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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314화 (314/317)

314화

‘전조를 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건가?’

틈이 작은 만큼 그쪽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건 나서윤을 너무 얕보는 생각이었다. 확실히 처음 기술을 보았을 때야 당황했겠지만, 그뿐이다. 나타날 위치를 예측해 마법 트랩을 깐 것만 봐도 벌써 감을 잡아가고 있던 것일 터다. 동시에 호신강기를 사용하기 무섭게 주변의 지배력을 높인 것은 무신의 위치를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한 준비였을 터였다.

그 결과가 저거다.

대 격노는 무신의 호신강기를 완전히 파괴하며 치명상을 입혀버렸고, 단번에 궁지에 몰려버린 무신은 후퇴할 생각을 품은 듯했다.

그에게 남은 기회라고는 아마 공간 계통 기술을 이용해 활로를 여는 것 정도일 텐데, 그게 쉬울 리가 없었다.

공간 계통 기술들을 이용해 나서윤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또한 알고 있을 거다. 느껴지는 기운이나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으로 보아 나서윤의 수준이라면 충분히 전조를 읽고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같이 죽자고 마구잡이로 공격할 수도 없었다. 나연이 구경만 할 리가 없기도 했고, 성공률도 낮았다. 그딴 짓을 했다가는 도망도 칠 수 없을 터다.

‘오만했네.’

나서윤의 기운을 느끼기 무섭게 도망치지 않은 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물론 바로 도망친다고 해도 늦기는 했겠지만. 내게 감지당한 이상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빠르게 주변을 훑는다. 여기서 자신을 도와줄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의 세력원들은 하나같이 수준 이하였으니까. 역으로 막을 능력이 있는 존재는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나연과 사샤를 스쳐 지나간다.

주변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는 것이 둘이다. 그게 가능하게 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능력은 필수였다. 능력이 부족하면 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그러나 둘은 무척이나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사실상 승패가 결정 난 상황이었으니까.

무신이 칼을 뽑아들었는지 아예 주변을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같이 죽자는 행동은 아니었다. 도주로를 확보할 목적인 듯했다.

‘오랜만이군.’

공간 계통 공격은 마력을 무척이나 잡아먹고, 사용할 수준이 된다면 방어는 몰라도 회피는 가능해 어지간해서는 사용하지 않는 기술이다. 거인들이야 그 덩치처럼 마력이 남아돌고 그에 관련된 연구가 잘 되었는지 제법 잘 사용하는 편이었지만, 저 무신이라는 자는 아닌 듯했다.

세밀한 기술은 만들었지만, 그게 끝인 모양이다. 구현되는 것도 가장 단순한 뒤틀기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 규모가 대단치도 않았다.

숙련도가 부족한 모양이었다. 괜히 가이아가 나 혼자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설마 나서윤이 이길 줄은…….’

해볼만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수월하게 이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긴장을 풀었고, 동시에 무신이 정한 퇴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서윤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면 중간에 끼어들 생각이었지만, 기우였다. 나서윤은 무난하게 상대를 제압해 나가고 있었다.

뒤틀린 공간을 피해낸 나서윤은 자신이 장악한 공간을 십분 활용해 무신의 마력을 끝없이 낭비하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강기의 형태를 무너뜨려 예측이 어려운 공격과 자잘한 마법의 난사로 무신의 도주를 완전히 막아내고 있었다.

침략자, 무신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고 얼굴에 초조한 감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무신의 행동이 느려지자 곧바로 나서윤 또한 공간을 뒤틀어버린다.

“…제기랄!”

무신과 같은 기본적인 활용이지만 상황이 달랐다. 무신은 가까스로 공격을 회피해냈고, 이어진 나서윤의 마법 공격에 그대로 복부가 관통당했다.

“응?”

사샤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과 동시에 무신이 마력을 폭발시키며 한순간 모습을 감춘다. 피해를 감수하고 도주를 선택한 것.

그러나 도망칠 장소는 뻔했다. 나서윤이 차근차근 그를 궁지로 몰았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서윤은 한정된 경로를 노리는 듯하더니 곧바로 발걸음을 멈췄다.

“비켜라!”

하필이면 내가 차단한 경로로 무신이 달려들고 있었다.

나를 향해 휘두르는 검격. 어지간한 이라면 통할지 모르나 나에게는 아니었다.

