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에필로그 주하연>
“결국, 늘렸네요.”
“…….”
주하연의 지적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설마 지구에서 늘릴 줄은 몰랐는데…….”
“제가 들이댔는걸요. 놓치기 아까워서.”
“…그건 인정해. 탐나는 사람이기는 하지. 제 사람 생각하는 거나, 가족에게 대하는 모습 보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주하연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세상이 변하고 있으니 별로 문제 될 것은 없겠지. 가이아 님이 이런 걸로 뭐라 하실 분은 아니니까. 슬슬 공표해도 괜찮으려나…….”
가이아교는 딱히 결혼에 관해서 제한하는 것은 없었다. 그 조건은 사제일지라도 마찬가지. 사제라고 하더라도 신만을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할까?
타 신을 대하는 것도 너그러운 편이었다. 나만 해도 이미 계약된 신이 둘이기도 하고.
‘그때 태도를 보면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필요하다면 용인해주는 것이 가이아였다.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주 너니까.”
주하연은 겉으로는 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남은주는 주하연의 허락이 못내 기쁜 듯 밝게 웃으며 주하연에게 달라붙었다.
“고마워요, 언니.”
“내게 고마울 것은 뭐니.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어차피 이미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며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가족들에게 한 차례 실망했었기 때문일까. 그런 주하연의 태도에 남은주가 무척이나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남은주를 주하연이 가볍게 끌어안아 주었다.
‘들러리군.’
그래도 보기 좋은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남은주를 끌어안고 있던 주하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은 잘 해결 되었니?”
남은주가 품에 안긴 채로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억울한 것은 풀었어요.”
남은주는 천천히 가족들과 있었던 이야기를 주하연에게 들려주었고, 주하연은 마치 자기 일인 것 마냥 남은주의 이야기에 분노하고 통쾌해하며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자기 일도 생각이 나는 모양인데…….’
생각 해보면 주하연도 귀환 이후 가족들과 좋게 풀리지 않은 편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내가 일일이 참견하는 것도 우습고,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이상 먼저 나서는 것도 실례라고 여겨 가만히 있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나쁘지 않게 해결되었다고 했었는데…….’
가족과 관계된 일이고 나쁘지 않게 해결이 되었어도 본인이 말하기를 꺼려서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성훈이라는 친구,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네.”
“성훈이가 많이 변하기는 했어요. 처음 봤을 때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라 당황했었는데… 지금은 훨씬 좋은 쪽으로 변했더라고요.”
“다행이야.”
주하연의 미소에 남은주 또한 같이 미소를 지었다.
“성녀님.”
그때, 한 사제가 주하연을 찾아왔다.
주하연은 그 사제를 보며 미간을 좁혔고, 사제는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보이며 고개를 숙여왔다.
“성자님을 뵙습니다.”
난처한 표정의 사제. 주하연은 그런 사제를 보며 물었다.
“또 왔나요?”
“…그렇습니다.”
“후우…….”
사제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 익숙하다는 듯한 모습.
“무슨 일입니까?”
“…타이밍이 공교롭네요.”
골치 아프다는 듯한 주하연의 표정.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내게 사실을 알려왔다.
“…저희 가족이에요.”
잘 해결된 것치고는 지금의 표정이 이상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주하연이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후… 신후 씨를 만나고 싶다고 저러는 거예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하연의 가족이다. 내가 못 만날 이유가 없었다. 종교 쪽은 꾸준히 주하연이 관리해 왔다. 나는 잘 나서지 않는 편으로, 주하연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을 나 혼자 처리할 수는 없었고, 가이아에 의해 직접 언급되고 지지받은 내가 활동했다가는 진짜 광신도 집단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도 광신도 문제가 없지 않은데, 그 집단이 더 커진다면 쓸데없는 문제나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잘 나서지 않는 것이지 그 대상이 주하연의 가족이라면 상관없었다.
“하연 씨의 가족이라면 괜찮습니다. 종교 쪽으로는 제가 잘 나서지 않습니다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연 씨의 가족인데 제가 설마 거절을…….”
“그게 아니에요.”
