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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4화 (4/213)

〈 4화 〉 탈출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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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원은 원래 몸의 주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역사에 그 이름을 크게 남긴 인물도 아니요, 본신의 기억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이 초관 이자원이라는 인물이 평소 신변잡기 쓰기를 즐겨한 모양인지 난중(亂中)에도 개인기록 일부를 끼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아버지는 옛날에 잠시 금군 별장을 지냈다가 낙향한 아무개요, 자신은 그 얼자(孼子)로서 집안에 적자가 없어 성서탈적(聖庶奪嫡, 첩이 낳은 아들을 정실 부인의 아들로 함)을 통해 적모(嫡母)의 호적에 올라간 인물이었다.

덕분에 신분의 문제 없이 무과에 입격할 수 있었지만, 적모는 그를 몹시 꺼려한 모양이었다.

그나마 부친이 살아있을 때는 정도가 덜하였으나 설상가상으로 적모를 모시고 살던 아내와 갓난쟁이 아들이 돌림병으로 세상을 떴고, 그는 아예 고향집으로 발걸음을 끊었다.

기구하다면 기구한 가정사였지만 이자원에게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모르는 사람을 부모로 섬기거나 아내, 자식으로 대하기엔 어쩐지 꺼려지지 않은가.

본신의 어딘가 비틀린 성격 탓에 가까이 지내는 사람도 없는 듯했으니 이자원으로서는 행세하기도 편했고 말이다.

그러나 꼭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와 함께 산성의 포위를 뚫고 전하의 교지를 전달할 자는 앞으로 나서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종9품 초관이었던 인간이 입궐하더니 종4품 파총이 되어 돌아왔다.

이자원이 부방을 다녀와 훈련도감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파격적인 승진이었으나, 세운 공이 공이었기에 별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당장 원역사에서도 종6품 주부가 포를 쏴서 청군을 몇명 죽이자 이를 통쾌하게 여긴 조정에 의해 종4품 첨정으로 승진한 사례가 있었으니 말이다.

훈련도감은 좌부(左部)와 우부(右部)로 나누어지고, 다시 각 부는 좌사(左司), 중사(中司), 우사(右司)로 나뉘어지니 파총은 바로 이 사의 지휘관이었다.

"아무도 없나?"

마침 공석이던 좌부중사를 맡게 된 이자원이 휘하의 초관들을 모아놓고 그리 말했지만 다들 눈알만 굴릴 뿐 제대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나이도 이자원보다 많고 초관으로서의 경력도 그보다 길었다.

비록 이자원이 홍타이지를 잡았다고는 하나, 새파란 지휘관을 믿고 목숨을 걸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어명이 내려졌으니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

초관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맨 끝에 서 있는 텁석부리 사내에게 향했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지만 결국 눈치를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귀관의 이름은?"

"······소관, 박철균이라고 하오이다."

겉늙어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그가 이 중 막내인 모양이었다.

초관들이 어린 상관이 마음에 들지 않듯 이자원도 경험 적은 초관은 못미더웠다.

기왕이면 좀 더 연차가 있는 쪽이 좋았으나 아는 초관도 없는 이자원으로서는 하는 수 없었다.

"날랜 병사 십여 명만 뽑아서 대기시키도록 하라. 오늘밤 성을 나갈 것이다."

"예, 파총 나리."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박철균은 그렇게 대답했다.

===

해는 벌봉에 채 지워지지 않은 홍타이지의 핏자국을 남긴 채로 저물었다.

음력 1월 1일의 밤은 매섭도록 춥고 어두웠다.

그말은 성 밖을 나서기에 꼭 알맞은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준비는 됐는가?"

어명을 받아 지원나온 어영별장 이기축(李起築)의 말이다.

그는 무과 급제 후 반정에 가담하여 출세가도를 달렸다. 물론 공신이랍시고 자리만 차고 앉은 낙하산이 아니라 알아주는 맹장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번 작전의 일익을 맡았으리라.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축은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한마디를 툭 던졌다.

"망설이지 않는군."

그는 이자원을 흥미롭다는 듯이 훑어보았다.

"기껏 대공을 세웠거늘 죽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나아가는 판인데 말일세."

"사지(死地)가 아니라 활로(活路)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이자원의 대답은 나름 진심이었다.

비록 인조가 항전을 결의했다지만 공세가 거세지면 언제 화친 카드를 만지작거릴지 모른다.

인조의 변덕에 목숨을 맡기느니 차라리 산성을 벗어나는 편이 나았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별장 영감."

"큰일을 맡은 것은 자네인데 어찌 내게 무운을 비는가? 부디 보중하시게."

말은 그렇게 했으나 어찌보면 이기축이 더 위험한 곳으로 뛰어들어가는 입장이다.

이제부터 적극적으로 청군의 이목을 끌어야 했으니 말이다.

이자원과 인사를 나눈 이기축은 곧장 마병(馬兵) 수십을 이끌고 대로변을 따라 바삐 내려갔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며 주요 통로상에 수십 개의 목책을 구축했고, 그 사이에 여러 개의 쇠방울을 매단 새끼줄을 연결해놓았다. 사람이 드나들면 반드시 방울이 울려 들킬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실제로 조정은 외부 소식을 거의 받아보지 못했으니 효과 하나만큼은 확실했던 셈이다.

그래서 이자원은 청군의 경계망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한이 죽은 바로 그날, 사방에서 조선군의 움직임이 포착된다면."

청군은 분명 포위를 뚫기 위한 대규모 공세로 파악할 것이다. 해서,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부랴부랴 병력을 집결시킬터다.

그러나 실제로 허술해진 포위망을 뚫고 산성을 빠져나가는 것은 이자원을 포함한 십여 명 뿐.

