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에필로그 나연, 나서윤>
“…어쩌자고… 조금만 참지 좀…….”
“…….”
나연의 핀잔에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탓하는 건 아닌데, 타이밍이 진짜…….”
나서윤 조차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뚱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게, 리더 님아. 이건 실수한 거 같은데?”
“넌 조용히 해 사샤. 원인을 따지자면 너도 지분 있으니까. 네가 초면에 그따위로만 안 했으면 됐잖아? 그것만 아니면 진작 소개했지. 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기다리지 말걸. 엄마 진정 좀 하게 기다린 게 실수였어.”
성가시게 되었다는 표정의 나연은 뚱한 표정의 나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표정 풀어.”
그러고 보면 사샤와 마찬가지로 나서윤도 자신의 어머니를 화나게 하는 것에 일조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연의 말에도 나서윤은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듯한 표정.
“후우…….”
나서윤의 그러한 태도에 나연이 한숨을 내쉰다.
“일단, 가자. 이대로 가면 돌이킬 수가 없을 거야.”
나는 나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나연 자매의 어머니를 만나기로 했던 약속. 그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연을 따라나섰다.
‘하필이면…….’
스캔들이 터져버렸다.
주하연과 데이트를 즐긴 것이 그대로 인터넷에 떠 버린 것. 우리가 유명인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고, 탑은 지구와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숨길 생각은 없었다. 그럴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게다가 어떤 국가도 이것을 빌미로 들어 나에게 어떠한 처벌을 내릴 수도 없었다.
의외인 것은 지금 수련자들의 힘이 장난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런 기사를 냈다는 것. 기사는 오래지 않아 삭제되었지만 이미 화제가 된 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뭐, 솔직히 기사가 없었더라도 소문은 금방 났겠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감당은 해야 하겠지만.’
사실 내 가족들도 스캔들 때문에 조금 난처해하는 것 같기는 했다. 내 연애 관계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머니는 당황하셨고 아버지는 실소하셨었다. 동생은 실수로 보이기는 했지만, 미친놈이라고 했었고. 딱히 가족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기에 스캔들을 계기로 순순히 밝힌 것. 그렇다고 이쪽 관련으로 간섭을 받을 생각도 없었고, 가족들도 단호한 내 태도에 일단은 과한 간섭은 그만두었다.
물론 제소시아 출신의 사람들은 전혀 동요가 없었고, 그것은 탑 출신 수련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능력이 있어서 감당하겠다는데 뭔 상관이냐는 듯한 모습. 저들이 좋다는 것에 뭔 참견이냐는 듯한 행도이었다.
문제는 것을 본 나연 자매의 어머니가 화를 냈다는 거다. 아마 내 이미지는 지하 저 아래 시궁창에 처박혀 있을 터. 이해는 간다.
이전 나연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다. 상황이 더 커지기는 했지만.
나연을 따라 도착한 집은 제법 커다란 저택이었다.
본래 나연 자매가 부유한 집안인 것은 아니었다. 본래 집안 환경이 좋지 못했다고 들었다. 지금의 집은 국가 쪽에서 제공한 것으로, 정부가 자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제공한 일종의 뇌물이었다.
지금이야 둘의 능력이면 이딴 집을 구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보니, 어디까지나 자매보다는 자매의 어머니를 위한 뇌물이었다.
오랜만에 조금 긴장이 되는 것을 느낀다.
내부로 들어가자 이미 사전에 연락을 한 듯 자매의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매의 어머니는 들어오는 나연 자매와 잠시 인사를 나누고는 사샤를 보더니 움찔한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굳히고는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쪽이 유신후 씨?”
“인사가 늦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님. 유신후입니다.”
“세상을 구한 영웅을 만나서 반갑네요. 연이 어미 되는 사람입니다.”
반갑다는 말과는 다르게 자매의 어머니는 결코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영웅이라뇨. 과찬이십니다. 여러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해내지 못했을 일입니다. 여기 둘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최대한 겸손한 모습을 보이자 아주 조금이나마 자매 어머니의 표정이 나아진다. 하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여전히 냉랭한 모습이다.
“진작 찾아뵀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유신후 씨가 바쁜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어요. 연이에게 듣기로는 지금도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아닙니다. 시간을 냈어야 했는데…….”
나는 잠시 멈칫하기는 했지만 거듭 저자세를 유지했다. 여기서 다퉈봐야 나만 손해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요.”
잠시 말을 멈췄던 자매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 기사를 봤어요. 지금은 삭제되었더군요.”
하지만 목격자는 많았다.
실제로 돌아다닐 때 우리를 알아본 사람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SNS에도 제법 우리 사진이 돌아다니는 편이었고.
“성녀님과 가까운 관계 시라고.”
“그렇습니다.”
“소문으로는 성기사인 남은주 씨와도 무척 가까운 관계라고 하던데…….”
“…맞습니다.”
이전부터 있었던 소문이지만, 최근 사실이 됨으로써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당당하시네요? 연이와 서윤이에게 들었어요. 둘이 자매인 것은 모를 턱이 없을 테고… 둘에게도 한소리 하기는 했지만, 유신후 씨에게도 묻죠. 도덕적으로 이게 옳다고 생각하나요?”
공격적인 어머니의 말에 나연과 나서윤이 뭐라 하려는 순간, 나는 그 둘을 향해 나서지 말라는 손짓을 보냈다.
“지구의 상식으로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화가 나시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선택한 일입니다.”
내 말에 자매의 어머니가 헛웃음을 짓는다.
설마 대놓고 이렇게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
“영웅이라더니 무척 뻔뻔하시네? 아무리 그래도 나라에 법이 있는데, 한국인이 중혼이라니, 거기에 자매 둘을…….”
