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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306화 (306/317)

306화

집으로 이동하는 동안 이성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은 진정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은 듯했지만 참는 모양이었다.

당장 가족들과의 일을 해결하는 것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현재 가족들은 이전의 집과는 다른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무리 절연에 가까운 상태라고는 하지만 그 남은주의 가족이다. 정부에서 상당히 신경을 쓴 상태였다.

남은주의 가족 입장에서는 거절도 불가능했다. 타국에서 손이라도 쓰면 직접 피해를 보는 입장이니까.

집에는 내가 가디언을 통해 연락해 놓았다.

이성훈이 살아있고, 지금 남은주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아마도 이성훈의 가족들도 그곳에 있을 터다.

“…여기야?”

“그럴 거야. 나도 이곳에 직접 오는 것은 처음이니까.”

이성훈의 물음에 남은주가 대답한다.

벨을 누를 필요도 없었다.

아예 앞에서 기다리던 가족과 친척들이 이성훈과 남은주를 보고는 달려나왔다. 이성훈의 부모와 남은주의 가족 및 친척인 모양이었다.

“성, 성훈아!”

한 중년 여성이 달려와 쓰러지듯 이성훈에게 안겼다.

“…어머니.”

“그래, 그래 성훈아…….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이 어미는 네가…….”

반갑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이성훈의 얼굴 이곳저곳을 쓰다듬는다.

“…잘 돌아왔다. 정말 위험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잘했다. 잘했어.”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 또한 그런 이성훈을 칭찬했다.

그러나 남은주의 가족은 가까이 왔을지언정 남은주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남은주는 냉랭한 표정이었다.

가족들과의 해후를 나누는 이성훈의 표정 또한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걱정 끼쳐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이성훈은 조심스럽게 남은주를 바라보았다.

막상 만나니 반갑기는 하고, 울고 계신 분들께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남은주의 냉랭한 표정을 보고는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이성훈이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남은주의 어머니가 나를 발견했다.

“…저기, 설마…….”

그제서야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는 담담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신후입니다.”

“…신인!”

중국에서 얻은 별명의 명줄이 참 길었다.

“어째서 저분이 여기에…….”

“…성훈아, 혹시…….”

“저 말고 은주 따라온 겁니다. 저분, 은주 연인이에요. 유명할 텐데요?”

움찔.

연인이라는 말에 나와 남은주가 동시에 반응한다. 냉랭한 표정이었던 남은주도 설마 저 말을 할 줄은 몰랐던 듯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당시 중층에서는 그렇게 알려졌다. 거짓 소문이기는 했지만, 그걸 이성훈이 알 턱이 없었다. 정말 극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문제는 지구에서는 생각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

지구 환경상 일부일처를 지향하는 국가가 많다. 한국은 중혼이 금지인 국가고, 그렇다 보니 생각보다는 대놓고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물론 아주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라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정확히 사실 확인이 된 적은 없다시피 했다. 알게 모르게 수련자들이 내 눈치를 본 것. 그러나 이성훈은 막 지구에 왔고, 아무리 절연에 가까운 사이라고는 해도 설마 가족들마저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그 소문, 진짜였니? 은주가 저…분의 연인이라고? 듣기로는 성녀님과…….”

“…그 정령사… 라는 분이 연인 아니었니?”

가족들의 혼란을 무시한 채 슬쩍 이쪽의 기색을 살핀 이성훈은 나와 남은주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 듯 순순히 밝혔다.

“모르셨어요? 중층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인데. 다른 분들도 맞아요. 이상하게 보지는 마세요. 탑에서는 흔한 일이니까. 일부다처 말고도 일처다부도 생각보다 흔했습니다. 능력만 있으면 되는 곳이었으니까요. 그 정도로, 다른 환경인 곳입니다.”

이성훈이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은주에게 했던 말들, 들었습니다. 심하게 대하셨다던데요, 어머니, 아버지.”

이성훈은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저씨, 아주머니도요.”

“…그건.”

“은주가 저를 버린 게 아닙니다. 거기서는 필요한 일이었어요. 그리고 전혀 도움을 주지 않은 것도 아니고요. 제가 살아있는 것도, 은주가 제게 도움을 줬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여기 계신 유신후 님의 호의를 받을 수 있었고, 그게 다 제가 은주와 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같이 올 수 있었잖니. 그런 위험한 곳에 너를 두고…….”

“위가 더 위험해요. 같이 갔으면 분명 죽었을 겁니다. 제가 은주와 만난 곳은 중층이었고, 저는 거기서도 겨우 살아남은 수준이었습니다. 탑은 위로 갈수록 더 위험해지는 구조입니다. 몬스터, 그러니까 괴물들과 싸우면서 강해져야 하는데… 중층에서도 겨우 살아남는 수준인 제가 위로 가 봐야 죽기밖에 더했겠어요?”

냉정하지만 사실이다. 이성훈은 그렇게 말했다.

“중층에서도 겨우 살아남는 수준이었던 제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것은 모두 가이아 길드의 도움을 얻은 덕분입니다. 제가 괜히 은주 덕분에 살아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이성훈은 주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은주도 그 지옥을 거친 사람입니다. 그 위험한 곳을 은주도 지나왔다고요. 게다가 다 같이 살아보겠다고 기껏 그 지옥을 빠져나와서도 또 다른 괴물들과 목숨 걸고 싸웠고, 결국 그들을 몰아내기까지 했는데, 그런 사람보고 배신자라니요!”

