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크게 대단한 것은 없네.”
“…여긴 지구보다 더한데? 어째 수준이 이러냐?”
나연과 사샤의 말에 나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대단한 기운은 안 느껴져. 제소시아 차원보다도 덜 발전한 것 같은데…….”
문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느껴지는 강자의 기운. 그것이 전혀 없다시피 했다.
연결된 문을 통해 디클로디히 차원에 진입하기 무섭게 차원의 관리자를 만나 볼 수는 있었지만, 그리 대단한 이는 아니었다. 상당히 저자세인 면이 있었는데, 그만큼 상황이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이만한 수준이면 진짜 위험하기는 했겠다.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신후는 고사하고 서윤이 정도만 있어도 그냥 재앙일 것 같은데?”
나연이 조심스럽게 말했고, 나 또한 그 말에 동의했다.
“…나름 강국이라는 곳의 수도가 이 꼴인데, 다른 곳은 뭐…….”
수도로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며 주변을 훑어본 결과 마스터에 달한 이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수도 내부에서는 제법 느껴지기는 하나, 그랜드 마스터의 벽을 넘은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여기까지 오며 본 문명 수준 또한 딱 지구의 중세시대 느낌에 불과했다. 과학이 지구처럼 발전한 것도 아닌, 정말 볼 것 없는 약소한 차원이랄까.
“나는 좋지만. 덕분에 조용히 왔으니까. 솔직히 너무 찬양받는 것도 이제는 질리고.”
나연의 말에 나서윤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습게도 이번 차원의 침략자는 개인이기 때문인지 비교적 그 위험성이 아직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강자가 나타났다 정도가 현재 분위기였고, 심지어는 위대한 무인이 나타났다며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접근하는 이들마저 있을 지경이었다. 어디까지나 차원 내에서 새로운 권력 구도가 태어나는 정도로 보고 있다고나 할까.
덕분에 어처구니없게도 침략자가 현지에서 제 세력을 만드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나름 정예라고.
그가 정말 위험인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차원의 관리자뿐인데, 문제는 그가 이 사실을 알릴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오기 전의 가이아마냥 디클로디히 차원의 관리자는 제대로 된 종교가 없었고, 사제가 없다 보니 계시조차 내릴 수가 없었다.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에 침략을 당해버리니 손쓸 방법이 없었던 것.
‘알릴 수 있다고 해도 이 수준이면 방법 없었겠지만.’
자체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니 가이아를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 것일 터다. 그래 봐야 질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내 수준이 더 떨어졌다면 애초에 소수도 괜찮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언니 말대로 조용하니 좋다……. 불편한 시선도 없고.”
나서윤의 말에 일행이 동의한다.
시선을 아예 안 끄는 것은 아니다. 외모가 외모인 만큼 시선이 끌리기는 했다. 그러나 잠시의 흥미일 뿐, 지구나 제소시아에서 받는 시선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관리자에 의해 정식으로 디클로디히 차원에 진입한 이후, 그나마 강국이라는 하브반드 왕국의 수도까지 오는 동안 만난 적이라고는 몬스터 조금과 도적 떼 정도였다.
개중에 마력을 가진 놈이 있기는 했지만 정말 수준 이하였다.
사샤의 손짓 한 번에 모조리 쓸려나가는 수준. 덕분에 천천히 이동하며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나서윤은 남의 시선 없이, 이전의 기분을 느끼며 돌아다니는 지금 상황을 너무나도 즐거워했고, 나연 또한 그런 나서윤을 보며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직속 파티원 전원과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나연 자매와 함께 이동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간 지구에서의 일상이 행복하기는 했지만, 나 또한 조금은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던 듯했다.
오가며 얻은 정보로는 그 침략자 또한 하브반드 왕국으로 향하는 중이었고, 다행히도 이 왕국은 나름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현재 사람을 모으는 덕분에 우리 또한 어렵지 않게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의 차례가 되기 무섭게 문지기가 입을 열었다.
“신분증.”
나는 피곤해 보이는 문지기에게 디클로디히 차원의 관리자로부터 받은 용병패를 제시했다.
이게 가장 편할 거라고 하던데,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이제껏 이 용병패로 지나지 못한 성과 마을은 없었다. 하드반드 왕국의 수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A급? 무신놈 때문에 오신 겁니까?”
