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거인>
순조롭게 여러 차원이 연결되었을 무렵, 가이아가 나를 불러들였다.
오랜만에 도착한 그녀의 공간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이전, 고작 하얀 풍경만이 존재했던 이곳은 이제 작은 신전의 모습에 주변에는 꽃까지 흐드러지게 핀, 나름 볼만한 공간으로 변모해 있었다.
“…많이 변했군요.”
“이전에는 힘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니 말이다. 휘하 관리자들도 늘어난 마당에 그냥 방치해둘 수만은 없었느니라.”
“훨씬 좋아지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이번에도 도움이 필요한 차원이 있다고 하더구나.”
몇몇 경우만 제외하면 대부분 계시로 알려왔던 일이다. 갑자기 불러들일 이유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이아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특이한 경우라 말이다. …상대가 거인이란다.”
거인이라는 말에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렇다면 피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벌써 저희 차원에 대해 알게 된다면 곤란해질 텐데요?”
우리가 순조롭게, 정확히는 다른 차원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하는 중이기는 하나 아직 멀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 대가로 다른 차원들과 직접 연결되는 위험한 수까지 두었으니까. 알게 된 바로는 다른 대차원은 지구처럼 중심이라고 볼 수 있는 본차원과 휘하의 모든 차원이 연결되는 형태가 아니라고 한다.
대부분은 피라미드 형태로, 맨 위에 본차원이 있고 그 아래 직접 연결된 1차 하위 차원, 1차와 연결된 2차 하위 차원처럼 단계적으로 연결을 하는 편이라고.
본차원과 다른 휘하차원이 직접 연결될 경우 그만큼 위험 요소도 커지고 배신을 당할 가능성마저 있다고 한다. 그게 무척이나 치명적이라고.
‘우리가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지만…….’
이미 충분히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다. 당장 위험한 마당에 먼 미래까지 신경을 쓸 수는 없었다.
“정확히는 거대 차원 중 하나가 거인에게 패배했단다. 지금도 저항 중이기는 하지만 머지않았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에 따라 휘하 차원들에 비상이 걸렸지. 다른 거대 차원에 도움을 요청한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거절을 당했지. 그들 중 일부가 우리 소식을 들은 모양이야.”
“도움을 주실 생각이십니까?”
“본차원 자체가 멸망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1차나 2차라면 위험하겠지만 3차쯤 되면 괜찮다고 생각한단다. 그쯤 되면 우리랑 별로 다를 바가 없더구나.”
3차까지 거인들이 관심을 가지려면 백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그때면 이미 우리들에 대해 거인들이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3차쯤 된다고 해도 일단은 거대 차원 소속이었던 이들이다. 차원의 질은 이제껏 우리와 연결되었던 이들과는 그 수준이 다를 터였다.
“…그게 선택이시라면.”
지금 저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기는 하다. 독이 든 사과나 다를 바가 없기는 하지만, 어차피 우리도 중독된 몸. 게다가 경쟁 차원도 없었다. 다른 거대 차원들도 거인들을 꺼리는 상황이다. 사실상 받아들여 주는 곳은 없을 테고, 어차피 우리와 별다를 바 없다면 우리가 흡수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위험을 조금 감수해야 하기는 하지만, 가이아는 괜찮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거부한다면 가이아라도 다시 생각하겠지만…….
‘모두 사실이라면… 나쁘지는 않겠지.’
애초에 위험을 감수하는 것 말고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대가가 돌아온다. 그게 우리가 선택한 길이다.
“동의해 주어서 고맙구나.”
가이아가 한결 안심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나와 마찰을 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나도 그녀와 마찰할 생각은 없었지만. 우리는 운명 공동체다.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 차원은 하나가 아니란다. 3차 이하라면 대부분 받아들일 생각이다. 문제는 거인들 일부가 그 차원으로 파견되었다는 것이지.”
“…강합니까.”
