 꽂혀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적들이 상봉에 올랐습니다!"
"당황하지 마라! 예상했던 바다!"
이자원은 그렇게 다그쳤다.
아니나다를까 청군은 야음을 틈타 좌병영의 옆 고지를 장악했다.
당연히 좌병영은 일순 혼란에 빠졌지만 이자원이 미리 언질을 주었던 서쪽 목책의 수비군만큼은 진열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적이 이쪽으로 오리라 예상하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크다.
다들 두려운 기색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심리적 충격은 상당히 완화된 것이다.
- 다그닥, 두그닥, 다그닥······.
청 기병 하나가 나무방패와 깃발만 들고 앞섰고, 그 뒤에 기병 두세 명, 그 뒤로 다시 대여섯 명, 10여명이 뒤따라 모두 30여 명이었다.
"시작됐군."
이자원은 환도를 움켜쥐었다. 이것은 그로서도 처음 겪는 본격적인 전투였다. 홍타이지를 죽인 것은 저격에 가까웠고, 남한산성을 탈출할 때의 교전도 여럿이서 청군을 하나씩 쳐죽인 것에 불과했다.
"기다려라! 아직 쏘아서는 안된다!"
"정포수들의 움직임에 따라라!"
한 명이라도 패닉에 빠져 발포할 경우, 다들 따라서 걷잡을 수 없이 총을 쏘아댈 가능성이 높았다.
원래 역사에서도 그 틈을 타 돌입한 청군에 의해 좌병영이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이자원은 정포수를 제외한 포수들에게 화승에 불을 붙이고 장전을 완료하되, 차라리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어놓을 것을 명령했다.
"아직이다."
기묘한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는 청군들을 보면서 이자원은 침착하게 거리를 쟀다.
"지금이다! 전군 발포하라!"
“예, 나리!”
- 투타타탕!
현대의 소총 사격음과는 또 다른, 투박한 발포음이 일제히 울려퍼졌다. 정포수들의 발포였다.
선두의 청 기병이 총에 맞아 떨어짐과 동시에, 이어 뒤늦게 다른 포수들이 부랴부랴 방아쇠를 당겼다.
"으아악!"
"살려줘!"
매서운 기세로 돌격하던 서른 명의 기병은 반전할 틈도 없이 날아드는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의도치 않게 시간차 사격을 감행한 효과가 생긴 셈이었다.
자욱한 초연 사이로 흐릿하게 겨우 살아남은 기병들이 봉우리로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어, 어서 사격을!"
이미 적을 격퇴했건만, 초연에 가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포수 하나가 재차 화승에 불을 붙이려 하고 있기에 이자원은 그를 뻥 차버렸다.
"정신 차려라! 적은 이미 물러났다!"
다시 사격을 감행하면 다른 포수들도 따라서 지급받은 화약이 다 떨어질 때까지 쏘아댈 것이 뻔했다.
잠시 뒤 자연히 초연이 걷히자 병사들은 죽어 나자빠진 청군의 척후대를 볼 수 있었다.
곧 격렬한 반응이 터져나왔다.
"와아아아!"
"우리군이 이겼다! 천세, 천세, 천세!"
고작해야 서른 명 남짓한 척후대를 꺾은 것 뿐이었지만 병사들은 전투에서 승리하기라도 한 것마냥 천세를 연호했다.
"아직 방심해서는 안된다."
사기가 높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고작 저 정도가 청군 병력의 전부일리는 없었다.
이자원은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산등성이 너머로 새까맣게 기병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족히 5백 기는 되어보이는 병력이었다.
선두에 선 장수는 높은 자인지 좌우로 돌아보며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자가 청군의 지휘관인가?'
"오랑캐들이 산을 내려옵니다, 나리!"
"포수들은 서둘러 조총을 장전하라!"
청군이 빠르게 말을 타고 능선을 내려오고 있었지만 아직 공간은 충분했다.
그때였다.
"화살이다!"
포수들이 재빨리 화약을 재고 있을 때, 청 기병들이 고개를 내려오며 활을 쏘았다.
가속도 탓에 위력이 배가 된 화살들이 목책에 꽂히고, 일부 재수없는 포수들이 화살에 맞아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으아악!"
- 타당
누군가가 기어이 패닉에 빠져 장전을 완료하자마자 방아쇠를 당긴 모양이었다.
"발포하지 마라!"
