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에필로그 남은주>
“있을 거야… 있어야…….”
거인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난 뒤 탑에 갇혔던 인원이 복귀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현장에 남은주와 함께 나와 있었다.
‘살아 있으려나…….’
남은주가 찾아 헤매는 사람은 이성훈. 그녀의 오랜 친구였다.
나름 탑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친했고, 가족들끼리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현재 남은주는 그들과는 거의 절연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다. 정확히는 남은주가 배척당했다고 봐야 한다.
‘저 혼자 살자고 친구를 버렸다, 라…….’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높아진 남은주의 위치상 데려오려면 올 수 있었다는 사실과 탑에서 있었던 일들이 와전되어 들어갔는지 결국 남은주는 신뢰를 잃고 쫓겨났다고.
한동안 방황하던 남은주는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기도 전에 거인들과 맞서 싸워야만 했고, 극적인 활약 이후 몸을 회복하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성훈을 찾고 있었다.
미련 자체가 남은 건지, 아니면 가족들에게 자기방어라도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른다. 다만 그녀는 이성훈을 찾는 일에 같이 가 달라며 부탁을 해 왔고, 나는 그것을 들어 주었을 뿐이었다.
가장 친한 주하연은 지금 무척 바쁜 상황이었고, 나 같은 경우에는 주하연보다는 시간이 있었으니까.
‘가족들도 만났고, 거인들도 쓰러뜨리기는 했으니까.’
물론 위기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언제 거인들이 지구로 다시 올지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 다른 차원들을 구해주고 그들의 협조를 받아야만 했다. 다만 지금 당장은 연결된 차원이 없을 뿐.
아마 시간이 없는 만큼 몇 달 안에 새 차원과 연결이 될 테고, 그때가 되면 내가 나서야 할 터였다.
한참을 헤매는 남은주. 우리가 없는 사이에 열린 하층도 있었고, 아예 지금까지 중층에 도착하지 못한 하층도 있었다. 그런 하층들까지 차례로 열려버리자 아직까지 살아 있었던 어마어마한 수의 수련자들이 쏟아져 나온 것.
‘대체 몇 명이야?’
몇 장소에 나뉘어서 나오기는 했다. 가이아가 조치를 취해 주기는 했으니까. 다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십만 명은 넘을 것 같았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수가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물론 대부분이 하층에서 노예처럼 살던 이들이지만.
1회차 시절의 한국 마냥 무법자들이 층 자체를 점거하고 아예 발전할 가능성을 막은 채 왕처럼 군림하던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각국의 지원을 받은 인원들이 수련자들을 분류하고 있었고, 그렇게 나서던 이들은 가디언 소속 수련자들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한참 중층에 있던 수련자들이 소환된 곳을 뒤지던 남은주를 바라보며 나 또한 감각을 끌어 올리던 찰나였다.
폰이 울리며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성훈 찾았습니다. 3구역에 있습니다.
“…은주야. 이성훈 찾았다.”
“정말로? 어디, 어디래요?”
“3구역.”
“거기는 하층 소속 인원들이 소환된 곳이라고…….”
“하필이면 소환 당시에 하층에 있었나 봐. 중층에 연결된 하층도 하층 취급했나 본데.”
“빨리, 빨리 가 봐요.”
‘살아 있기는 했네.’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했다. 일단 그 험난했던 미국과 멕시코 쪽 하층에서 프레드와 같이 살아 나오기도 했고, 필요 없는 것을 던져준 것이기는 하나 무공을 배우기도 한 놈이다. 게다가 우연히 그 무공과도 나쁘지 않은 상성을 보이기도 했고.
급하게 3구역으로 이동하자 나와 남은주를 알아본 담당관이 우리를 이성훈에게 안내해 주었다.
내 언질 덕에 따로 빼놓은 듯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유신후 님. 오랜만입니다. …은주 너도 오랜만이다.”
이성훈은 다른 거대 길드들이 떠난 중층에서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은 듯 나름 나쁘지 않은 수준을 갖고 있었다.
‘벽을 넘었나?’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다. 마스터의 벽을 뜻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이군요.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전과 같은, 남은주에게 빌붙으려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긴장된 기색이기는 하지만 눈에는 자신감이 있었고, 대충 보이는 몸에는 이곳저곳에 실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한참 부족하기는 하지만, 벽 하나도 넘었고요. 다른 거대 길드들이 차례로 떠나고 난 뒤에는 고생 좀 했습니다만… 덕분에 마스터에 들 수 있었죠. 이게 다 길드에서 저에게 기회를 주신 덕분입니다.”
은혜를 입었다며 고개를 숙여오는 이성훈. 무공을 배웠을 때 감사를 표했던 그 모습이 변치 않은 모양이었다.
‘한때는 정말 귀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지.’
다시금 묘한 감흥이 들었다.
“게다가 제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이미 거인들이 처리되어서라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 가족들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런 이성훈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 정식으로 발표가 난 것은 아니지만, 이걸로 끝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여러 일이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마스터가 되면서 많은 것이 바뀐 듯했다.
하기야 이전처럼 남에게 의지하는 모습 그대로였다면 결코 벽을 넘을 수 없었을 터다. 무공을 배우고 난 뒤에도 꾸준히 노력한 모양이었다.
곧이어 이성훈이 남은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 내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네 덕분이었어. 나름 운이 좋기도 했지만… 그것도 다 너와 친했던 덕분이니까. 네가 아니었으면 결코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정말, 정말로 고맙다.”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이성훈. 그런 이성훈의 말에 남은주가 고개를 젓는다. 눈이 약간 젖어 있었다.
