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오롯이 그에게만 역할을 맡길 생각은 없습니다.”
“확실히 내 이름을 딴 길드에는 인재가 많기는 하지. 하지만 그뿐이다. 탑이 개방되어 탑을 졸업하지 못한 수련자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런 육성 기관을 따로 만들 수 있습니다.”
“…뭐라? 설마 탑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더냐?”
“비슷합니다. 탑보다는 명백히 떨어지는 수준일 테지만… 신생 차원이 0에서 시작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인간들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아키밀리는 마수 저장고로 사용되던 자신의 차원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 제 차원은 탑에서 한 구역의 층으로 사용되었었습니다. 저는 나름 플로어 마스터로 활동했었고요. 그때의 경험을 이용하면 탑보다는 모자라도 제법 수준 있는 수련장은 만들 수 있습니다.”
일종의 사설 탑이라고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좋은 방법이에요. 제 차원의 기술들을 제공해 드린다고 해도, 인간들의 수준이 높아지기까지는 몇 세대 이상 걸릴 텐데…….”
그럼에도 거인들과는 대적하기 힘들다.
“그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겁니다.”
“…확실히…….”
탑처럼 시간 비율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확실히 도움은 된다.
게다가 그런 방식을 쓴다면 아키밀리의 차원이 단순히 기생하는 곳만은 아니게 된다. 본인 차원도 성장할 수 있을 테고. 확실히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나 나서윤 같은 존재가 탄생하기는 힘들 거다. 하지만 그곳에서 성장한 이들을 타 차원의 구원군에 포함시켜 꾸준히 성장을 도모한다면?
다른 차원과 연결될수록 많은 기술들이 오갈 테고, 그러면 그들의 발전 속도 또한 빠르게 증가할 터다.
모두의 시선이 가이아를 향한다.
한참을 생각하던 가이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보다 나은 방법은 없겠구나. 손 놓고 멸망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확실히 이게 낫겠지. 해 보자꾸나.”
가이아의 대답. 그리고 이 시점을 기준으로 지구는 격변하기 시작했다.
* * *
거인을 완전히 물리쳤다는 말에 세계는 환호했다. 그리고 쓸모가 다한 수련자들은 경계의 대상이 될 뻔했었다.
한 번 그런 일이 있다면, 다음도 있다. 그리고 현대의 무기가 잘 통하지 않는 다른 차원까지 존재한다. 그런 만큼 지구 쪽 세력인 우리를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이미 우리가 보여준 힘 때문에 수련자 자체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당연하게도 정면에서 그런 말을 입에 담는 이들은 없었지만, 알게 모르게 수련자들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가이아교가 지구 전체에 퍼져 나가고 있음에도, 그러한 상황이다.
나는 그런 수련자들을 불러모은 뒤, 현재 상황을 자세하게 알렸다.
“…그렇군요. 역시… 조금 늦었었나…….”
“젠장, 또 그런 이들이 온단 말입니까? 다음에는 더 강해진 힘을 갖고?”
“…환장하겠네요.”
톰 뮐러와 크리스토퍼, 엘리자베스 공주가 차례로 반응한다.
다들 말은 하지 않지만 대소동이한 표정이었다.
저 엘리자베스 공주가 조금 거칠게 말을 할 정도였으니까.
“물론 대비는 할 생각입니다. 이후 빠르면 몇 개월, 길어도 최소 년 단위로 한 개의 차원은 꾸준히 지구와 연결이 될 겁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곳의 침략자들을 물리칠 겁니다.”
“그들과 힘을 합치는 건가요?”
“도움이 됩니까? 저희 도움을 받는 이들인데…….”
“레고스트 님과 성군을 생각하면 큰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합니다. 신후 님과 가이아 님도 그쪽을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토퍼의 말에 야마모토가 차분하게 반응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더불어 저희가 성장도 하고요. 그리고… 지구에 탑과 비슷한 것이 생길 겁니다.”
“…탑이 또 생긴다고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엘리자베스와 톰 뮐러가 난색을 보인다.
