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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303화 (303/317)

303화

<거대 차원, 지구>

내 상대를 맡았던 거인을 압도하며 사실상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은 순간이었다.

다른 곳에서 일어난 전투가 일방적으로 밀려버렸다. 내 길드원들의 수는 제한되어 있었고, 과거 바다라는 환경상 사용이 제한되었던 모든 마수까지 소환해 보았으나 한계는 명확했다. 푸르게 빛나는 거인들이 문제였다.

그나마 과거 중층에서 랭커였거나 그에 근접한 이들이 있는 곳은 제법 버티는 편이었으나 그런 이들이 없는 곳 몇 군데는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상대를 무너뜨린 거인들은 다른 곳을 습격하는 대신 나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버티는 것이 우선인 이상, 다른 곳을 도와 결사대의 숫자를 줄이는 것보다 나 하나를 막는 것이 이익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게다가 푸르게 빛나는 거인의 수는 얼마 되지도 않는 만큼 지금 나를 막는 놈이 없다면 추후 나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짜증 나네.’

나를 막기 위해 지원온 거인들이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레고스트와 그 일행이 그런 나를 보고 돕고자 했으나 자신들을 상대하는 거인이 쉽게 놔주지 않고 있었다.

“조심해라! 보려고 하지 마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마! 감각을 최대한 열고 방어에만 치중해!”

나를 상대로 죽기 직전까지 갔던 거인이 빠르게 충고한다.

확장된 감각을 믿으며 일대의 마력을 감지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거인들을 보며 나는 주변 마력을 모조리 지배해 그 감각을 망가뜨리고 한순간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상대의 눈을 속였다.

저 푸르게 빛나는 놈쯤은 되어야 본능적으로라도 막을 수 있는 거다. 이들은 내 공격을 막을 수조차 없었다.

콰직.

“끄어어…….”

한 거인의 등허리를 끊어내고 탐욕이 그 내부를 단숨에 헤집는다.

그런 나를 뒤늦게 발견한 다른 거인이 나를 죽여보겠다고 무기를 휘둘러 왔지만, 나는 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탐욕을 휘둘러 주었다.

“안 돼!”

푸른 거인의 비명. 하지만 늦었다.

정면으로 내리친 내 공격은 상대의 강기와 무기를 그대로 분쇄하는 것으로 모자라 그대로 상대의 몸을 두 동강 내 버렸다.

경악하는 거인들. 나는 그 틈에 다른 거인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고, 푸른 거인이 급하게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크아아악!”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외치며 푸른 거인이 필사적으로 공격을 막아낸다.

하지만 그뿐이다. 저항하고 있기는 하지만 무너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남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얼마간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익숙한 신성력이 일대를 휩쓴다.

‘브리니아?’

그리고 일순간. 모든 거인의 기세가 눈에 띌 정도로 약해져 버렸다.

어떤 상황인지 단번에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기회라는 것 정도는 알았고 나는 단숨에 당황한 거인들을 쓸어버렸다.

‘버프가 끊겼군.’

부여잡은 이성의 끈 사이로 과거의 기억이 얼핏 스쳐 간다.

공간 계열 공격이 모조리 막혔고 동시에 오데르의 버프가 모조리 끊어져 버렸다. 성군과 성녀 애니디가 상상 이상으로 도움이 되었다.

푸른 거인들이 다시 본 상태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버프가 끊겼기 때문에 그 힘이 크게 깎여나간 것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마력의 눈동자가 보여주는 광경 덕분에 나는 그들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 곧 죽겠군.”

“…네놈들… 도대체 무슨 짓을…….”

나를 상대하던 푸른 거인이 몸을 떨며 중얼거린다. 그를 지원 왔던 거인들은 버프가 끊기기 무섭게 모조리 죽임을 당했고, 푸른 거인은 그 생명력이 불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상태였다.

버프가 생명이 불타는 속도를 줄여주고 있었던 것. 그게 끊기자 심각할 정도로 빠르게 푸른 거인의 명이 다하고 있었다.

저런 상태라면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즉시 몸을 돌려버렸고, 푸른 거인은 그런 내 의중을 눈치챈 듯 나를 막기 위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전보다 확연히 느려진 속도에 불과했고, 그 또한 무거워진 자신의 몸에 순간적으로 적응하지 못했는지 효과적인 공격을 해오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나를 붙잡지 못했고, 나는 전장을 가로질러 오데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됐……!”