내가 A급 용병패를 제시하기 무섭게 상대의 태도가 달라진다.
“그렇다. 좋은 의뢰가 있다고 들었거든. 참고로 뒤의 두 명도 A급이다. 저건 정령이고.”
“리더 님아, 저게 뭐야? 저게.”
정령이라는 말에 문지기의 표정이 더더욱 굳어진다. 그러나 절차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긴장된 기색으로 패를 확인했고, 내 말이 사실로 확인되기 무섭게 문지기는 한층 더 조심스럽게 말했다.
“…환영합니다. 접수는 용병 길드를 통해 하고 있습니다. 들어가셔서 왼쪽으로 쭉 가시면 바로 보이실 겁니다.”
“고맙군. 수고해라.”
왕국에서 내려온 지령이 있었던 듯했다.
“그래도 저항은 하네.”
“이미 회유해보지 않았을까?”
“그건 그렇겠지?”
침략자인 것을 모른다면 당연히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해 봤을 터다. 다만 그게 잘되지 않았고, 마찰이 생기는 바람에 서로 대립하는 듯했다.
하기야 이유가 뭐였든 간에 언젠가는 결국 침략자 쪽에서 마각을 드러냈겠지만.
이미 한 개의 공국이 멸망했다고 듣기는 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정예인 세력도 만들어졌고. 그렇기에 이렇게 용병도 모집하고 전시 체제로 돌입한 것이리라.
그래도 상대가 침략자임을 모르는 만큼, 지금 하는 대비도 상당히 허술해 보였다.
‘신흥 강자인가…….’
나름 강국인 하브반드 왕국이 공격을 당할 예정임에도 타국은 그저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몇몇 동맹국만이 약간의 도움을 주었을 뿐이라고 한다.
문지기가 말한 방향으로 이동하자 금세 용병 길드를 찾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패를 제시하자 접수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A급 용병 세 분이시군요.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A급 용병 셋.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은근히 이쪽을 쳐다보던 이들이 시선이 돌아간다.
“A급이시면 일반적인 지원 외에 별동대에도 지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어느 쪽에 지원하시겠습니까?”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문지기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예를 갖췄기 때문에 나 또한 적당히 말을 높여주었다.
“간단합니다. 일반 의뢰는 군과 함께 움직이지만, 별동대는 기사들과 함께 움직일 예정입니다.”
그 휘하의 정예 세력을 막는 것은 군대이나 별동대는 직접 무신을 막을 예정이라고.
당연하게도 내 선택은 별동대였고, 접수원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하브반드 왕국의 국민으로서 귀하의 선택에 감사드립니다.”
나름 애국심이 강한 사람인 모양이다. 별동대에게는 때로 숙소가 제공되었고, 거기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A급 이상의 용병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스터?’
“처음 보는 얼굴이군. 신입인가? 반갑다.”
우리를 보기 무섭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남자. 이쪽 차원에서 본 최초의 마스터였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아히드. 며칠 먼저 들어왔다고 신입은 무슨, 저들도 최소 A급 용병이야.”
한 남자의 인사에 다른 여성이 그를 막으며 말한다.
“일행이 실례했습니다. A급 용병인 첼레드입니다.”
“S급 아히드다. 그쪽은?”
“A급 용병, 유신후다.”
“A급? 흠…….”
아히드가 이상하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본다.
“뒤의 둘도 A급인가?”
마스터인 만큼 사샤가 정령인 것은 단번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렇다.”
내 말에 아히드의 표정이 더더욱 이상하게 변한다.
“그 실력으로?”
“아히드!”
첼레드라는 용병이 급하게 외친다. 우리를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히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시하는 게 아냐. 최소 S급으로 느껴지는 이들이 A급이라고 하니 이상해서 그러는 거지. 난 당연히 S급이라고 생각했다고. 아무것도 못 느끼겠거든.”
“…네가?”
첼레드의 표정에 놀람이 깃든다.
‘눈이 없지는 않네.’
“용병이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 승급하기도 귀찮기는 했고.”
“으하하하. 하긴. S급 용병이 귀찮기는 하지. 꼬박꼬박 의뢰도 해 줘야 하고, 귀족들도 귀찮게 하니까. 이거 현명한 친구였군.”
언제 봤다고 친구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아히드가 친근하게 구는 모습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된다.