그들 뿐만이 아니다. 과거 탑에서의 기억이 떠오른 듯 많은 수련자들이 질색을 해왔다.
“당연하게도 그 탑과는 다릅니다. 언제든 나올 수도 있구요. 그리고 저희는… 그곳에 교관으로 가게 될 겁니다.”
전부는 아니다. 일부만 갈 뿐. 새롭게 성장할 지구인들의 안전을 위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처럼 말도 안 되는 희생을 당할 필요는 없지. 묻힌 재능이 한둘이 아닌데…….’
정말 대단한 인재들이 수련의 탑에 묻혔을 터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울 정도.
나는 아키밀리가 계획했던 사설 탑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저희 수련자들을 제외하고 재능 좀 있는 지구인들을 성장시키기 위한 학교…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되는 건가요?”
“맞습니다.”
실력이 부족한 수련자들이 추가로 훈련 해도 나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지간한, 중층에 도착했던 수련자들은 큰 도움을 받기 어려울 터였다.
“좋네요. 안 그래도 사람들이 수련자들을 배척하는 분위기라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했는데…….”
“그렇게 도움을 주고 이미지 좋게 만들려고 해도 안 됐었는데… 확실히 저들도 여기에 낄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기는 하겠군요. 사제처럼 내려주는 힘도 아니니까요.”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기껏 목숨을 걸고 거인과 싸웠더니 결과가 경계와 배척이다. 물론 아닌 이들도 있었지만,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적이 있어야 비로소 인정을 받는다니… 거 참…….”
우중충한 분위기. 그런 분위기를 엘리자베스 공주가 나서서 깨뜨렸다.
“한 번 이겼는데, 두 번 못 이기겠어요? 다음번에는 저희도 더 큰 힘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하긴 다른 사람들 생각하기 전에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지. 우린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사실상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희망을 품는다.
“뭐, 쟤들도 직접 힘을 얻어보고 싸워 보면 알겠죠. 지들도 겪어 봐야지.”
“유신후 님. 교관 지원 자격이 어떻게 됩니까? 직접 굴려보고 싶은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고, 나는 그들에게 이후의 일정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렇게 몇 달 뒤, 지구에 새로운 차원이 연결되었다.
기껏 모은 힘을 털어 넣고 브리니아의 도움까지 받아 가이아가 재차 지상에 강림했다. 한 번 강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고, 한 차례 이미 강림한 적이 있었던 만큼 큰 손실을 보는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필요한 상황이었다.
가이아는 이곳이 언제나 침략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리며 새롭게 연결된 차원을 돕고 그들과 연계할 것을 주문했다.
―언젠가 거대한 위협이 닥칠 것이다. 그날을 대비하라.
가이아의 말에 세계는 혼란에 빠졌다.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나는 가이아의 대리자라는 입장을 내세우며 적당히 사실을 알려주었다.
―거인의 침공이 끝난 것은 아니다. 우려했던 대로, 한 번 있었던 일은 두 번 있을 수 있다.
―다른 차원과의 연결은 새로운 동맹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우리가 그들을 돕는다면 그들은 기꺼이 미래에 우리의 힘이 되어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차원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
이 말과 함께 나는 가디언을 통해 공식적으로 지구인들이 수련할 수 있는 새로운 ‘탑’에 대해 발표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너도나도 탑에 지원하기 위해 달려들었고, 조금이라도 자국 출신의 수련자를 늘리기 위한 각국의 로비가 잇따랐다.
하지만 우리의 방침은 확실했다.
초기에는 재능과 동기, 의지가 강한 이들을 우선해서 뽑을 요량이었다.
‘시간이 생각보다 넉넉하지 않으니까.’
수십 년은 길다고 볼 수도 있었다. 나와 내 길드원들 같은 경우 성장하는 데 걸린 시간은 10년이 채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저건 진짜 수련의 탑도 아니고, 우리들처럼 저들이 절실하기도 힘들다. 시스템이 있기는 하나 수련의 탑처럼 보조의 역할보다는 현상 파악에 우선을 두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만한 보정을 주는 시스템을 구축, 유지하는 것은 거대 차원도 힘든 일이다.