그 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시작은 필요에 의해서이기는 했다. 저쪽이 먼저 호감을 표시한 것도 있고. 둘과 함께 하게 된 이유에 목적을 위해서라는 점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싫었다면 이렇게까지 책임을 지지도 않았을 터였다.
둘을 지금에 와서 둘을 놓칠 생각은 없었다.
자매 어머니의 설교를 묵묵히 들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 이성적으로 납득 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은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정면 돌파밖에는 없었다. 시간을 들여 신뢰를 쌓고, 인정을 받는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간의 고난은 견뎌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가만히 듣고만 있자 더는 참지 못했는지 나서윤이 앞으로 나섰다.
“알아서 하라며. 엄마가 뭐라고 하던 우리 인생은 우리가 선택해. 거기까지만 해.”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너는…….”
“나 이제 14살 아냐. 나도 성인이야. 수련자들은 모두 성인으로 인정하겠다는 정부 발표 못 들었어?”
“그것과 이건 달라! 설령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조금 더 세상을 겪고…….”
“세상은 달라져. 말했잖아. 거인들 물리쳤다고 다 끝난 거 아니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매가 한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니 그걸 엄마가 납득하라는…….”
“자꾸 같은 말 하게 하지 마. 알아서 하라며. 그때도 같은 말 했었잖아. 잊어버렸어?”
어떤 기억이 떠올랐을까. 나연 자매의 어머니가 입을 닫는다.
나연은 의아한 표정이다.
“…저번에도 그런 말 하더니, 도대체 무슨…….”
“연이 너는 가만히 있어.”
“여전히 언니에게는 말하기 싫은가 보네. 나는 엄마에게 배운 대로 행동했고, 그 선택의 결과가 이거야. 그리고 우리가 오빠랑 사귀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은 뭐, 헤어지기라도 하라는 거야?”
“그럼, 당연한…….”
“바보 같은 소리네. 오빠만 한 신랑감이 어디 있다고.”
“…백 번, 아니 천 번 양보해서, 환경이 그랬기에 중혼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매 둘이 한 사람과 같이 하는 것만은 안 돼. 이건 양보 못 해.”
“그걸 왜 엄마가 정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건 나랑 언니가 선택하는 거야.”
갑작스레 충돌을 일으키는 나서윤과 자매의 어머니.
조금 당황한 듯한 나연은 이내 둘의 감정이 격해지자 다시금 이마를 부여잡는다.
“예전에는 안 그러더니…….”
“결국 또 이리되네. 이번에는 나 아무 짓도 안 했다?”
“…조금 조용히 해줄래, 사샤? 안 그래도 복잡하거든?”
이를 가는 듯한 나서윤의 말에 사샤가 어깨를 들썩이더니 뒤로 물러섰다.
둘의 충돌이 거세지자 나연이 앞으로 나섰다.
“이러려고 부른 거야?”
둘을 말리며 하는 말에 나연의 어머니가 먼저 이성을 찾았는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연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렴. 지금 상황에 엄마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니?”
“세상이 달라졌다니까. 엄마 심정은 이해해. 하지만 우리 상황도 이해해 줘. 다른 것은 몰라도 헤어질 생각은 없어.”
“너까지 왜 그러니. 속상하게…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라고…….”
“당당하게 다녀. 왜? 창피해?”
“그럼 이 상황에…….”
“우리 가이아 길드 일원인데? 거인들과 최전선에서 맞서 싸운 사람이고, 국가에서도 함부로 못 대하는 사람들이야. 이 집도 왜 받았는지 알잖아?”
“그것과 이거는…….”
“다른 사람에게 다 물어봐. 딸내미가 그 유신후랑 사귄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
나연의 단언에 어머님의 말문이 막힌다.
‘명성이 도움되기는 하네.’
“그치만 이건…….”
“그런 생각 없는 사람들 말은 무시해. 그리고 무엇보다, 신후랑 함께하면 행복해. 우리가 불행했으면 좋겠어?”
“…그건 아니지만.…”
“일단 색안경 끼지 말고 봐 봐. 그래도 세상을 구한 사람이고, 책임감도 강한 사람이야. 다른 거 다 치우고, 적어도 우리랑 엄마한테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잖아.”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해. 보여준 것도 있고… 너희 말에 따르면 처음부터 너희 지켜준 사람이기는 하니까.”
“그럼 일단 좀 지켜봐. 다른 사람 눈 신경 쓰지 말고, 엄마 눈으로 봐. 정말 믿을 수 없는 사람인지, 지켜보라고.”
“…….”
“그러려고 부른 거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연은 어머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 알겠다. 알겠어. 일단은, 지켜볼거야.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완전히 허락한 거 아니니까.”
나서윤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깨고 싶지 않았는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고마워. 엄마. 보다 보면, 실망하지 않을 거야.”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나가 봐. 다음에 다시 오고.”
“응.”
나연은 차분하게 대화를 끝내더니 곧장 나오라는 듯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나는 조용히 자매의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그때 자매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탑에서 딸아이들을 지켜 줬다고 들었어요.”
“…….”
“고마워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나와 시선을 맞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만은 진심이었다.
“…네. 실망하지 않으시록 노력하겠습니다.”
“가 봐요. 오늘 너무 거칠게 말해 미안했어요.”
이해는 갔다. 나는 말 없이 다시 고개를 숙여 보였고, 곧바로 저택을 빠져나왔다.
저택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나연이 나서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 엄마가 했다는 그 알아서 하라는 말, 그거 무슨 소리야?”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