주하연이 머리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후… 진짜 말하기 싫었는데…….”
조용히 중얼거리는 주하연.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일이 해결되기는 했는데, 이상한 방향으로 해결되어서 그래요. 그게…….”
주하연의 설명에 따르면 가이아의 강림 이후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주하연을 인정했다고 한다.
탑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정신적으로 구석에 몰려 다른 신을 섬긴 것이 아닌, 신이 실존하는 것을 자신들이 알게 되기도 했고, 진짜 신을 모시며 성녀까지 된 그녀를 인정 안 할 수가 없었던 것.
게다가 현재 지구의 대세 종교는 단연 가이아 교였다.
다른 종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전과 비교했을 때 몰락했다고 말할 정도로 규모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신이라고 불리는 것은 가이아뿐만이 아니다. 브리니아도 나름 타 차원의 관리자이자 여신이라고 불리는 만큼 인간들이 보기에 지구에 존재하던 기존 종교들의 신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가이아나 내가 그와 관련하여 직접 언급한 적은 없으니까.
문제는 지구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현신하고 대리자까지 보내며 위기를 구해준 것은 가이아 혼자라는 것.
실제로 지구의 관리자는 가이아 뿐이기는 하다. 다른 종교의 신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지금의 지구와는 관련이 없었다.
‘천사를 보면 다른 대차원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어찌되었든 주하연을 인정하고 난 뒤 가족들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개종을 할 것인지 기존의 종교를 계속해서 믿을 것인지.
실제로 앞서 말했듯 기존의 종교들이 몰락에 가깝게 무너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종교를 지지하는 세력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주하연의 가족들은 논의 끝에 개종을 선택했다고 한다.
“문제는 제가 성녀였던 거예요. 그리고…신후 씨랑 가깝…다는 이야기도 어디서 들었는지…….”
가이아교 특성상 사제가 되어도 공식적으로 가족들과 연이 끊긴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성녀의 가족들을 막대할 수도 없었고, 그 때문에 찾아오는 가족들이 골칫거리가 되어 버린 것.
“신후 씨를 만나면 아마 가이아 님과 만나고 싶다고 할지도 몰라요.”
“…뭔…….”
신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요구한다고?
“신후 씨의 요청이라면 신을 영접할 수 있다고 믿는 거죠.”
“…불가능합니다.”
‘아예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럴 이유가 없다. 무척이나 까다롭고, 무엇보다 가이아의 힘만 깎인다.
“안 그래도 차원 선별하느라 바쁘신데…….”
“그러니까요…….”
한숨을 내쉰 주하연이 말을 이었다.
“그 외에도 사후 세계라던가, 교리를 직접 알려달라고 하고,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 하고…….”
신성력을 신에게 인정받았다는 증거쯤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심하군요.”
주하연 또한 바쁜 나날을 보내는데, 이런 식으로 발목이 잡히면 좋지 못했다. 남은주 또한 주하연의 가족이기에 뭐라 말은 하지 못했지만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다.
“…언니도 고생 많네요.”
“그러게… 이럴 때 보면 신후 씨나 바다 씨가 부러워…….”
확실히 나나 한바다는 잘 해결된 쪽이었다.
“그러니 만나지 마요.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차라리 내가 직접 나서서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끊어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지만 주하연이 극구 반대했다.
“그런 것보다는 시간 낼 테니까 데이트나 해줘요. 어찌 된 게 지구에 와서 서로 더 바빠. 하루 정도는 내게 줄 수 있잖아요?”
화제를 돌려버리는 주하연. 그녀는 일부러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는 어색한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준비하죠.”
“저는 바쁘니까요. 기대할게요.”
주하연에 비하면 내가 더 여유로운 것은 사실이었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주하연은 데이트를 기대한다며 나를 배웅해버렸고, 나는 자리를 피해 줄 수밖에 없었다.
* * *
이후 나는 주하연의 요구대로 데이트 코스를 짜야만 했다.
그리 대단한 것은 없었음에도 주하연은 돌아다니는 내내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시간을 낼 만한 가치가 있었어요.”
