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쌍령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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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가면 크고 작은 두 개의 고개가 있으니, 이름하여 쌍령이라 한다.
북쪽에는 경안천(慶安川)이 흐르고 좌우로 고개를 끼고 평탄한 길이 나있으니, 언뜻 보기에 약졸(弱卒)이 지형을 의지해 싸우기 좋은 곳 같았다.
"길이 좁아지는 곳의 좌우 언덕에 병력을 나누어 목책을 두르고 진을 치면 철기 수만도 능히 막아낼 수 있겠소."
1월 2일.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栐)이 근왕군 8천 명을 이끌고 쌍령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곧 멀지 않은 곳에 청군이 있음을 깨달았다.
청군과 회전에서 맞붙는 것은 하책임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유리한 지세를 껴야만 한번 청군을 물리칠 수 있고,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도 열린다.
본래라면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 경안천을 의지하고 싸우는 방법도 있겠으나, 계절이 겨울이라 하필 강이 모두 얼어버렸다. 또 큰 하천도 아니기에 그 방법이 최선으로 보였다.
따라서 허완이 서쪽 언덕에, 민영이 동쪽 언덕에 각자 4천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치기로 결정되었다.
"소장은 휘하 병력을 데리고 경안천 인근으로 가 적들의 동태를 살피겠습니다."
"그러시오."
김충선(金忠善)의 말에 민영은 누구에게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선선히 허락했다.
나이가 같은 병마사인 허완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지만 실질적인 근왕군의 지휘관은 민영 그였다.
대단히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허완이 지금 거의 PTSD 증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쯧. 왜란 때부터 활약한 숙장이 이런 꼴이라니.'
그 이순신에게 장재(將材)라 칭찬을 들었던 영감이지만, 다시 한번 닥쳐온 끔찍한 전란에 마음이 심히 상했는지 하루가 멀다하고 한탄에 눈물을 짜내는 판이었던 것이다.
좌병사가 이리 나오니 밑의 수하들인들 그를 믿고 싸울 수 있겠는가.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여러 장졸이 살아나갈 수 없겠다.'
민영은 그리 생각하자 식은땀이 주륵 흘렀으나 내색하지 않고 덧붙였다.
"항왜들은 몸이 날래니 적들이 경안천을 넘어오면 빠르게 물러나 보고할 수 있을 것이오."
김충선은 휘하에 150여 명 쯤 되는 항왜들을 거느리고 있다.
항왜라고는 하나 대부분이 2세들로, 항왜 1세대는 김계충과 김구인 등 김충선 휘하의 무관 몇 뿐이다. 왜란으로부터도 세월이 많이 흐른 탓이다.
그래도 아직까진 윗대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있어, 다들 왜도(倭刀)를 씀에 매우 능했다.
좀 더 대가 내려가면 흔적도 없이 동화되겠지만 말이다.
명령이 내려지자 조선군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 청군이 내려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서둘러 목책부터 세워야 했던 것이다.
이자원 일행이 쌍령에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이런 제길. 한발 늦었나."
조선군의 포진을 본 이자원은 입을 일그러뜨렸다.
오늘 경상도 근왕군이 쌍령에 이르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언제쯤인지는 몰랐다.
해서 최대한 발걸음을 재촉했으나 근처 요토의 청군에게서 몸을 숨기며 이동해야 하다보니 늦어버린 것이다.
이미 조선군은 좌우의 언덕에 진영을 차려놓은 뒤였다.
"멈춰라! 어디서 온 누구냐!"
이쪽을 발견한 장수 하나가 그렇게 소리지르자, 이자원은 맞받아 대꾸했다.
"본관은 훈련도감 좌부중사 파총 이자원이오! 주상 전하의 교지를 받들어 왔으니 서둘러 병마사께 전하시오!"
"파총······?"
장수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보아하니 아직 이립(而立, 30세)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파총이라니. 진정 교지를 받들고 온 것이 맞는가?"
"산성을 지키는 일에 공을 세워 승차하였소이다! 나를 병마사께 데려다주면 전말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어서 말을 전하기나 하시오!"
