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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312화 (312/317)

312화

새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고개를 돌리자 옆자리에 아직 잠든 상태인 나연의 모습이 보였다.

나서윤과 사샤는 다른 방에서 쉬고 있었다.

나연을 위해 나서윤이 배려를 해준 것.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연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먼저 나가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사이 평소처럼 일찍 일어난 나서윤이 나를 발견하고는 인사를 해왔다.

“오빠, 잘 잤어?”

“그래.”

“언니는?”

“아직 자. 사샤는 어딨어?”

“놀러 나갔어. 오빠 대련 전에는 돌아온대.”

대련.

여행지에 온 기분을 제대로 내게 해 준 아히드. 그의 부탁으로 오늘은 대련을 할 예정이었다.

가볍게 몸을 풀고 샤워를 한 뒤 방에 돌아가자,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나연이 깨어났다.

그녀는 나를 보고는 조금 얼굴을 붉히더니 곧 고개를 저어 정신을 차린다.

“일어났어?”

“…응.”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인 그녀지만, 오늘은 조금 피곤한 듯했다.

“피곤하면 더 자도 돼.”

내 말에 나연이 고개를 젓는다.

“너 대련 있잖아. 그거 봐야지.”

“뭐 대단한 거라고.”

나연이 나서도 순식간에 해결된다. 고작 아히드 수준으로는 내 길드의 길드원 하나도 못 이긴다.

냉정하지만 사실이었다. 어디까지나 대련을 허락한 것도 어제의 보답에 불과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으니까.”

“…그래? 그럼 천천히 준비해. 아직 시간 남았어.”

나연이 늦잠을 자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조금 늦은 아침 정도였으며 약속 시각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점심 무렵에 대련을 하기로 했으니까.

가볍게 씻은 나연과 함께 1층으로 향하자 나서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 늦었네. 많이 피곤했나 봐?”

“그만. 그런 말 하지 마.”

나서윤의 짓궂은 말에 나연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보여주지 않는, 나와 가까운 일행들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사이 1층에 있던 다른 용병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된다.

“저 사람이야? 그 아히드랑 대련한다는…….”

“맞네. 아히드가 먼저 신청했다고 하더라.”

“흠… 그 아히드가? 실력자인가?”

“그렇겠지. 일단 여기 있다는 것부터가 최소 A급…….”

“에이. 편했는데, 또 시선 받네.”

“슬슬 일할 때니 그렇지. 이제껏 편히 쉬었잖아?”

“난 아직 부족해. 더 오래 놀고 싶은걸? 가능하면 평생.”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기보다는 지구가 더 좋아.”

“나는 언니들이랑 오빠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는데. 아. 유진이도.”

나연의 말에 나서윤이 웃으며 대꾸한다.

그런 나서윤에게 나연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가벼운 아침을 먹었고, 가벼운 휴식을 취한 뒤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아히드는 평온하지만, 어딘가 긴장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여. 몸 상태는 괜찮나? 어제 제법 마셨잖아.”

“문제없어.”

“그거 다행이군. 나도 최상의 상태라 이 말이야.”

주변을 둘러보자 제법 많은 구경꾼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기사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는데, 무척이나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쟤는 언제 또…….’

그 구경꾼 사이에서 사샤가 우리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빨리 시작하지.”

내 말에 아히드가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살인은 금지. 무기를 잃거나 한쪽이 항복하면 멈추는 거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도 마찬가지고. 심판은… 이 분께서 해주실 거야.”

“반갑군. 왕실 기사단 소속 케세인이다.”

나름 마스터에 속하는 기사로, 대련을 위해 특별히 부탁했다고 한다.

실력은 아히드와 비슷해 보였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탐욕은 아니다. 너무 과하다. 평범한 철검이었다.

그래도 질이 떨어지는 무기는 아니다 보니 별다른 말은 없었다. 아히드의 무기는 대검. 제법 커다란 크기로 특출나게 덩치가 크지 않은 아히드가 들기에는 과한 느낌이었다.