“그거 다행입니다.”
“이런 시기인데도 영화는 나오네요. 뭐…이제 액션 같은 것은 즐기지 못하게 되었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로맨스를 선택하신 것은 가산점을 드릴게요.”
“감사하군요.”
주하연의 장난스러운 웃음에 나 또한 피식 웃으며 가볍게 받아주었다.
어지간한 액션이나 CG 정도로는 우리를 만족하게 만들 수가 없다. 당연한 이야기다.
주하연은 카페에서 초코 프라페를 먹으며 가볍게 웃었다.
“이제는 이런 것 먹으면서 살찔 걱정 안 해도 되는 것 하나는 좋네요. 옛날에는 다이어트 때문에 정말 고생이었는데.”
잡다한 말들. 나는 그런 주하연의 이야기를 주로 듣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주하연은 무척이나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하루 종일 한 것이라고는 고작 밥 먹고 영화보고 돌아다니는 것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거의 10년간 그런 것조차 즐기지 못하며 살아온 만큼 새롭고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탑에는 영화도, 이 정도로 다양한 먹거리도 없었으니까.
다른 수련자 중에는 조금이라도 즐긴 이들이 많았지만, 나나 주하연 같은 경우에는 그럴 시간도 없었다. 나는 시간이 나면 가족들과 만나서 어색한 기류를 없애는 것에 집중했고, 주하연 같은 경우에는 나보다 바쁜 경우가 많았으니까.
지금처럼 가까운 사람과 마음 편하게 돌아다닌 적은 없다시피 했다.
묘한 표정을 짓던 주하연이 내게 말했다.
“고마워요. 좋은 추억이 되었어요.”
“뭔 마지막처럼 말합니까. 앞으로도 쌓일 건데.”
“그건 그렇죠.”
가볍게 웃은 주하연. 그녀는 잠시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가족들 일은 정말 신경 쓰지 말아요. 워낙 독실했던 분들이라 이번에도 왕성하게 움직이시려고 그러는 것뿐이에요.”
막 생겨난 종교고, 신의 화신을 직접 목격한 것이 기억에 강하게 남아 그러는 것일 뿐 나중에는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소개는 그때 하겠다고.
그녀는 남은주와 다르게 처음 자신이 거부당한 것을 그렇게까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에 관해 묻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애초에 예상했던 반응이었는걸요.”
서운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해는 한다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가끔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큰 힘이 되는걸요? 믿고 맡겼는데, 잘해야죠.”
“너무 부담은…….”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야망이 있다고요. 종교를 일으킨 첫 번째 성녀로 이름 남길 거니까.”
장난스레 웃는 주하연.
“그래도, 지치면 언제든지 돌아갈 거에요.”
“기다리죠.”
주하연의 시선을 마주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조금 불안했는데, 안심했어요.”
“…무슨?”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급한 일들이 많았고, 그런 만큼, 같이 있는 시간도 너무 적었었죠. 저는 신후 씨밖에 없는데, 신후 씨는 그게 아니니까. 하지만.”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주하연이 웃는다.
“괜한 걱정이었네요. 신후 씨인데.”
“…미안합니다.”
“사과 듣자고 한 말 아니에요. 그냥… 여전히… 아니, 저는 예전보다 더 좋아졌다고 이번에 느꼈어요. 아니, 사실은 이전부터 느꼈죠. 멀어지고 싶지 않다고 늘 생각했어요. 지구로 돌아온 뒤, 오늘만큼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어요.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껴요. 그냥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아, 은주에게는 비밀이에요? 괜히 자기가 불안을 부추겼다고 오해할지도 몰라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는 자주 찾아가죠.”
아직 지구의 위기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처럼 이렇게 잠시 시간을 내는 것이 사치인 시기는 아니었다.
내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주하연은 조금 얼굴을 붉히며 몰래 오라고 중얼거렸다.
“괜히 신도들에게 들키면 귀찮아지니까…….”
약간 귀여운 모습에 나는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설마 이걸로 데이트 끝은 아니겠죠?”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주하연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는 미리 예약한 호텔로 그녀를 이끌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