장수는 잠시 고민했다.
인사적체가 몹시 심한 조선군 특성상 저리 젊은 이가 파총이라니 의심은 갔지만 일행은 이자원을 포함해 보병 몇몇 뿐이었고, 행색도 완전한 조선 군관과 병졸의 것이었다.
"내 병사께 전할테니 조금만 기다리게!"
장수는 그리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잠시 뒤, 이자원은 장수를 따라 민영의 막사로 안내를 받고 있었다.
"본관은 대구부(大邱府)의 의병장 허득량(許得良)일세. 역적 이괄이 난을 일으켰을 때 금군별장을 지냈지."
그 뒤 낙향했다가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종제(從弟)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근왕군에 합류했다고 했다.
"자, 도착했네."
임금의 교지를 받들고 왔으니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 충청좌병사 이의배와 주요 관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근왕군은 어명을 받드시오!"
이자원은 교지를 읊으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왕은 이르노라. 나라가 불행하여 강한 오랑캐와 가까운 이웃을 삼았다. 그들은 오로지 속임수와 폭력을 능사로 삼고, 천조(天朝)에 반역하여 천하를 도적질하려는 뜻을 품었기에 내가 즉위한 이래 일찍이 한 차례 사개(使介)도 왕래시키지 않았다. 그러자 오랑캐는 한순간 군사를 일으켜 나라 안으로 내달리니, 도성을 잃고 임금은 궁벽한 산성에 의지하게 되었다.
허나 만물은 순리로 흐르는 바, 이제 초관 이 모(某) 등이 쏜 포에 맞아 노추가 비루한 목숨을 거두었으니 실로 하늘이 무심치 않다 하겠다.
너희는 이제 이 교서를 받들어 오랑캐를 토평하고, 사직이 대부(大夫)를 높인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
처음 침통한 표정으로 교지를 듣던 장수들은 홍타이지가 죽었다는 부분에 이르러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눈 앞의 이 파총이, 바로 그 공적으로 승차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놀라움은 배가 되었다.
"자, 자네가 황태극을 죽였다고?"
민영이 떨리는 동공을 멈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허어!"
"산성의 포위를 뚫고 온 것만도 대단한 일이거늘······."
홍타이지를 죽인 것은 이 전쟁 제일(第一)의 공신이라는 뜻.
새파란 파총 정도야 품계와 경력으로 깔아뭉갤 수 있는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더이상 이자원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어느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좌우병사 영감, 청컨대 이곳에 머무르며 싸움을 돕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이자원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좋아.'
그러나 이제 첫단추를 꿰었을 뿐이다.
이제 그는 자기도 모르게 범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근왕군을 구출해야 했다.
"소관이 근왕군과 함께하게 되었으니, 한가지 경고해둘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
민영의 물음에 이자원은 딱 잘라 대답했다.
"포진, 그 자체입니다."
이자원의 말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이자원은 그러나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좌우 병영은 어중간하게 야트막한 언덕에 진을 쳤습니다. 평지보다는 높으나 청군이 봉우리를 점령하면 오히려 우리가 아래쪽에 놓이니, 지세가 불리합니다."
"어리석은 소리!"
그렇게 소리친 이는 허완이었다.
"자네 말은 청군이 평지로 오지 않고, 구태여 산길로 진격한다는 소리 아닌가? 청군은 기병을 장기로 삼아 큰 싸움을 벌여 왔는데 어찌 이점을 포기하고 산을 오르겠나?"
일견 합리적인 말이었다.
청군이 무서운 이유는 그 철기(鐵騎)의 기동력과 파괴력 때문이 아니던가.
그 막강한 힘을 버리고 구태여 기병을 쓸 수 없는 길로 오다니. 모두가 내심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욱 험한 요동의 산지에서도 전투를 벌여 승리해온 청군이다.
전쟁터에서 상대에 대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죽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
'실제로 그렇게 됐지.'