“붉은 대검… 아히드가 진심인가 본데?”

“위험하군.”

주변 용병과 기사들의 수군거림에 나연 자매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다.

아히드가 무기를 들어 올린다. 강한 마력을 내뿜으며 강기를 생성한 아히드가 커다란 기합을 외치며 내게 달려들었다.

“흐랴아아아앗!”

나 또한 날아오는 대검에 맞춰 검을 들어 올린다.

“저런!”

누군가의 외침.

콰아앙!

한순간에 내 검에서 강기가 뿜어져 나왔고, 아히드의 일격을 그대로 막아내었다.

설마 한손으로, 그것도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막을 줄은 몰랐는지 아히드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그극.

두 개의 강기가 서로 마찰하며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동시에 아히드의 강기가 조금씩 바스러지고 있었다.

“무슨……!”

그에 반해 내 강기는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히드가 어떻게든 나를 찍어 누르기 위해 힘을 주고 있었지만, 전신을 부들부들 떨어대는 아히드와 달리 나는 너무나도 평온한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어느 쪽이 우위인지는 단숨에 알 수 있을 정도.

아히드는 이대로는 방법이 없다 여겼는지 발로 내 몸을 차더니 곧바로 뒤로 물러났다.

날아오는 발길질을 한손으로 적당히 흘려버리고 아히드를 바라본다.

“역시, 내 감이 잘못되지 않았군.”

아히드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내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 흡족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 여유는 그리 마음에 안 드는군. 진심으로 싸우게 해 주지!”

그리고는 재차 자세를 잡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달려든다고 해서 내가 온 힘을 다하게 할 수는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나는 그의 연속 공격을 적당히 흘리고 받아치며 여유롭게 상대해 주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히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내가 한 발자국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

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흥분했는지 고함을 지르며 강하게 내 몸을 내리친다. 평소보다 강기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훙.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 농락할 생각은 없었다. 솔직히 농락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농락으로 느낄지 모르나, 나는 그의 실력을 직접 보기 위해 방어만 한 것이었으니까.

‘이거면 충분해.’

나는 크게 드러난 빈틈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고, 기겁한 아히드가 크게 몸을 틀며 빠르게 뒤로 빠져나갔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강기를 쭉 늘이며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아히드가 빠르게 좌우로 회피하고, 나는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아히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모든 공격을 어떻게든 회피하고 있었다.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이다. 그로서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잘 피하는데…….’

용병인 것치고는 제법 배운 모양이었다. 그러니 S급인 것이겠지만.

하지만 그것도 내가 조금 속도를 올리자 이내 발이 꼬이기 시작했고, 나는 횡 베기에 이어 그대로 강기의 크기를 어마어마하게 키운 뒤 상대를 향해 내리찍었다.

“으헉!”

대게 거인을 상대할 때 뽑았던 평균적인 강기의 크기다. 그것만 해도 수m 이상의 크기였고, 무형 강기도 아니라 그 모습이 그대로 보이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기겁을 해버렸다.

“하, 항복!”

나는 내리치던 검을 그대로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자신의 머리 조금 위에 있는 검을 아히드가 멍하니 바라본다.

“음, 고생했다.”

“하… 하하… 그대 정말 강하…….”

“무신!”

챙챙.

주변의 사람들이 빠르게 무기를 뽑아든다. 심판 역을 맡았던 케세인조차 무기를 뽑아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묘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게 뭔 바보 같은…….”

“그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은 무신뿐이다! 그 실력으로 고작 A급 용병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언제 잠입을……!”

주변이 두려운 눈으로 나를 경계했고, 무력이 부족한 이들은 그대로 도망쳤으며, 한 병사는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함인지 빠르게 뒤로 빠져나갔다.

나는 아히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 놈들은 상대할 적의 얼굴도 모르는 건가?”

“…정말 무신이 아닌가? 아까의 그 강기는…….”

어이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나연과 나서윤 주변 사람들이 그녀들을 향해 무기를 들이댄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어느새 사샤는 나연을 호위하고 있었고, 나서윤은 무기에 손을 올린 채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로 긴장한 기색은 아니다. 다만 즐거운 분위기가 망가진 것이 무척이나 거슬리는 듯했다.