이자원은 곧바로 호통을 쳤지만 사격은 걷잡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적기를 하나라도 더 줄여놓아야 할 판에, 한차례의 사격 기회가 어이없이 날아가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포화가 지나가고 나자 이자원이 곧장 소리쳤다.
"살수들은 창을 겨누어라!"
그러나 창을 든 살수들은 얼빠진 얼굴로 덜덜 떨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한시가 급한 때거늘!'
훈련되지 않은 병력들과 부사관의 부재는 기초적인 지휘에도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
매년 한번씩 하는 진법 훈련조차 받지 않은 자들이 태반인 것이다.
그때 같이 이자원 밑에 배치되어 있던 훈련도감 병졸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제 옆에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살수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제야 살수들이 후다닥 목책에 가서 붙었다.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이윽고 청군이 전투의 함성을 내지르며 목책에 격돌했다.
"솔호(ᠰᠣᠯᡥᠣ, 고려)놈들을 죽여라!"
"한의 원수를 갚자!"
이자원이 급히 높여놓은 덕택에 청군은 목책 위를 넘어올 수 없었지만, 그 충격력만큼은 대단했다.
산봉우리에서부터 가속도가 붙어 돌격한 청군은 말과 사람이 매한가지가 되어 목책을 밀어냈다.
우지끈하는 소리가 찰나 울려퍼진 것 같았지만, 그 소리는 곧 조선군 살수가 청군을 꿰뚫는 소음과 말의 비명소리, 양군의 악다구니에 묻혀 버렸다.
청군은 목책에 끼어서도 사이로 집요하게 창칼을 집어넣었고, 조선군도 이에 뒤질세라 미친듯이 창질을 해댔다. 기교 따윈 존재하지 않는, 그저 상대의 피륙을 해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물론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을 시도하는 자도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는 자는 목을 베겠다!"
이자원은 말만 앞세우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창을 놓고 비척비척 뒷걸음질치는 병사의 목을 단칼에 쳐버렸다.
"히이익······!"
피를 뒤집어쓴 주위의 병사들은 이자원에게 두려운 시선을 던졌다.
남한산성에서는 오랑캐 임금을 격살했다더니, 쌍령에 와서는 매섭게 목책을 세우라 몰아치고 이젠 망설임없이 칼을 휘두르지 않는가.
병사들의 눈에는 이자원이 숫제 흉신악살(凶神惡煞)로 보였다.
청군과의 사이에는 목책이라도 있지, 이자원의 칼은 자신들의 뒤통수에 있다.
이자원이 도망치는 여럿을 죽이는 꼴을 본 조선군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청군이 물러난다!"
목책을 뚫지 못하자 살아남은 청군들은 반전해 후퇴했다.
그러나 말도 잃고 오르막을 오르는 그들의 속도는 좋은 과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자원은 살수들의 뒤에서 장전을 마친 포수들과 사수들에게 발사를 명령했다.
무수히 날아간 총탄과 화살들이 청군의 등을 꿰었다.
청군의 두번째 돌격은 첫 교전보다도 많은 시체를 남기고 실패했다.
조선군은 다시 천세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척후대에 불과했던 첫번째와는 달리, 이번 공격은 정말로 회심에 차 감행한 것이었음에도 훌륭하게 막아낸 것이다.
뒤늦게 청군의 주공이 이곳임을 파악하고 달려온 안동영장 선세강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하구만 대단해! 고작 소수의 잡병만 가지고 청군의 기습을 막아내다니!"
"소관에게는 딱히 기습이 아니었습니다."
기습의 효과는 적이 알아차리는 순간 반감된다.
이자원이 청군을 막아낸 것도 그런 이치에서였다. 물론 이자원은 미래에서 쌍령 전투의 전개를 보고 왔기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선세강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진 듯했다.
"정찰 하나 보내지 않고 청군이 우회해올 것을 알아차렸으니 그 통찰력이야말로 명장의 자질이라 할만하네."
선세강의 칭찬에도 이자원은 건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직 승리의 기쁨에 젖기는 이릅니다."
청군은 기습은 실패했지만 이미 고지를 점거하고 있다. 좌병영을 공략하기에 이보다 유리한 지형은 없을 터.
공격은 해가 떠있는 중에 몇번이고 계속될 것이다.
이자원은 그렇게 예측했고,
"내 칼을 가져와라. 공세를 계속한다."
아이신기오로 요토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