오데르가 환희에 찬 표정으로 몸을 돌린다. 그리고 내 탐욕이 그런 오데르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내 접근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컥, 커흑!”

뒤늦게 오데르가 붉은 피를 토한다.

가슴을 관통한 강기가 오데르의 내부를 휘저었고, 오데르는 끔찍한 고통에 몸을 경련했다.

오데르가 무너지며 무릎을 꿇었고, 동시에 눈에서 생기가 천천히 빠져나간다.

“오데르 님!”

거인들의 비명이 공동에 울린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젠장……!”

애매한 크기의 구멍이 보인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로 작기는 했지만, 저것은 분명 차원의 문이었다.

“크, 크하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는구나……. 조금만, 조금만 빨랐어도…….”

오데르가 힘겹게 중얼거린다.

“재앙이 올 것이다. 애매하게 열렸지만, 분명 연결은 되었으니… 늦더라도 둥지는 이 문을 알아챌 터. 그때 비로소 이 문이 완벽해질 것이며, 아무리 버티려고 해도 너희는 우리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오데르가 죽어가며 저주의 말을 내뱉는다.

그의 죽음이 코앞에 닿았음을 아는지 거인들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지만 입장이 바뀐 결사대원들은 그들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그들이 이쪽으로 접근할 수 없도록 막아내었다.

“일단… 닫아야겠군.”

“크하하! 멍청하구나, 인간아. 이것은 둥지와 직접 연결된 문이다. 거인도 아닌 관리자 따위가 이 문에 간섭했다가는 둥지가 바로 알아챌 터. 네놈들의 죽음을 앞당기는 것에 불과하다!”

“…거인이 닫으면 상관없다, 그 말인가?”

내 말에 오데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허탈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아… 재기가 눈앞에 있었거늘… 다시금, 다시금 둥지에서 내 이름을 우뚝 세울 수 있었거늘… 아쉽구나, 너무도 아쉬워…….”

실패한 주제에 재를 뿌리고 죽어가는 오데르. 그런 오데르를 바라보며 안 그래도 흔들리던 이성이 완전히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나는 즉시 몸을 정화하고 혈신의 갑옷을 잠재웠다.

폭주하던 본성이 조금씩이나마 잠잠해지는 것을 느낀다. 한결 머리가 편해지기 무섭게 나는 탐욕을 들어 생이 꺼지기 직전인 오데르의 가슴을 한 차례 더 찔렀다.

“크억…….”

그런 내 행동에 아직 죽지 못한 거인들이 비통해한다.

“그분을 모욕하지 마라!”

한차례 몸을 바르르 떨던 오데르는 끝까지 나를 향해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지껄였다.

“네… 놈… 어떻게…….”

“제대로 빼앗았군.”

오데르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고, 그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쿵.

나는 앞으로 쓰러지는 오데르를 가볍게 피했고, 탐욕에 감각을 집중했다.

‘…3일? 그 정도인가…….’

내가 힘을 보태준다면 짧은 시간 안에 소화시킬 수 있을 거다. 검에 힘을 더해주는 꼴이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긴급 상황이었다.

탐욕이 강탈한 힘은 오데르의 차원을 다루는 능력이었다. 이것을 사용한다면 저 문을 자연스럽게 닫을 수 있을 거다. 그 시간 동안 이곳을 지킬 필요는 있었지만.

나는 몸을 돌려 거인들을 바라보았다.

오데르의 죽음에 복수를 부르짖으며 날뛰는 거인이 있는가 하면, 절망에 빠진 이 또한 있었다.

버프가 끊기기 무섭게 나서윤을 비롯한 내 길드원들이 날뛰며 저들을 처리하고 있었고, 남은 거인의 수는 어느새 한자리에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그들을 돕기 위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 * *

“끝내 열리고 말았구나…….”

“하지만 닫았습니다. 결국 이곳을 넘어온 거인은 없습니다.”

나는 가이아와 브리니아, 그리고 아키밀리와 함께 가이아의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늦었다. 우연도 아니고, 이쪽에서 그쪽으로 명확하게 의사를 갖고 문을 열었다. 둥지는 언제나 타 차원을 침략하는 곳이라 문이 수시로 열리는 곳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눈치챌 터. 당장 목표는 되지 않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거인들이 재차 침략해 올 것이다. 그때는… 규모가 다르겠지.”