“최소 S급일 거라고?”
“…강하군.”
“그 아히드가 인정한 이들이라…….”
‘나름 유명한 놈인가?’
S급 용병이 희귀하다는 사실은 대강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시선이 집중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막 도착한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짐부터 풀고 오라고. 술이나 한잔하지! 내가 사겠어. 그쪽 아가씨들도 어때?”
나는 나서윤과 나연을 돌아보았다.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외국에 여행 온 기분이네. 현지인에게 초대받은 기분이야.”
“여행이 맞기는 하지, 언니.”
“그런가?”
“뭐, 나쁘지는 않겠네.”
사샤 또한 조금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였다.
‘정보나 얻을까.’
둘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만큼 나 또한 상대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짐이라고 해 봐야 별것 없었기에 적당히 방 위치 정도만 알아둔 뒤에 아히드가 말한 곳으로 향했다.
아직 완전히 저녁이 아님에도 술집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이성을 낀 채 먹고 마시는 이들이 부지기였으며 제법 떠들썩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어이! 유신후! 여기다!”
한 곳에서 자리를 잡은 아히드가 손을 흔들어 우리를 부른다. 그 옆에는
우리는 곧바로 테이블에 앉았고, 미리 준비된 맥주를 부어주며 아히드가 웃었다.
“술을 못 마시는 것은 아니겠지?”
“걱정 마라.”
지금 내 수준에 이만한 술로는 취하는 것도 힘들다.
우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저들끼리 떠들썩하게 노는 술집 분위기에 나연과 나서윤이 조금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간혹 힐끗거리는 이들이 있기는 했으나, 주 대상은 우리보단느 아히드로 보였다.
아히드는 자매에게도 술을 마시냐는 질문을 했고, 둘 다 조금씩이라면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쪽 너… 음… 넌 남성체인가?”
“나는 그런 거 안 따져. 그냥 사샤라고 불러라.”
“그래 사샤. 너는 마실 거냐?”
사샤는 고개를 저었고, 주변이나 구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어차피 정령이라 물과 다를 바 없다고.
아히드는 구경은 공짜라며 마음껏 보라고 웃어 제꼈다.
‘친화력이 대단하군.’
한참 술을 퍼마시며 아히드가 여러 잡다한 이야기들을 꺼낸다.
“딱 보자마자 알았다니까? 저건 진짜 강자다. 그걸 한눈에 알았다, 이거지! 내가 모르는 실력자가 나타나서 얼마나 신기했는지 아나?”
“그런가?”
“그럼, 그렇지! 내가 발이 얼마나 넓은데! 그런데 자네는 이 위험한 임무에 왜 지원한 건가?”
“무신과 싸워보고 싶어서.”
나는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허. 대단하군. 그 괴물은 보통이 아니라고 하던데… 하긴. 자네도 만만해 보이지는 않으니까.”
아히드는 그 높은 친화력만큼이나 말이 많았고, 덕분에 이쪽 세상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며가며 들었던 무신에 관한 이야기도, 멸망해버린 공국에 관한 이야기도 차례로 들을 수 있었는데, 기본적인 정보 수집의 목적도 있기는 했지만, 마음 편하게 여행지에서 현지인과 대화를 하는 느낌이 더 강했다.
나연과 나서윤 또한 그런 기분이었는지 아히드의 말에 집중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들었다.
아히드 본인이 나쁘지 않은 말솜씨를 갖고 있기도 했고, 우리의 호응이 무척 신이 났는지 연신 술을 들이켜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무신이 중심이기는 했지만, 워낙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이 세상의 수준이나 왜 사람들이 아히드를 그렇게 쳐다보는지 알 수 있었다.
‘S급 용병이 진짜 희귀하기는 했군.’
차원 전체를 통틀어서 등록된 S급 용병은 스물을 넘지 못했고, 그들은 하나같이 유명인사였다.
어느새 저녁을 지나 밤이 되어갈 무렵, 한창 떠들던 아히드가 갑작스레 내게 말했다.
“그런데 자네. 나랑 대련해볼 생각 있나?”
아히드는 못내 내 실력이 궁금한 모양인 듯했다.
‘어울려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여러모로 우리를 즐겁게 해준 놈이다.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지금 기분이라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허락했고, 우리는 대련 약속을 잡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