후웅.

나에게 날아드는 검격을 가볍게 쳐내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구멍 난 배를 발로 차 버렸다.

“커헉!”

설마 이렇게 간단히 반격당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는지 무신의 동공이 커진다.

뒤늦게 내가 보통 놈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눈에 절망이 깃들었다.

“고마워 오빠.”

나서윤이 감사를 표하며 다시금 무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주변이 조용해진다. 절대적인 무력을 보여 왔을 무신이 나서윤에게 철저하게 당하는 모습에 간간이 이어지던 주변의 전투가 완전히 멈춰버렸다. 무신의 추종자들이 넋을 잃고 상황을 바라보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게 어떻게 된… 분명 이만한 강자는 없었을 텐데!”

무신의 절망 어린 외침이 주변을 울린다.

“어째서! 나는, 나는 신이 될 몸이었는데……!”

그의 외침은 나서윤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나서윤은 그가 힘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을 풀지 않았다.

“제길… 제기랄…….”

천천히 무신이 무너져간다. 그럴수록 주변의 피해는 미미해져갔고, 덕분에 사샤와 나연 또한 그런 무신의 최후를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무신이 죽었음을 확인한 나서윤의 표정이 밝아진다.

“많이 성장했네.”

내 칭찬에 나서윤의 표정이 한층 더 진해졌다.

“응. 아직 지구 쪽 일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니까. 계속 노력해야지. 좋은 경험할 기회를 줘서 고마워, 오빠.”

나서윤은 특이한 기술 말고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는 상대였다고 말했다.

“동급의 상대와는 싸워본 경험이 적은 것 같았어.”

“…우리 경험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거 아닐까?”

“그건 그렇지?”

나연의 말에 사샤가 동의한다. 나 또한 같은 의견이었다.

“…이게 도대체…….”

아히드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십니까? 당신들 같은 존재가 이제껏 이름조차 알리지 않았다니… 신이 될 몸은 또 뭐고…….”

그의 말에 슬슬 여행이 끝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디클로디히의 차원 관리자의 존재를 설명하고, 무신의 정체와 그가 우리에게 의뢰한 내용까지 천천히 설명한다.

내가 아히드와 대화하는 사이 지원군의 총책임자와 기사들 또한 근접해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내 정체를 듣고는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니까… 당신이 신의 대리자… 라는 겁니까? 그것도 다른 차원의?”

“뭐 대충 그렇다고 보면 됩니다. 이쪽 차원의 신과 저희 차원의 신이 거래했고, 거래의 대가로 제가 이쪽 차원을 돕게 된 거죠.”

이들이 당장은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런 이들이 모여야 지구가 살아남을 수 있다. 가이아가 선택했고, 나는 도울 뿐이다. 지구와 연결된 이상 여러 차원과 연결이 될 테고, 그에 따라 빠르게 발전할 터. 나중에는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내 설명을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우리가 이만한 힘을 갖고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신이 실존하고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보냈다는 말에 다들 묘한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하브반드 왕국의 국왕과의 만남이 주선되었고, 지구로 향하는 통로 위치를 공개했으며, 가이아에게 의뢰를 완전히 완수했음을 알렸다.

가이아는 곧바로 디클로디히 차원의 관리자가 자신의 차원에 강림할 수 있도록 도왔고, 덕분에 그쪽 차원의 일은 빠르게 정리될 수 있었다.

일이 마무리 되는 단계에 이르자 더는 거기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우리는 곧바로 지구로 돌아왔다.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

디클로디히 차원에서 아히드를 가르친 것이 왜곡되어 내가 타 차원의 인물을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지구에도 알려진 것.

내 위치가 위치인 만큼 그 행적은 낱낱이 조사되어 언론에 보도되었고, 길을 잃어 헤매던 아히드가 내 조언을 바탕으로 얼마나 성장했는지까지 꾸준히 지구에 보고되고 있었다.

심지어 지구 쪽 상황을 알게 된 아히드는 소문을 부정하기는커녕 영광이라고 지껄이는 바람에 더더욱 곤란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수많은 수련자들이 내게 직접 찾아와 적극적으로 가르침을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탑의 교관으로 와서 정식으로 가르쳐보는 게 어떠냐는 요청까지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심지어는 국가에서 청탁이 오기도 했다.