“…언제쯤 쳐들어오는 겁니까?”

“정확히는 모른다. 그래도 수십 년은 걸리겠지. 이곳이 작기도 하고, 그들이 당장 치르고 있는 전쟁도 한둘이 아니니… 알아채는 데 필요한 시간도 있고 말이다. 그래도, 설령 운이 따라 준다고 하더라도 100년은 넘지 않을 거다.”

가이아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시간은 많이 벌었군.’

“대비를 해야겠군요.”

“…격이 다르다. 둥지를 따라잡을 수는 없어.”

“만만한 차원이 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가이아 님.”

굳이 우리가 둥지보다 강해질 필요는 없다. 브리니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브리니아의 말에 가이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거대 차원이 될 가능성이 있는 곳이에요. 저희가 거대 차원이 된다면 저들도 쉽게 손대지 못할 거예요. 아시다시피, 거인은 언제나 전쟁 중이니까요. 그들은 어지간해서는 거대 차원에 손대지 않아요.”

“잠재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지구가 수십년 만에 거대 차원이 될 수는 없다. 알고 있을 텐데, 브리니아?”

“방법이 없지는 않죠.”

“…나더러 거인들처럼 식민지라도 만들라는 이야기더냐?”

“아뇨. 그게 아니에요. 다른 거대 차원들이 하는 방식을 따라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제가 가이아 님의 계약자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요.”

“…여러 차원과 연결되라는 말이구나. 그들을 휘하에 넣으라고. 그에 따른 위험은 알고 있을 텐데?”

“그 어떤 차원이 거인들의 둥지만큼이나 무섭겠어요. 그런 곳은 몇 군데 되지 않아요. 그건 피해서 도움을 줄 차원을 선별해야겠죠. 아시다시피, 여기 계약자 님은 홀로 마왕도 잡을 수 있는 수준이에요. 어지간한 거대 차원의 최상위 영웅들과 비교해도 나으면 나았지 부족하지는 않으시죠. 그러니 가능해요.”

“…….”

브리니아의 말에 가이아가 침묵한다.

아무리 타 차원과의 연결이 표적이 커지는 행위라고는 해도 이미 거인들의 표적이 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살기 위해서는 강해지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시다시피, 저희처럼 거대 차원이 외면하는 곳은 생각보다 많아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 이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어요. 작지만 많이 모이면 분명 큰 힘이 될 거예요.”

“우리의 도움을 받으려 하겠느냐. 우리는 거인의 표적이 된 차원이다.”

“하지만 한 번 막았죠. 그리고 저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들이에요. 아예 망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연명하고 싶겠죠. 낮은 가능성이라도 붙잡을 이들은 생각보다 많을 거에요. 그리고 계약자님의 실력을 본다면 자포자기하지는 않을 걸요?”

이게 다 내가 있기 때문이라고 브리니아가 가볍게 웃음 지었다.

“…너는 괜찮겠느냐. 기껏 얻은 안정이다. 짧더라도 가족들과 평온한 시간은 보낼 수 있을 거다. 그 시간을…….”

“괜찮습니다.”

가이아를 향해 나는 입을 열었다.

“어차피 하지 않으면 죽음뿐입니다. 100년이 지나더라도 저는 현역일 텐데, 또 거인들에게 당해줄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 차원이 강해진다면 언젠가는 되갚아줄 수 있겠죠.”

그랜드 마스터만 되어도 수명이 200년이 넘는다. 아마 나는 더 길 터였다.

“…되갚는다니… 설마…….”

“뭐, 그쪽만 저희 위치를 알게 된 것은 아니니까요. 아주 먼 미래가 되기는 하겠습니다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살아 생전에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오데르처럼 탐욕의 힘을 이용해 차원을 넘을 수 있게 되었다.

마검이 그 힘을 소화하기 무섭게 내게 덤벼들었지만,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고, 덕분에 그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문을 만드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일이다.

내 패기 가득한 말에 가이아가 멍한 표정을 지었고, 브리니아는 못 말린다는 듯, 하지만 당신답다며 가볍게 웃어 제꼈다.

“하기야, 오데르를 막는 것부터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는 했죠. 그걸 이루신 분의 말이니 무시하기 힘드네요.”

“…어쩌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제껏 조용하던 아키밀리가 입을 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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