나머지는 그저 청군의 경계에 일부러 걸려드는 소수의 병력이다.

지나치게 예민한 경계망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것이다.

"지금이군."

이기축의 움직임을 눈치챈 모양인지 아래쪽이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알아듣기 힘든 청군의 고함소리와 째지는 금속음이 저 아래에서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이기축의 것으로 추정되는 노호성이 은은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이자원은 말했다.

"우리는 샛길로 성을 빠져나간다."

남한산성 안에는 산길이라면 훤한 약초꾼이 여럿 있다.

말을 끌고 내려가기엔 고된 길이기에 걸어서 이동해야 하지만, 적어도 오늘밤 안에는 산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철균과 병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꺼려하는 기색이 서려있었다.

아무리 설명을 들었어도 막상 십여 명이서 청군들을 뚫고 가야한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리라.

그래서 이자원은 그들의 두려움을 없애주기로 했다. 그는 망설임없이 허리춤에서 환도를 뽑아들었다.

"너희는 내가 홍타이지를 격살했음을 알 것이다."

칼 끝은 부하들의 눈께에서 멈췄다.

"십만 오랑캐의 주인도 죽인 내가 항명하는 자는 못죽일 것 같으냐?"

"······!"

"반면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이 돌아가는 법이다. 청주(淸主)를 죽인 공으로 본관은 수 품(品)을 뛰어넘어 승차하고 포수들은 값진 비단 여러 필을 받았다. 자, 선택해라. 항명이냐, 은상이냐!"

이자원의 윽박에 박철균과 병졸들은 쭈뼛거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며,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제야 이자원은 칼을 갈무리해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움직여라. 동이 트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

산을 내려가기 시작한 이후로는 박철균과 병졸들은 말을 그럭저럭 잘 따랐다.

칼을 뽑아들고 윽박지른 탓도 있지만, 이미 사지로 들어온 마당에 이자원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커헉······."

협격(挾擊)을 받은 청군이 단말마를 내질렀다.

뒤에서 이자원이 찌른 환도가 가슴팍을 뚫고 튀어나온 채였으나 기어이 칼을 휘두르려 하는 것을, 박철균이 편곤을 휘둘러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병졸들은 어느새 익숙해진 손으로 시체를 풀숲에 던져넣었다.

"쉽지 않군."

조선군의 교란 작전으로 남한산 전체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샛길을 통해 구르듯이 내려오는 동안에도 대로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확실히 포위가 느슨해지긴 했으나 청군은 괜히 강군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완전히 손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재수없게 조우한 몇몇 청군은 일신의 무예도 무예지만, 자꾸 피리를 불어 본영에 이쪽의 존재를 알리려한 탓에 진땀을 뺐다.

박철균이 어둠에 숨어 부방 시절 배운 짧은 여진어로 적들을 속여댄 덕에 겨우 들키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겨우 포위를 빠져나온 것 같습니다, 나리."

남한산성 동문부터 번천(樊川) 인근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다 보니 아래의 청군 숙영지가 환히 내려다보였다.

횃불을 켠 병사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꼴을 보니 아직도 진중에 상당한 혼란이 존재하는 듯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정말로 공세를 감행했어도 좋았을 것 같사오이다."

박철균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글쎄."

이자원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원역사에서도 조선군은 청군에게 공세를 가하기도 했지만, 20명을 이끌고 가서 청군 6명을 죽이고 병기와 마필을 노획하는 등의 소소한 성과를 거뒀을 뿐이다.

한이 죽었다곤 하나 청군은 전열을 유지한 상황에서 양군이 대규모로 맞부딪히면 어떻게 될지는 완전한 미지수였다.

'수성전이라면 모를까······.'

청 본군이 2만 1천 명, 남한산성의 조선군이 9300명 가량.

지형은 유리하나 조선군은 양과 질, 모두에서 뒤떨어진다. 그렇기에 조선군은 공세를 시도하지 못했고, 버티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식량이 떨어졌고, 강화도가 함락됐다. 해서 인조는 항복했다. 요컨대 시간은 조선의 편이 아니었던 셈이다.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가 되었지만.

이자원은 어느 정도 안전한 곳까지 도달했다는 확신이 들자 부하들을 불러모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미 동은 터오르고 있던 터였다. 병졸들이 교대로 짧은 잠에 드는 동안 이자원은 품 속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인조의 교지였다.

근왕군에게 그들의 신분을 보장하고, 현재의 전황을 알리며, 앞으로의 행동 방침을 담은 문서였지만 수취인은 명확하지 않았다.

조정이 각도의 근왕군이 얼마나 있는지, 어디쯤에 있는지, 아직까지 부대가 유지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이자원에게 내려진 왕명은 그저 이 교지를 근왕군 아무에게 전달하라는 것 뿐이었다.

박철균은 교지를 꺼낸 이자원을 보고 그가 행로를 고민하고 있다 생각했는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검단산에 강원도 근왕병이 도달했다고 들었사오이다. 우선 그리로 가시지요."

박철균의 말은 청군이 포위망을 완성하기 직전, 12월 26일에 들어온 소식에 따른 것이었다.

다른 근왕군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그로서는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아니."

그러나 이자원은 고개를 저었다.

소식이 들어온 다음날 강원도 근왕군은 로오사의 3백 군대에 패해 무너졌다. 지금 검단산에 가봐야 조선군의 시체만 구경하게 될 것이다.

미래에서 보고 온 근왕군의 위치와 전력, 그리고 전황을 고려했을 때 지금 그들이 가야할 곳은 딱 한 군데였다.

"쌍령."

이자원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우리는 쌍령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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