“일단 나는 무신이 아니다. 그놈이랑 싸우기 위해 지원한 거니까. 이미 말했을 텐데?”

“…그래. 그리 말했었지.”

내 말에 아히드가 고개를 끄덕인다.

주변이 조금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무신은 오만하다고 하던데…….”

“저건 연기잖아. 멍청한 놈아. 속지 마!”

“근데 저 실력으로 연기할 필요가 있어? 아까 그 힘이면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 같은데.”

“그건…….”

잠시간의 대치. 누군가가 내게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는 개소리를 지껄였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사이 나서윤과 나연이 내게로 합류했고, 우리는 포위된 채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그냥 빠져나갈까? 무신 죽이고 이쪽 차원을 대표할 국가는 다른 곳으로 정하면 되는 거 아냐? 게다가 어차피 이번 차원은 실력도 별로잖아.”

어차피 지구와 제대로 교류를 시작하면 우리에게 저항조차 하지 못한다. 그 말을 돌려서 하는 모양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대로 기다리는 것도 솔직히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으니 이러고 있는 것이고.

아히드는 어느 정도 진정한 기색이었지만 이 상황에 나설 수는 없는 듯했다.

그때, 마침내 지원군들이 도착했다.

급하게 달려온 한 병사가 내 얼굴을 보더니 대뜸 외쳤다.

“저분은 무신이 아닙니다!”

“…뭐?”

“무신은 지금, 국경에 있습니다! 무신이, 무신이 기습해 왔습니다!”

병사의 외침에, 주변이 빠르게 얼어붙었다.

* * *

“…미안하네. 그때는 나도 혼란스러워서…….”

“됐다. 신경 안 써.”

병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비된 군대가 빠르게 국경을 향해 출발했다. 소집된 용병들과 별동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렇게 빨리 기습을 해 올 줄은 모른 듯했다.

“이미 최전선이 무너졌다고 하는군. 나름 대비를 하기는 했지만… 무신과 그 제자들의 힘이 너무 강하다고 하네.”

약한 자들은 살 가치가 없다며 대부분의 사람들을 죽여버리는 무신의 처사에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고.

‘그런 식으로 멸망시킬 셈인가?’

속셈이 뻔히 보였다.

현재 무신 쪽 세력의 진격하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라고 한다. 그 때문에 우리가 가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급하게 빠져나온 수많은 피난민의 행렬이 이어졌다.

“…여전하네.”

나연이 안타까운 얼굴로 그런 이들을 바라보았다. 탑에서도 큰 전투가 일어나면 저렇게 피해를 보는 것은 언제나 저런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피난민들을 바라보던 아히드가 갑자기 나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자네, 정말 강하더군.”

“…여러 일을 겪었으니까.”

“이런 말을 하기 조금 그렇네만… 사실 내가 이번 의뢰를 받아들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더 강해지기 위해서였네.”

나는 대충 아히드가 내게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최근 벽에 막혀 있다네. 하나의 벽을 넘어 S급 용병이 되었지만 지금 나는 길을 잃었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염치없는 짓인 것은 알지만… 나에게 가르침을 좀 줄 수 없겠는가?”

아히드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곁에 있던 첼레드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런 아히드를 바라보았다. 동료가 저런 부탁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실 우리에게 친근하게 굴며 나름 즐거운 기분을 느끼게 해 준 녀석에게 처음부터 조언 정도는 해 줄 생각이었다. 작은 보답이라고나 할까. 괜히 대련에서 방어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분위기를 무신이니 뭐니 하면서 다른 놈들이 망쳐버렸고, 덕분에 해 줄 마음이 사라졌었다.

하지만 딱히 아히드 본인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내게 큰 실수를 한 것도 없었다. 짧은 고민을 마치고 나는 아히드를 향해 말했다.

“말 몇 마디 정도라면.”

내 대답에 아히드의 표정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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