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결단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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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이자원, 전하의 존안을 뵈옵니다."
초관은 젊었다.
세자와 비슷한 나이일까, 무과에 합격해 1년여 서북 지방으로 부방(赴防)을 다녀온 뒤 훈련도감에 들어왔다는데 아직 20대 중반으로나 보였다.
"그래, 그대가 한을 포로 쏘아 죽인 이자원인가?"
"예, 전하."
이자원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조아렸다.
"참으로 장한 일이다. 이걸로 오랑캐도 조선의 기상을 엿보았을 터. 그대를 승차시키고 싶으나······."
인조의 눈치를 받은 김류가 나섰다.
"전하께서는 승차를 원하시나 여러 신하들이 오랑캐를 쓸데없이 자극해 화친을 그르쳤다 반대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네."
인조는 그가 크게 실망하리라 생각했으나, 이자원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이미 오랑캐가 강토를 범했사온데, 어찌하여 대신들께서 화친을 주장하시는지 여쭈어봐도 되겠나이까?"
단지 이렇게 물었을 뿐이다.
주화파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최명길이 나섰다.
"십만 대군이 성을 에워싸고, 우리 조정은 그 안에 갇혀 외롭게 싸우는 형국일세. 근왕군이 올라오고 있으나 적군이 통하는 길을 모두 끊어놓고 있으니 계속 싸우다가는 사람은 덧없이 죽고 수백년 사직은 보존할 길이 없어 화친을 주장한 것일세."
최명길은 다시 말을 이었다.
"허나 지금 한이 죽어 화친을 구하려면 이젠 여러 사람의 목이 떨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판인데, 그 맨 윗자리에 자네 이름이 있으니 어찌 승차를 시킬 수 있겠나?"
'주화파다운 말이군.'
이자원은 쓰게 웃었다.
그는 딱히 최명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답도 없는 상황에서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주전파들보다는 훨씬 현실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정세는 완전히 뒤집혔다.'
최명길이 외교관으로서 파악하고 있는 그림은 홍타이지의 죽음으로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자원은 이제 그것을 여기있는 모두에게 납득시킬 생각이었다.
"전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사옵니까?"
"말해보라."
인조는 일이 영 엉뚱하게 돌아간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허락하지 않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첫째로, 신 하나 따위의 목으로 대청국 한의 넋을 달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주전파 여럿의 목이 날아갈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목을 갖고 돌아가더라도 청은 결코 원한을 잊지 않으리라.
"둘째, 구태여 화친을 맺지 않더라도 한이 죽은 이상 군대는 물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홍타이지는 친정 중에 사망했고, 지휘권은 분산된 상태다. 처음에는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성을 공략하러 들지는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있었다.
"허나 철군 후 오랑캐가 다시 전열을 정비해 쳐들어온다면 어찌하는가?"
바로 여몽전쟁 당시처럼, 다시 침공해오면 그만이라는 것.
"누구의 명으로 쳐들어온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야 새로 보위에 오른 세자가······."
말을 이어가던 인조는 입을 다물었다.
"전하, 한에게는 세자가 없사옵니다. 종친들이 각자 팔기를 나누어 갖고 있고, 후계자도 명확하지 않아 반드시 화합하지 못할 터이니 조선을 신경쓸 틈이 없을 것이옵니다."
원역사에서도 홍타이지가 죽은 후 후계를 놓고 암투가 벌어졌다.
다만 내전으로는 비화하지 않았으며, 정쟁 끝에 도르곤이 홍타이지의 장남 호오거를 밀어내고 실권을 장악했을 뿐이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6년이나 먼저 죽은 지금 후계는 완전한 미궁 속이었다.
본래 그 뒤를 이어 즉위해야할 순치제(順治帝) 푸린은 채 태어나지도 못하고 그 존재가 삭제된 마당이 아닌가.
"무엇보다 몽골을 정벌한지 불과 1년 밖에 되지 않았으니, 한이 죽은 소식이 알려지면 그 또한 오랑캐의 근심이 될 것인즉, 절대 함부로 군사를 일으킬 수 없을 것이옵니다."
"······!"
좌중은 이제 주화파와 주전파를 막론하고 이자원의 말에 빠져들고 있었다.
인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자원을 좋은 말로 달래내 화친을 이루려던 처음의 생각은 서서히 옅어져가고 있었다. 한번 해볼만한 것 같지 않은가?
주전파가 그렇게 아우성을 칠때, 최명길이 정곡을 찌르고 들어왔다.