그것을 본 이성훈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야. 왜 울어? 미안해서 그래? 아냐. 거기서는 네 선택이 맞았어. 내가 그때는 상황이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그렇게 찌질하게 굴었던 거지, 시간이 지나니까 알겠더라. 네가 옳았어. 미안해할 필요 없어. 왜 울고 그래?”
남은주가 울먹이며 내 팔을 끌어안았다.
말은 정리했다고 했지만, 확실히 가족들에게 배척받았던 기억이 상처인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라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정신이 멀쩡하기는 힘들었을 거다.
뒤늦게 온 연락은 이미 상처받은 그녀 입장에서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연락을 무시했을 터. 만약 이성훈이 살아 돌아온다면, 그렇다면 당당하게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노라고 외칠 수 있기에, 설령 이성훈이 좋지 못한 일만을 겪으며 최악의 인간이 되어 그녀를 원망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당당할 수 있었을 거다. 일단은 살아왔으니까. 목숨 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정작 이성훈은 여러 일을 겪으며 성장한 모습이었고, 이전과는 다른, 오히려 더 뛰어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본인에게 되려 감사를 표한다.
나는 울먹이는 남은주를 가볍게 껴안아 주었다.
그러면서 당황해 하는 이성훈에게 작게 손짓하며 전음을 보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흠칫한 이성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전음까지 들려오니 더 당황한 듯했다.
조심스럽게 자리를 피하는 이성훈. 그 뒤로 남은주는 한참이나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며 울먹였다.
시간이 지나 마음이 안정되자 남은주는 방금 자신의 행동이 조금 창피했는지 붉어진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나는 그런 남은주를 보며 놀리는 대신 이야기를 돌렸다.
“이성훈은 잠시 다른 곳에 갔어. 집으로는 가지 않았으니 안심해. 같이 갈 생각이지?”
남은주는 안색을 바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같이 가 줄까?”
“…신후 오빠가요?”
남은주의 반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제외한 파티원들의 위상 또한 엄청나게 높다. 다만 그렇다고 한들 내 명성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신인 부터 시작해 가이아의 대리자, 가디언의 대표, 모든 수련자들 중 가장 강한 사람이자 가장 앞서서 거인들과 싸운 이가 바로 나다.
심지어 제소시아에서 내 위치와 명성, 대우까지 알려져 가는 상태.
지금 분위기가 수련자들에게 그리 좋지 않은 상황이기는 하나 나만은 예외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가이아가 직접 언급한 유일한 수련자다. 현존하는 신이 직접 대리자라고 말한 인간을 뒤에서라도 배척하기는 꺼려질 만했다.
내가 남은주를 신경 써야 할 정도로 그녀가 중요한 인물임을 안다면 가족들도 경거망동 하기는 힘들다.
그녀가 나와 사실상 튜토리얼부터 같이한 사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직접 보는 것은 또 이야기가 다르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남은주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같이 있으면 힘이 될 것 같아요. 부탁해도 돼요?”
“얼마든지.”
완전히 진정한 남은주는 이성훈을 불러 과거 사정을 알려주었다.
“…뭐? 배척? 최전선에서 싸우는 사람을… 배척했다고? 배신자?”
이성훈은 남은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이게 뭔… 그거 진짜야? 어머니랑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고?”
“…아저씨랑 아주머니뿐만이 아냐. 우리 부모님도 똑같이 말했어.”
“…미친.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이성훈은 진심으로 분노하는 듯했다.
“아니, 알지도 못하면서… 애초에 알고 지낸 기간이 얼마인데! 어떻게 그런 소리를…….”
이성훈은 분노하면서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기껏 남은주에게 네 덕에 살았다고 말하자마자 듣는 소리가 정작 본인 때문에 남은주가 냉대를 받았다는 소리였으니까.
“…미안하다. 설마 네가 그런 취급을 받을 줄은 몰랐어. 진짜 미안하다. 할 말이 없다.”
이성훈은 남은주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지 마. 괜찮으니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냐. 그분들은… 직접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겪어보지 못하면, 이해하기는 어렵지.”
자기 자식의 생사가 불분명해진 상황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곳에서 만난 친구가, 지위도 권한도 충분히 있어서 살려서 데리고 올 수 있는 사람이 정작 그런 친구를 방치한 채 나왔다고 한다면 화가 날 수밖에 없기는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지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이자 그 지옥 같은 탑을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그딴 식으로 말을 하면 안 되었지만.
만약 진짜 남은주가 중층에서부터 이성훈을 보호했다면 중층에서 그녀의 활동이 제약되었을 거고, 이후 상층에서도 영향을 크게 미쳤을 터였다.
정말 그랬다면 지구에서의 활약도 불가능했을 거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정말 아냐… 하… 진짜…….”
이성훈이 허탈하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가자. 내가 직접 해명할 게. 꼭 사과받아낼 테니까.”
이성훈은 진심으로 보였다.
그게 맞는 일이기도 하다. 도리나 감정적인 것을 떠나 실리적인 것을 고려해 봐도, 나와 남은주와 척을 지는, 아니 그냥 단순히 연이 끊기는 것만으로도 저들에게는 큰 손해다.
이성훈은 그런 것까지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그가 홀로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런 취급은 아니지.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저런 대우라니…….”
직접 전선에서 싸우며 그간 우리가 한 고생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몸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이성훈이 3구역을 빠져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의 보증이 있기도 했지만, 하층에 간 이유부터가 무법자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거대 길드들이 떠난 이후 황제 아래에서 활동했다고.
나름 명성도 있었는지 다른 수련자들도 알아볼 정도라 설령 우리의 보증이 없었더라도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 터였다.
우리는 준비해 두었던 운송 수단을 이용해 텔레포트 게이트로 이동했고, 곧바로 한국으로 향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