청군은 산길로 우회해 유리한 지세를 타고 좌병영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평지와 닿은 북쪽 목책은 높게 만들어놓았으나 산에 인접한 서쪽 목책은 대강 만들었던 좌병영은 사격통제까지 실패하며 그대로 패퇴했고, 청군은 그 길로 우병영까지 밀고 가며 쌍령 전투는 조선의 패배로 끝난다.
"그도 그렇고, 이미 진을 쳤으니 자리를 옮기기엔 시간이 없네."
우병사 민영까지 현실적인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래서 진을 치기 전에 도착했어야 했는데.'
이자원은 하는 수 없이 이럴 때를 대비한 2안을 꺼내들었다.
"그럼 소관에게 좌병영의 서쪽을 지키는 일을 맡겨주십시오."
이자원의 말에 민영은 허완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전쟁에 염증을 내고 있다 해도 좌병영의 지휘관은 허완이었으니, 그의 소관이었던 것이다.
"······마음대로 하게."
허완도 구태여 그것을 막지는 않았다.
===
막사를 나선 이자원은 산성에서 같이 탈출했던 일행들을 불러모았다.
"이중 훈련도감에서 포수로 있었던 자는 있는가?"
서로 뚱하게 쳐다보던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모두 살수(殺手)들입니다, 나으리."
하기야 몰래 포위를 뚫을 때 포수와 사수들은 필요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자원은 못내 아쉬웠다.
"어쩔 수 없군."
허완과 일부러 대립각을 만들긴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제대로 된 사격통제를 위해서는 숙련된 포수들이 중심을 잡아줘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허완의 명에 의해 진 중앙에 모아져 있었다.
"그건은 나중에 처리하고, 박 초관."
이자원의 부름에 그는 빠릿하게 나섰다.
"귀관은 병졸 셋을 데리고 김충선 장군의 진지로 가도록."
김충선은 여기서 5리쯤 떨어진 곳에 따로 진을 쳤다.
이자원은 박철균에게 그곳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었다.
만약 전황이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그들이야말로 이쪽의 숨겨진 한 칼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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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신기오로 요토는 휘하의 양홍기(鑲紅旗) 1500명을 거느리고 현산에 진을 쳤다.
"조선놈들은 평지길과 접한 양 언덕에 진을 친 것 같습니다, 버일러."
척후들의 보고를 들으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딘가 가볍고 얕은데가 있는 동생 쇼토와는 달리 그는 아버지 다이샨을 닮았다.
다시 말해 요토는 침착하고, 냉혹하고, 전략적인 인간이었다.
"우리가 우회할거란 예상은 전혀 않은 모양이군."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요토에게 뻔히 보였다.
바보처럼 말을 달리며 조선군의 견고한 목책 앞에 들이박아 주기를 원하겠지.
허나 상대방의 노림수에 알면서도 걸려줄 이유는 없었다.
"예천. 5백 군사를 줄테니 본진을 지켜라. 강을 건널듯 말듯 적을 혼란시켜라."
예천은 양홍기 구사 어전(기 지휘관)으로 요토의 측근이었다.
"그렇다면 버일러께서는······?"
"나는 직접 1천 군사를 이끌고 산을 넘어 놈들을 칠 것이다."
"버일러, 구태여 직접 그러실 필요가 있나이까? 공격은 소장이 맡겠습니다!"
휘하의 무장 시르투가 외쳤지만 요토는 단호했다.
"남겨두고 온 양홍기들이 성을 공략하다 죽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요토가 끌고 온 병력은 양홍기의 전부가 아니다. 나머지는 아버지 다이샨이 쥐고서 공성전을 진행하리라.
요토 그 자신에게는 아무 의미없는 전투에 자기 전력이 깎여나가고 있는 것이다.
"조선군을 압도적으로 격멸해야 한다. 이미 필요없어진 전쟁이야.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이 상수다."
근왕군이 박살나고 나면 남한산성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런 판에 이런 탐스러운 뒤통수를 드러내다니, 피해없이 전과를 올릴 기회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지휘관은 자신이었다.
쌍령 전투 개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