말을 하면서 이성훈은 이전의 분노가 다시 떠오른 듯했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이 어떤 일인데, 그곳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일인데! 응원은 못 해줄 망정, 그런 취급은 하셔서는 안 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실망했습니다. 제가 다 미안하더군요.”

“성훈아!”

소리치는 이성훈을 향해 그의 어머니가 외쳤다.

그러자 남은주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나선다.

“…안다. 뒤늦게 은주가 싸우는 것을 봤지. 그래서 정부를 통해서 연락을 넣었었다. 다시 이야기하고 싶었지. 그런데…….”

“제가 거절했어요.”

자신의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는 듯하자 남은주가 나선다.

“신후 오빠가 알려 줬는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고요. 더는 저를 딸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내가 말이 과했다. 그때는… 구할 수 있는 사람을 버렸다고 생각해서 그랬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사람의 도리를 저버렸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그랬던 거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 그 위험한 곳에 가족과 같은 사람을…….”

‘진짜 친밀한 관계기는 했나 보군.’

어쩌면 이성훈의 부모는 남은주를 딸로, 남은주의 부모는 이성훈을 자신들의 아들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탑이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은 있으셨네요. 그런 곳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 추궁부터 하시나봐요? 심지어 제가 말한 것도 아니고 고작 소문이나 듣고 추궁하셨었죠. 혼자 살아온 것이 달갑지 않으셨나요?”

“…아니야!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네가 살아돌아온 것은 기뻤다. 그곳이 위험한 곳이라는 소리는 들었으니까. 하지만 너는 충분히 재능이 있었고, 성훈이를 살릴 수 있었는데도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생각이 짧았다. 네게는 긴 시간이었지만 우리에게는 한순간이었으니까. 먼저 혼은 나야 한다고…….”

“혼? 혼이요? 장난하세요? 제가 해명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하시더니, 제 분을 못 이겨서 절연까지 하셨잖아요? 기껏 돌아왔는데 거부당한 제 심정은 아세요?”

남은주의 분노에 그녀의 아버지가 아차 한 표정을 짓는다. 한순간의 말실수. 하지만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분노하던 남은주가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오늘 온 이유는 제게 배신자라고 하신 분들께, 성훈이는 살려서 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어요. 직접 살려 온 것은 아니지만, 제가 성훈이를 배신하고 저 혼자 살자고 버린 것은 아니라는 거, 아셨으리라 믿어요. 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가 볼게요.”

“은주야, 잠깐…….”

“가요, 신후 오빠.”

“미안하다.”

이성훈이었다.

그는 90도로 허리를 꺾으며 말했다.

“기껏 도와줬는데, 가족이 큰 잘못을 했다. 정말 미안하다.”

“…네가 사과할 것은 없어.”

이성훈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고맙다. 네 덕분에 살아서 가족을 만날 수 있었어.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대신 해 줘서, 대신 지켜줘서 정말 고맙다. 진심이야.”

“…….”

남은주는 대답하는 대신 몸을 돌리더니 내 팔을 꽉 붙잡았다.

“…은주는 정말 노력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은주의 재능은 저기 있는 이성훈 씨 보다도 부족했습니다.”

내 말에 가족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재능이… 부족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지원이 없었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은주의 노력이 퇴색되는 것은 아니죠.”

지원을 해 줘도 안 되는 사람은 널렸다.

“은주는 언제나 목숨을 걸었고, 가장 위험한 곳에서 저와 함께했습니다. 공개된 영상, 보셨으면 아실 겁니다. 지금의 위치, 지금의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부단한 노력 덕분입니다. 자기는 죽고 싶지 않다고, 살아서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녀는 늘 그렇게 말해왔습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남은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두려워했다. 그러면서도 진짜로 도망친 적은 없었다.

“이성훈 씨 말대로입니다. 여러분은 은주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켜준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어떻게 본다면 목숨을 빚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인정을 받고 감사를 받으면 받았지, 적어도 이런 취급을 받을 사람은 아닙니다. 은주의 가족만 아니었다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만, 그만해. 오빠.”

“…….”

“이제 됐어. 가자. 응?”

남은주의 말에 나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금이지만 울고 있었다.

“…그래.”

나는 남은주의 팔을 풀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남은주는 다시금 내 팔을 붙잡아왔다.

“미안하다.”

“…….”

“마안하다 은주야. 내가 잘못…….”

“가요, 오빠.”

뒤늦게 이어지는 사과. 남은주는 사과를 받지 않았다.

* * *

“이대로 완전히 절연하게?”

“…모르겠어요.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용서 못 할 것 같아요.”

말은 그렇게 하는 남은주였지만, 영영 이 상태로 지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자리를 피한 뒤 남은주는 한참을 울었다. 서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듯, 정말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억울함을 풀고, 인정을 받았다. 그 사실에 감정이 폭발한 모양이다.

“오빠가 있어서 쉽게 말할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천만에.”

“오빠가 그렇게 말해줄 줄은 몰랐지만요.”

빨개진 눈으로 배시시 웃은 남은주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해요?”

“뭘.”

“애인 얘기요.”

“…….”

“저 이제 시집 못 갈 거 같은데, 어떻게 할 거에요?”

남은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 또한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책임질게. 결혼하자.”

남은주의 동공이 커진다. 설마 내가 장난을 받아 줄 줄은 생각지 못한 듯했다.

“…늦었어요? 안 놔줄 거예요?”

“그래 어디 한 번 잡아…….”

너무 가까운 거리였을까. 남은주였기에 방심한 것도 있었다.

남은주가 나를 끌어안았고, 나는 피하지 못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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