애초에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이들은 많았다. 내 위치로 보나, 무력으로 보나 나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니까.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이없기는 했으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사실이었다.

하지만 탑이 있는데 굳이 내가 저들을 직접 가르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거절하기 무섭게 왜 다른 차원을 우대하느냐는 말부터 내가 디클로디히 차원으로 이주하려고 한다는 소식까지 퍼지고 있었다. 다행히 빠르게 부정해서 일단은 잠재우기는 했지만, 의혹의 눈초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푸하핫. 인기 많네 리더 님아. 그놈 가르친 게 이렇게 돌아오네!”

내 중얼거림에 사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일행들 또한 묘하게 웃음을 참는 것이, 별거 아닌 헤프닝으로 취급하는 듯했다. 내가 떠날 리가 없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이었으며, 지금 내가 누구를 가르칠 생각 따위는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

“조언 몇 마디로 바른길로 가게 하시다니… 신후 님이 너무 크게 일을 벌이셨습니다. 저만 해도 지금 임시라도 좋으니 신후 님께서 쉬시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강사로 초청하면 안 되느냐는 청탁이 계속 들어올 정도입니다.”

일단은 책임자인 만큼 이야기가 많이 들어온다는 한바다의 말에 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럼 걔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지금도 매일 연락 오던데.”

나연의 말에 남은주가 반응한다.

“그 독일의 톰 뮐러인가 하는 사람 말하는 거죠?”

“응. 그 사람이 진짜 심각할 정도로 적극적이던데…….”

나연이 살짝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에 네가 중층에서 무력을 보여줬을 때부터 눈빛이 이상하기는 했었는데…….”

“그가 가장 간절하기는 하지만, 저희와 중층에서 같이 활동했던 이들은 전부 한 번씩은 찔러보고 있어요. 최근에는 교단 쪽으로도 연락이 와서…….”

“…귀찮으시겠군요.”

“그래도 나름 선은 지키고 있어요. 저들이 아쉬운 입장이니까요. 그리고…….”

“또 있습니까?”

“…저희 길드원들도 넌지시 물어보던걸요?”

“…….”

길드원들까지 물어본다는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최근 길드원들에게 가르침을 베푼 적이 없었다. 4차 전직 이후에는 내가 알려줄 것이 없었으니까.

“거기서부터는 제 조언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알아서 하라고 하세요.”

이전처럼 내 감각이라도 전달할 방법이 있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내 조언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터다. 내 길드원들은 대부분 그랜드 마스터의 벽 앞에 멈춰 있는 것이었으니까. 가이아라면 어떻게 해 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물어는 봐야겠군.’

혹시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톰 뮐러에게도 지금 당장 조언해 줄 것은 없었다.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그러나 톰 뮐러는 끝까지 막무가내였다.

“대련만이라도 좋습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받아만 주십시오.”

“뭐 이딴…….”

아히드에게 조언을 해 준 것은 어디까지나 수준이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힘들게 마스터가 되었고, 알려줄 이가 없어 길을 잃은 상태였기에 유효한 것이었다. 게다가 자매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었기에 그 대가로 선심을 조금 쓴 것에 불과했다.

나는 오랜 고민 끝에 결국 톰 뮐러의 애원에 가까운 부탁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래도 나름 중층에서의 연도 있는데, 이렇게 불쌍할 정도로 적극적이면 대련 몇 번 못 해줄 것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대련뿐입니다. 얻어가는 것은 알아서 하세요.”

보이는 것이라면 조금 지적해줄 수 있겠지만, 그게 끝이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세요. 기분 나쁘니까.”

그놈의 말 몇 마디 때문에 귀찮은 일을 떠맡았다.

톰 뮐러는 대답 대신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우리 길드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찾아오면 가끔 대련해주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좋아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톰 뮐러를 하유진이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해는 가지만…….”

“…이해가 간다고?”

하유진은 톰 뮐러가 나를 동경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저도 조금… 그런 게 있거든요. 형이 엄청 대단한 것은 사실이고, 이뤄 놓은 것을 보면 그런 감정이 들 수밖에 없을걸요?”

하유진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면전에서 직접 들으니 상당히 낯부끄러운 말이었다.

‘…정식 제자 따위는 안 받는다.’

나는 굳게 다짐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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