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구어어어어!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함께 왕자와 그를 호위하는 둘을 제외한 모든 거인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초기의 대응 진형이 단숨에 무너진다. 그러나 우리도 만만한 이들은 아닌 만큼 각자 4차 전직을 통해 연결된 길드원들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후열에 대한 방비를 철저하게 한다. 이전과는 다르다. 적의 수가 왕창 늘어난 만큼 후열은 있으면 좋은 존재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지원이 없다면 이기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소식은 들어갔겠지만… 지원은 없겠군.’
지원 받은 공군에 이상 사태가 일어난 것 정도는 파악했을 거다. 이쪽을 관측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 상황 파악 자체는 금세 끝날 터. 하지만 그게 다일 거다. 지금 당장 태평양 한가운데로 지원이 올 수는 없었다.
‘이런 것은 예상에 없었는데…….’
경로상 마주칠 일은 없어야 했다. 설마 이런 엉뚱한 곳에서, 그것도 왕자를 마주친데다가 뜬금없는 방법으로 제 친위대를 소환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위기 상황.
그나마 바다 위에서 싸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다행인 상황이었다. 마스터 최상급, 4차 전직까지 마친 이들도 있는 우리가 물 위에서 싸우는 것이 마력은 소모되더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마법사들 같은 경우에는 동시에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 바다 일부를 얼림으로써 지지대를 만들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환경적으로 이쪽이 불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분명 불편하고, 방해된다. 저쪽도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비교적 이쪽이 더 손해였다.
나서윤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거인을 향해 마법을 사용한다. 손을 가볍게 휘젓자 아이스 코어가 완성되고 곧이어 수많은 스피어 계열의 마법들이 여러 속성이 더해져 공간을 점유한 채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의 마법 저항을 믿는 듯 얼굴만 가린 채 달려들려던 거인을 향해 오데르가 소리쳤다.
“막지 말고 피하라!”
그 말을 듣기 무섭게 거인이 몸을 회피한다.
약간 늦어 전신에 생채기가 났지만 그뿐이었다.
그런 자신의 몸을 보며 거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자신의 마법 저항이 뚫릴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알고 있었나…….’
하기야 자신을 그냥 단순한 지배자로 보지 말라는 말을 하기는 했었다. 다른 거인들은 몰라도 오데르는 여기 있는 대부분의 전투 방식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듯했다.
‘마법 쪽 위력도 알고는 있겠군.’
아니나 다를까 오데르의 외침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최대한 따로 움직여라! 인간이라고 얕보지 말도록! 뭉쳐서는 안 된다!”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오데르의 지시를 친위대는 명확하게 따르기 시작했다.
“후열을 노려라! 저들이 쉽게 마법을 사용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냥 마법이 아니다!”
틈을 노린 거인이 공간을 비틀려 하는 순간이었다.
신성력이 전장으로 퍼져 나가면서 공간 계통의 공격이 봉인 당한다.
주하연의 안정화가 제대로 펼쳐진 것. 대신 주하연은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그 이상의 지원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최고의 표적이 되어 버린 것. 이쪽에서야 공간 계열 공격을 사용할 수 있는 인원이 나와 나서윤 정도다. 하유진과 한바다 같은 경우에는 감은 잡았지만 완벽하게 활용은 할 수 없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에 반해 저쪽은 전원이 3등위. 공간 계열이 봉쇄된다면 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저 여자다! 저 역겨운 힘을 사용하는 인간을 가장 먼저 죽여라!”
성군이 이미 사용했었기 때문일까. 오데르는 곧바로 원인이 주하연인 것을 알아채 버렸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한 길드원의 외침. 당연한 소리다. 우리가 쉽게 길을 열어줄 턱이 없었다.
현재 파견된 일부를 제외한, 한국 소속 길드원 대부분이 함께하는 만큼 전사가 300에 마법사는 400을 넘기는 수였다. 그들 중 반이 안 되는 숫자가 4차 전직을 마친 이들이다. 이 정도 전력이면 안정화가 펼쳐진 지금, 그렇게까지 불리한 상황은 아니어야 했다.