“충분히 상대할만하단다. 우리를 침략했던 오데르의 세력에 비하면 애송이지. 하지만 얕봐서는 안 된다. 그래도 본차원의 지원을 방해할 목적으로 파견된 이들이고, 3차 하위 차원이라고 해도 거대 차원 소속이었던 이들이란다. 얕봐서 좋을 것은 없지.”
대략 3등위 거인 스물에서 서른 정도 수준의 세력일 것이라고.
“여러 차원이 연결되면서 너희 길드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제법 성장하고 있더구나. 당분간 너의 길드는 저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여 주었으면 한단다.”
소규모 다른 차원과의 연결 또한 멈출 생각은 없다고. 그쪽 일들은 영국이나 중국 같은 타 국가의 거대 길드에게 시키라고 가이아는 말하고 있었다.
“장기간 원정이 되겠군요.”
“고생하게 될 거란다. 쉽지 않은 일이지. 하지만 너 말고는 부탁할 자가 없구나.”
“알겠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니까요. 별수 없죠.”
가족들과 헤어지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내 길드원들과는 함께 가는 만큼 그리 외로운 일정은 아닐 터였다.
그래도 이제는 가족들과 어색한 것도 없었고, 그냥 장기간 출장 정도로 생각하면 될 터였다. 어차피 간혹 다른 차원과 연결이 될 때마다 자리를 비우고는 했었다. 이해할 터다.
‘이해할 수밖에 없기도 하고.’
가이아에게 자세한 정보들을 얻은 뒤, 나는 곧바로 길드원들을 소집했다.
“당연히 따라가야죠.”
“찬성. 저는 좋아요. 형도 가는데, 제가 빠질 수는 없죠.”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오빠가 가면 당연히 가야지.”
내 직속 파티원이었던 이들은 전원 참석에 동의했다.
“길드원들에게도 소식을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길드에는 제가 협조 요청을 해 놓겠습니다.”
“길드원들에게는 내가 말할 게.”
“대부분이 참가하지 않겠어?”
나연의 말에 사샤가 묻는다.
“같이 갈걸? 형이 가니까. 그러고 보니, 형. 톰 형도 우리랑 같이 가요?”
“아니. 그는 우리 길드 소속이 아니니까.”
내 말에 하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섭섭해하겠네.”
제법 친하게 지낸 만큼 정이 조금 쌓인 모양이었다.
“저도 그럼 당분간 저를 대신해 종교를 관리할 사람을 정해야겠네요. 으음… 그러고보니 차산미 씨가 최근에…….”
“저도 가족들에게 이야기해놓겠습니다. 신후 님. 언제까지 모이면 됩니까?”
“시간은 좀 있습니다. 일주일 안에만 끝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곧이어 일행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나는 곧바로 가디언의 이름으로 각국에 현 상황을 알리고 우리 길드 전체가 당분간 타 차원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앞으로 연결될 차원은 다른 거대길드들이 나눠서 처리할 것이며, 대표로는 엘리자베스를 임명해 두었다.
내 결정에 중국이나 일본, 독일과 프랑스처럼 만만치 않은 세력을 지닌 이들이 반발했지만,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모든 세력 중 우리 다음가는 곳은 영국인 것이 사실이었고, 그나마 중국과 일본이 그 뒤를 바짝 뒤쫓는 정도였다.
욕심을 내는 이유는 단순했다. 먼저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 차원과 먼저 안면을 틀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차원이라도 타 차원과의 교역은 언제나 이익이 되는 편이다. 당연히 다른 국가들이 욕심을 낼 만했다.
덕분에 가디언의 일을 떠맡게 된 엘리자베스가 바빠질 터였지만, 그녀는 오히려 내게 감사를 표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 최대한 노력에 부응하겠어요.”
“정 말을 안 들으면 제 권위를 이용해도 됩니다. 나중을 생각하면 저들도 어쩔 수는 없겠죠.”