괜히 그들이 수련의 탑에서 수련자들을 빼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삼 탑이 얼마나 대단한 공간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지구의 모습은 빠르게 변화해갔다.
수 많은 사람들이 마력을 다루기 시작하자 과학과 마법이 연계되고 마법 공학이 등장했으며, 연금술이 부활했다. 동시에 탑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지구의 전력은 매년 빠르게 강해져갔다.
더이상 수련자들은 배척받지 않았고, 매년 여러 차원이 지구와 연결되었다.
지구는 어느 순간부터 여러 차원의 중심이 되어갔다.
위기에 외면받는 차원들의 수는 많았고, 가이아는 개중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차원들을 신중하게 뽑았다.
그렇게 연결된 차원에는 초기 우리 가이아 길드를 중심으로 몇몇 거대 길드들이 포함되어 파견되었다.
년에 많게는 세 번. 적게는 한 번 정도 타 차원의 구원을 위해 파견되었다. 모든 차원의 위기를 구해냈으며, 우리들의 명성은 지구를 벗어나 여러 차원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연결된 차원과의 교류는 언제나 활발했고, 그들을 통해 지구는 더더욱 발전해갔다.
파견이 없는 날은, 언제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르자 차차 내가 직접 파견 가는 일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차원은 길드원들이 주로 파견되었으며, 다른 거대 길드 및 아키밀리의 탑 출신 수련자들의 비율이 점점 높아져갔다.
끝 없는 성장. 시간이 갈수록 지구의 세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 * *
수십 년 뒤.
지구의 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 그 명성이 전 차원으로 퍼져 나가고, 지구의 이름이 둥지에도 도달했을 때, 거인들은 과거 자신들과 지구가 한차례 연결된 적이 있어 그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다.
추후 확실히 거대 차원이 될 곳으로 손꼽히는 지구. 거기에 연결된 백여 개를 훌쩍 넘는 차원을 모조리 먹어 치울 기회가 있다는 사실에 거인의 왕은 흥분한다.
거인들의 왕은 즉시 가이아를 침공할 것을 지시했으며 선발대가 과거 차원 좌표를 되짚어 지구에 도달했을 때, 그들이 목격한 것은 끝없이 펼쳐진 지구의 군세였다.
과거의 작은, 잠재력만 높은 소규모 차원이었던 지구가 아니었다. 연결된 차원이 늘어나고, 차원 자체가 성장한 지구는 거인들도 쉬이 침공할 수 없는 거대한 세력이 되어 있었다.
“정말 오기는 왔네요.”
“근데 늦었어. 오빠, 저거 예전 오데르 친위대 수준은 되는 것 같아. 그때는 정말 강해 보였는데.”
“지금은 어림도 없지. 길드장 님. 어떻게 할까요?”
“치워버립니다. 저들이 침공할 의지를 꺾어버리세요.”
“근데, 형, 그거 진짜 할겁니까? 둥지 침략.”
“…지금은 아직 안 돼. 하지만… 계속 이렇게 성장한다면 안 될 것도 없지. 몇몇 거대 차원들도 끌어들인다면… 가능할 거다.”
“그거 기대되는군요, 스승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말 좀 편히 해 주십시오. 부담됩니다, 스승님.”
거대한, 거인들의 침략 세력인 둥지.
선발대로 파견된 거인들은 여유만만한 지구의 세력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한다.”
“대장님?”
“둥지는 현재 이곳을 칠 여유가 없다. 저들은 이미… 어지간한 거대 차원 수준의 전력을 갖고 있어. 모두 후퇴한다.”
“그렇지만…….”
“책임은 내가 진다. 빨리 도망쳐!”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유신후.”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지구에 발을 디딜 때는 그만한 각오를 해야지. 이건 경고다. 지구를 침략할 생각은 접는 것이 좋아.”
그의 손짓에 수많은 이들이 달려든다.
동시에 처음 보는 형태의 무기들이 거인들을 향해 쏘아졌다.
“이곳은 우리의 땅이거든.”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