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나연의 물음에 나서윤이 잠시 침묵한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못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별거 아냐. 예전에 아빠 돌아가시고, 엄마가 다른 사람 데려온 적 있었잖아.”
“…그랬었다고 들었어. 나는 그때…….”
“이미 나갔었으니까. 그래서 잘 모르기는 할 거야. 근데 그 사람… 되게 이상한 사람이었거든.”
나서윤이 예전 일이라며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친해지겠다고 접근하는 것도 수상했고… 행동거지도, 말하는 것도 전부 이상했어. 엄마는 왜 저런 사람을 데려왔나 했다니까? 돈이 많았나?”
나서윤이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싫었어. 처음 보는, 어린 여자애라서 대하기 어색한 게 아니었어. 직감적으로 알겠더라. 친해져서 좋을 게 없다고. 그래서 엄청 반대했고, 엄청 싫어했었는데… 엄마는 그걸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했었거든. 근데 내가 끝까지 거절하니까 결국 포기하시기는 하더라. 그 과정에서 엄마랑 엄청 다퉜고, 결국 그 아저씨가 가버린 뒤로도 예전처럼 돌아가지는 못했어.”
“…너는 왜 그런 걸 나한테…….”
“언니도 힘들던 시기였으니까. 그래서 그랬어. 언니도 힘든데 우리 도와주고 있었고, 그 상황에서 말을 꺼내는 게 안 되더라.”
“…….”
나연의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진다.
“그 말은 사이 안 좋을 때 엄마가 했던 말 중 하나야.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그 뒤로도 같이 살기는 했지만, 많이 데면데면했지. 사이도 조금 많이 싸늘해졌고. 피가 이어졌으니까 같이 사는 느낌이었달까?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그 뒤로 조금씩 자존감이 무너지더라. 그러다 보니 학교생활도 그리 좋지 않게 되었고… 언니가 나랑 엄마 보러 왔을 때는 정말 포기하고 싶을 쯤이었어.”
“그런…….”
“내가 원래 활달한 성격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잖아? 그런데 언니가 오고 나서 뜬금없이 눈 떠보니 탑이었고… 정말 포기할 때쯤 오빠를 만났지.”
나서윤이 나를 바라보며 밝게 웃는다.
“오빠를 만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 이제는 괜찮아. 그때처럼 약한 나도 아니고, 오빠랑 언니도 있고, 이전처럼 엄마 말 한마디에 휘둘리던 나도 아니니까.”
그냥 지나간 오래전 과거의 일일 뿐이라고. 그런 것쯤은 이미 털어냈다고 나서윤이 말했다.
“살갑게 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완전히 무시할 생각은 없어. 일단 엄마기는 하니까. 하지만 엄마라는 이유로 내 삶의 방식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아. 내 삶은 내 거야. 오빠랑, 언니랑, 길드 사람들이랑. 그렇게 다 같이 목숨 걸고 개척한 길이야. 아무리 엄마라고 해도, 개입하고 간섭하는 것은 안 돼.”
조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만 받아들일지 말지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라며 나서윤이 단호한 태도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잖아? 엄마가 헤어지란다고 정말 헤어질 거야?”
“…아니. 그건 싫어.”
“그치?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우리 삶은 결국 우리 거야. 알잖아?”
“…그래.”
나연이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나서윤을 바라보았다.
“뭐, 어떻게 보면 너보다 낫네.”
사샤의 말에 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쪽은… 그러네.”
설마 인정할 줄은 몰랐는지 사샤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다.
“자책은 하지 말어. 그냥 성격 같은 거니까. 대신 성격이 그러니 길드원들이 너는 믿잖냐.”
사샤의 어설픈 위로를 눈치챘는지 나연이 살짝 웃으며 사샤를 바라보았고, 사샤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당장 허락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기회 자체는 얻었다. 게다가 설령 끝까지 반대하더라도 이 둘이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빠. 하연 언니랑 데이트 즐거웠어?”
“…….”
갑작스러운 나서윤의 기습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뭐라고 하는 거 아냐. 그냥… 언니랑 했으면 우리랑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상황이니 지금 시간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연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런 데이트 기회가 또 언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한 같이 들었는지 조금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기색을 눈치챈 사샤는 급한 일이 생겼다며 빠르게 도망쳐 버렸다.
“타이밍이 좋지 못한 듯한데…….”
이전의 스캔들 뿐만이 아니다. 방금 자매의 어머님이 우리 사이를 대놓고 반대한 상황이다. 그런데 그날 바로 대놓고 데이트를 한다? 거의 도발 수준이었다.
나연 또한 그 사실이 걸렸기에 망설였는지 이내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안 갈 거예요?”
나서윤의 목소리 톤이 낮아진다.
얼굴이 시무룩해지고, 슬퍼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눈치 볼 필요 없는데…….”
그건 나서윤의 입장이다.
나연이 자신의 입술을 짓씹는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연이 입을 열었다.
“가자.”
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와 관계 개선을 가장 원하는 사람은 나연이다. 그런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할 줄은 몰랐다.
“우리 의사를 명확히 표시하는 거라고 생각해. …신후가 고생 조금 하겠지만…….”
아마 그럴 거다. 부정적인 감정은 나를 향하겠지. 끝에 가서 소극적으로 변하는 나연의 말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가자. 까짓 거 책임 지지 뭐.”
어차피 초기 이미지는 바닥이다. 나연이 조금 올려주기는 했지만, 인정을 받기 위한 고생 정도는 각오했었다.