그렇다고 남용하면 대가는 본인이 치러야 할 터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엘리자베스는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사용하도록 하겠어요.”
톰 뮐러는 나와 함께하기를 요청했지만, 나는 내 길드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고, 하유진의 말대로 그는 섭섭해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가 없으면 바이에른 길드의 힘이 많이 떨어지는 만큼 독일 정보는 내 결정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어차피 내가 직접 파견된 곳에서 톰 뮐러가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힘들다. 차라리 내가 없는 동안 나타날 소규모 차원을 노리는 모양이었다.
나연을 통해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길드원들은 대부분이 참석에 동의했다. 상대가 거인이라고 기죽지 않는다.
내가 장기간 자리를 비운다는 말에 늘 그렇듯 가족들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배웅해 주었다.
“…이번 일은 오래 걸린다는 것을 보니 더 위험한가 보구나.”
아버지의 말에 딱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몸조심하거라.”
“조심하겠습니다.”
“굶거나 아프지 말고, 다치지도 말고. 무사히 돌아오렴.”
가족들이 내 힘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없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자신 있다는 듯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네. 걱정 마세요.”
가족들의 배웅 속에 나는 곧바로 약속 장소로 향했고, 대기 중인 길드원들을 볼 수 있었다.
곧바로 타 차원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고, 우리는 곧바로 새로운 차원, 카스시나 차원으로 돌입했다.
* * *
카스시나 차원의 관리자 혼다크는 우리를 보기 무섭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왔군… 정말로…….”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초조한 얼굴에 한 줄기 희망이 깃들었다.
“수준도 정말 높군. 믿을 수 없을 정도야. 이 정도면 보듀가 님 이상의 힘인데…….”
“당신이 카스시나 차원의 관리자입니까.”
내 말에 잠시 표정을 가다듬은 혼다크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가이아 님의 계약자, 유신후 님입니까.”
“맞습니다.”
“이야기는 들으셨으리라고 믿습니다. 저희 차원은… 센터빌에서 지구로 갈아타기를 원합니다.”
정확히는 우리의 보호를 받고 싶다는 뜻이었다.
센터빌은 아직 버티고는 있지만 사실상 패색이 짙다고 들었다.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인들이 차원을 어지럽히고 있다 들었습니다.”
“예. 20개체의 3등위 전사 거인들이 파티누스 차원으로 향하는 길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아, 파티누스는 2차 하위 차원의 이름입니다. 그쪽을 통해서 1차 하위차원을 지나 본차원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용케 여기까지 내려왔군요.”
“센터빌이 수세에 몰리며 하위 차원들의 좌표 대부분이 거인들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일단 별동대처럼 일부만 무작위로 왔을 뿐이라고. 아마 실질적인 침략은 본차원을 완전히 점령한 이후 하위 차원을 차례로 공격해 올 터였다.
“본래 세력만 멀쩡했어도 20개체 정도의 거인은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만… 대부분 본차원으로 지원을 가는 바람에…….”
그들은 전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위쪽은 저희를 도와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저희는 사실상 버려진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배를 갈아탈 결심을 했다고.
“알겠습니다. 일단 저들은 저희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카스시나 차원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혼다크. 그는 곧 허리를 펴며 말했다.
“유신후 님을 비롯해 여러분의 존재는 곧 계시를 통해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극진히 대접하고 지원에 소홀함이 없도록 명확히 말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3차 차원과의 연결은… 어차피 본차원이 그 모양이니 아마 어렵지 않게 끊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외 다른 차원들은 이쪽 차원을 통해 이동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휘하로 받아들인 곳은 이곳 한 곳만이 아니다.
“맞습니다. 그쪽 차원의 좌표는 제가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적극적인 모습에 그는 한결 안도한 모습이었다.
“그럼 곧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할 생각이라.”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계시를 내리더니 곧바로 우리를 지상으로 보내주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