"부방을 다녀와 그런지 정세에 상당히 밝은 것은 틀림이 없군. 허나 결정적인 문제가 남았네. 바로 성이 떨어지면 지금까지 말한 것이 다 도루묵이 된다는 것이지."
요동도 함락한 청군이다.
산성을 지킬 방책이 없다면, 네놈의 목을 베어서라도 화친을 구할 수 밖에 없다.
최명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신이, 직접 포위를 뚫고 근왕군을 불러 오겠사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자원에게는 그 대책이 있었다.
"저들을 교란해 빠져나갈 방도를 마련해놓았습니다."
홍타이지를 대포로 쏘아죽인 자의 말이다.
그 인간이 확신에 찬 태도로 그리 말하자 다시금 기이한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이래 조선 조정에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화친할 것이냐, 아름답게 죽을 것이냐.
이길 수 있다는 가정 따윈 주전파도 입에 담지 못했다. 군사도, 사기도, 식량마저도 모두 부족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눈 앞의 이 초관은 자신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고.
"이자원의 말이 지극히 옳습니다! 오랑캐들이 스스로 난세에 접어든 틈을 타 군사를 조련하고 성을 보수한다면 어찌 감히 저들이 조선의 강토를 넘볼 수 있겠사옵니까?"
"전하께오서 토로장군 손권처럼 탁자를 자르고 결단을 내리신다면 신들도 또한 함께 죽을 각오로 성을 지키겠나이다!"
주전파의 열기에 인조도 전염된 듯, 용상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초관 이자원을 파총으로 승차시키겠다! 오늘 후로 오랑캐와 화친하자는 자가 있거든 칼로써 피를 보리라!"
그렇게 조선 조정은 항전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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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성을 깨부수고 조선왕을 끌어내 참해야합니다!"
막사 안에 정황기 구사 어전(gūsai ejen) 탄타이(譚泰)의 분노가 울려퍼졌다.
정황기는 양황기, 정람기와 함께 한의 직속 휘하에 있는 부대로서, 상삼기(上三旗)라 불리며 특별히 취급되었다. 자연히 홍타이지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인물이 지휘관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탄타이 또한 그러했다.
한의 이복형이며, 대청의 친왕.
본래라면 눈도 마주칠 수 없는 위치인 이 남자, 다이샨의 앞에서 큰소리를 낸 이유도 그것이었다.
주군이 그리도 비참하게 비명횡사했는데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치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화포는 언제 도착하는가?"
탄타이의 항의에 다이샨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미 한께서 명하신지가 여러 날이니 곧 있으면 도착할 것입니다."
양황기 구사 어전 바인투가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다이샨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경중명, 공유덕, 상가희 등 한족 3왕이 끌고 오는 화포는 말과 노새에 실을 수 있는 작은 홍이포 십여 문에 불과한데 산성을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도 사흘은 걸릴 것입니다."
비관적인 목소리로 말한 사람은 양홍기 기주이자 다이샨의 장남 요토였다.
호랑이 같은 전격전을 감행해 남한산성을 포위한 것은 좋았으나, 그 때문에 화포는 후위에 맡겨놓고 올 수 밖에 없었다.
홍타이지 또한 신속히 이동할 수 있는 화기는 따로이 옮겨오도록 했으나, 본격적인 공성을 벌이기 위해선 후위의 두두군이 가진 홍이포가 필요했다.
"사흘, 사흘이라."
싸움을 벌이고자 한다면 낙관적으로 보아도 그만큼의 시간을 버리고 시작해야한다.
심지어 도르곤과 호오거가 이끄는 좌군(左軍)은 도착조차 하지 않은 상황.
"아버님, 철군해야 합니다."
요토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한께서 돌아가신 이상 이 전쟁은 오래 끌지 못합니다. 서둘러 묵던(ᠮᡠᡣᡩᡝᠠ, 심양)으로 돌아가 새로운 한을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로이 버일러(多羅貝勒)! 그 무슨 망발이오!"
"한이 죽었는데 꼬리를 말고 도망가려 하는가!"
탄타이와 바인투는 요토의 철군 제안에 미친듯이 열을 냈다.
'빌어먹을.'
다이샨은 입술을 짓씹었다.
'공성을 감행한다면 많은 피를 볼 것이고, 독단적으로 철군한다 해도 정치적으로는 타격을 입겠지.'
그는 홍타이지를 한으로 옹립한 이래 이인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한이 죽었다고 해서 모든 권한을 자신이 가질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이것은 옳냐 그르냐보다는, 다음 한이 선출될 때 그가 어느편에 서느냐에 따라 공격거리가 될 수 있는 문제였다.