내 말에 나서윤의 얼굴이 극적으로 밝아진다. 그녀는 내 팔 한쪽을 끌어안았고, 우리는 번화가를 향해 당당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저거 유신후 아냐?”
“유신후? 그 사람이 왜… 또 데이트 나왔나? 상대 누구야? 성녀님?”
“아니, 아냐. 저건… 나서윤이랑 나연 같은데?”
“마검사랑 정령사? 진짜?”
“와, 그 소문 사실이었어? 스캔들 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완전 당당하네.”
“저 사람이 눈치 볼 필요나 있냐? 근데 진짜 부럽다.”
소곤거리는 소리를 인식한다. 신체 능력이 높은 만큼 멀리서 소곤거려 봐야 곁에서 대놓고 떠드는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역시…….’
이미 한 차례 났었던 스캔들 때문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낀다.
스캔들이 아니더라도 내 얼굴은 이미 잘 알려진 편이었다. 워낙 외모 자체가 눈에 띄기도 했고, 가디언의 수장인데다가 가이아가 인정한 대리자다. 지금 시대에 얼굴을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내 얼굴이 더 유명할 터다.
그런데다가 때마침 얼마 전의 스캔들로 인해 화제까지 된 상황. 주변에서 몰래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을 느꼈다.
‘막을까…….’
다른 수련자들에게 협조를 요청하거나 내가 작정하면 못 막을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소문은 난다.
‘…미안하기도 하고.’
주하연과는 대놓고 다닌 주제에 나연 자매와 다닐 때는 조심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나연은 그런 주변의 상황을 눈치챘는지 조금 어색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서윤은 달랐다.
“오빠! 저기, 저기 가보자! 옷 진짜 이쁘다!”
대단한 곳도 아니다. 흔한 번화가에 불과하다. 주하연과 평범하게 다녔다는 사실을 아는지 자매는 자신들 또한 그런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는 말을 했었고, 나는 그녀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쟤도 시선 집중된 거 알 텐데…….”
나연의 말에 나 또한 동의한다.
나연이 알 정도인데 저 나서윤이 모를 턱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신경 자체를 쓰지 않는 느낌이다. 말 그대로 우리와 함께 보내는 시간 자체를 즐기는 느낌. 다른 사람들 알 바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서윤이 답네.”
“진짜 그래. 진짜 많이 달라지기는 했어. 옛날에는 다른 사람들 눈치 많이 봤었는데…….”
확실히 탑 극초기에는 나연에게 많이 의지했고 지금처럼 활발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첫 만남 때는 어딘가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언제부터였더라…….’
아마 변하기 시작한 것은 마력을 각성한 다음부터라고 추측된다. 약했기에 숨겨졌던 일면이 마력을 얻고 스스로가 강해지며 모습을 드러낸 느낌이랄까.
튜토리얼에서 무법자 후보들과의 전투 이후 변한 것이 많이 느껴졌었으니까.
이상을 처음 눈치챈 때이기도 하고.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나 다음으로 강한 강자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나 애초에 그녀와 정식으로 겨뤄볼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손에 꼽힌다.
나연 또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문득 나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언니, 오빠! 뭐 해!”
“갈게.”
나서윤을 본받기로 했다. 현재 가장 눈치를 볼 대상마저도 무시한 채 놀러 나온 상황이다. 이제 와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것이 우스웠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것을 신경 썼다고…….’
자매의 어머니 덕분에 예민해진 듯했다. 필요한 상황도 아닌데 남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나는 나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나연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우리의 변화를 눈치챈 나서윤이 즐거운 기색으로 웃는다.
데이트라기보다는 정말 가족끼리 놀러 나온 느낌이었다.
몇 가지 옷과 장신구를 보고, 만족하지 못한 나서윤 덕분에 여러 장소를 돌아다녀야만 했으며, 결국에는 백화점까지 순회를 하고 있었다.
뛰어난 인지 능력과 빠른 판단으로 그녀는 정말 쉴 틈 없이 온갖 곳을 헤집고 다녔으며, 중간부터는 나연 또한 그런 나서윤에게 동참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자본의 한계로 이렇게 자유로운 쇼핑을 해 본 적이 없다나?
그래 봐야 명품도 아닌 흔한 옷들에 불과했으나, 자매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타겟이 바뀌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아닌 나를 꾸미기 시작했다.
웃긴 것은 자신들을 꾸미는 것보다 나를 꾸미는 것에 더 재미를 붙였다는 것.
“외모가 받쳐주니 재밌네…….”
나연의 중얼거림에 등골이 살짝 서늘해졌다.
사실상 노을이 질 때까지 나는 둘에게 끌려다니며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고, 사실상 데이트가 아닌 옷 갈아입는 일만 수 시간 동안 하고 말았다.
“아쉽다… 시간만 됐으면 화장도 시켜보는 건데…….”
“다음에 또 하면 되지, 언니. 어차피 이전보다는 덜 바쁠 텐데 뭐.”
“그건 그래.”
나연의 말에 나서윤이 대꾸한다. 사실이기는 했다.
저녁은 평범한 부대찌개. 여전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종종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나서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도 화장은 조금…….”
“얼굴 아깝잖아. 넌 조금 더 꾸밀 필요가 있어.”
나연의 말에 나서윤이 격하게 동의한다.
“여장도 시켜보고…….”
“안 해.”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고 둘의 얼굴이 조금 시무룩해진다. 분위기를 너무 탄 모양이었다.
시무룩했던 것도 잠시,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금 떠들기 시작했고, 그런 둘의 얼굴은 너무나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근데 오빠.”
“응.”
“다음 차원 연결, 소식 들은 거 있어?”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