'이럴땐 여러 제왕들이 다 같이 모여 철군 여부를 결정할 수 밖에 없겠지만······.'
문제는 두 유력한 후계자인 도르곤과 호오거는 좌군을 이끌고 아직 평안도에 주둔 중. 산재한 조선군을 격파하긴 해야하므로 합류는 언제가 될지 모른다.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한의 원수를 갚겠다는 이자들을 누를 수 있을지 다이샨은 자신이 없었다.
하다못해 남한산성에 들여보낸 잉굴다이가 포를 쏜 자의 목이라도 들고 돌아왔으면 모르겠으나, 잔뜩 기세가 오른 조선놈들은 단칼에 제안을 거절했다.
"제 생각에도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잔뜩 분노한 정황기와 양황기의 구사 어전들과는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이신기오로 도도. 다이샨의 이복동생, 도르곤의 동복동생이자 정백기의 기주였다.
"어째서냐?"
다이샨은 도도가 한의 원수 어쩌구를 언급한다면 속으로 쓰게 웃어줄 요량으로 물었다.
제 어미를 순장시킨 장본인이 바로 홍타이지 아닌가.
그러나 도도의 대답은 의외였다.
"지금 철군한다면 우리는 패배하는 것입니다. 한이 죽고 당초 목표였던 조선의 항복도 받아내지 못했으니 변명할 수도 없지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지금은 물러나지만, 결코 조선군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한이 운없게 포탄에 맞아 죽었으니 군대를 물리고, 새로 한을 뽑은 후 조선놈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기 전에 또다시 쳐들어오면 될 뿐.
"하지만 우리 군영에 있는 몽고군도 그리 생각하겠습니까?"
다이샨은 도도의 말 뜻을 깨달았다.
누르하치 시절부터 끊임없이 귀속해오던 몽고인들로 구성된 몽고팔기와는 달리, 차하르와 할하 등지에서 끌어모은 외번몽고군은 아직까지 청의 일원이라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청군에 합류해 조선 원정에 참여한 몽고군이 무려 1만 2천여 명.
그들이 모두 제 집으로 돌아가 한이 죽었음을, 대청이 조선에 패했음을 알린다면 얼마든지 불온한 싹이 자라날 수 있다.
"공성을 감행해야 합니다. 성을 깨고, 조선왕을 잡아 묵던으로 끌고 가야 합니다. 그게 안되더라도 최소한······ 몽고군의 전력을 깎아놓아야 하지요."
도도의 말은 잔인하지만 합리적이었다.
'외번몽고군을 앞세워 남한산성을 공략하라.'
성을 공략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고, 실패하더라도 한팔이 꺾인 몽골은 반란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이샨은 과연 이게 순수하게 하는 제안인지 의심이 들었다.
'아무리 몽고군을 내세운다 해도 저들의 반발을 사지 않으려면 팔기도 보조를 맞춰야 할 터.'
화력도 빈약한 형편이니 팔기가 최대한 몸을 사린다 해도 얼마나 죽어나갈지 모른다.
'제가 기주로 있는 정백기는 지금 좌군에 속해있으니 상관이 없다 이건가.'
도도는 홍타이지의 명에 따라 쇼토, 니칸 등과 함께 천여 명에 불과한 바야라, 즉 한의 정예 친위병만 이끌고 선봉에 섰다.
정백기는 지금 형인 도르곤의 휘하에 있으니, 지금 공성을 시작한대도 그가 손해볼 일은 없는 것이다.
반면 본군의 주력은 홍타이지의 직속인 정황기, 양황기와 다이샨 자신의 휘하인 정홍기와 양홍기다.
'장차 다음 한을 정할 때를 대비해 이쪽의 전력을 깎아놓기라도 하겠다는 심산은 아니겠지.'
잠시 고민하던 다이샨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를 포함한 대청의 버일러들이 내전 따위가 나도록 놔두진 않을 것이다. 호오거도 도르곤도, 그리고 눈 앞의 도도도 그 사실을 알테니 제 나름대로의 야심이 있더라도 모든 것은 순리대로 돌아가리라.
여덟 버일러가 모여 한을 정하라는 태조의 유훈은 이번에도 지켜질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다이샨은 탁자를 쳤다.
"조선도 우리와 화친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철군하더라도 제놈들이 뒤를 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 차라리 성을 부숨만 못하리라. 요토는 현산으로, 도도와 양구리는 험천으로 이동해 북상하는 조선군을 끊어라! 공성은 본왕이 직접 진행하겠다!"
한편 다이샨이 군령을 내리던 그 시각.
산성에서는 이십여 기의 그림자가 대로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