‘바다만 아니면…….’
몇몇 거인들이 물속으로 잠수한다.
“사샤!”
“뒤쪽을 노릴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최상급 정령, 정확히는 등급 외에 해당하는 정령이 된 사샤는 물속으로 접근하는 거인들을 철저하게 방해하고 막아내었다.
나연은 길드원들 중 유일하게 환경의 영향을 긍정적으로 받고 있었다.
결국 사샤에게 밀려 다시 수면위로 나타나는 거인들에게 길드원들이 꾸역꾸역 달라붙는다.
성군의 힘이 있거나 하다못해 육지이기만 했더라면 피해가 있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바다인데다가, 왕자급 거인의 버프를 받는 3등위 거인의 힘은 이전 상층에서 보았던 이들과는 그 수준 차이가 명확했고, 정예 중의 정예인 이들은 길드원 열 명 가까이가 달라붙어야 하나의 거인을 막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버티는 수준. 이대로 시간이 끌린다면 결국 무너지는 것은 우리 길드원들이 먼저였다.
거인들은 호시탐탐 후열을 노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나마 4차 전직을 한 길드원들이 기를 쓰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 시간 끄는 것조차 힘들었을 터였다.
“멈추라!”
“도망치는 거냐!”
나는 나를 상대하기 위해 붙은 두 명의 거인을 적당히 상대하며 균형이 무너진 곳 위주로 지원을 하고 있었다. 내 수준을 짐작한 오데르가 최고 수준의 전사를 내게 붙이기는 했으나 나는 그를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대신 적당히 상대하며 다른 길드원들을 지원했고, 내 방해가 거슬린 오데르는 결국 거인 하나를 내게 더 붙여버렸다.
‘슬슬 어려운데…….’
혈신의 갑옷과 에고 웨폰의 능력은 거인 하나를 적당히 상대하기 어렵지 않았으나 둘이 되어버린 상황에 더는 적당히 상대하기가 쉽지 않아졌고, 슬슬 아군을 지원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저쪽을 무너뜨려야 한다. 지금 상황에 시발점이 내가 되는 것은 어려웠다.
그때였다.
“토네이도!”
최상급 마법 토네이도. 그러나 이연솔이 사용한 것은 단순한 토네이도가 아니었다. 합동 마법에 속성 하나를 더 추가한 것. 토네이도는 단숨에 주변의 물을 빨아들이며 거대한 용오름이 되어버렸다. 용오름 내부에는 바다 일부가 얼어붙어 날카로운 얼음 파편을 형성했고, 내부에서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목표는 오데르.
저쪽이 우리 마법사와 주하연을 노리듯 마법사들 또한 오데르를 저격했다.
“크하아아아!”
거대한 괴성과 함께 오데르를 지키던 두 거인이 앞으로 나섰다.
두 거인의 무기에서 거대한 힘의 흐름이 느껴진다. 공간 계열 공격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저들은 각자가 3등위의 전사 거인이다.
하지만 저것은 합동 마법이다. 고작 둘이서는 막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오데르 님을 위하여!”
두 전사의 힘의 흐름이 거칠게 마찰하는 듯하더니 일대의 마력을 무지막지하게 빨아들이며 빠르게 섞이기 시작한다. 곧이어 두 흐름은 거대한 하나의 흐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거대한 용오름과 그대로 충돌한다.
쿠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힘의 격돌. 힘 자체는 용오름이 우세했다. 하지만 두 거인은 정면으로 안 된다는 것을 파악하기 무섭게 힘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용오름이 목표를 잃는다. 단숨에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버린 용오름. 그 주변에서 싸우던 거인과 길드원들이 재빨리 자리를 피해버렸다.
휩쓸리면 죽는다.
용오름과 부딪친 두 전사의 몸은 멀쩡하지 못했다. 분명 몸 곳곳에 큰 상처가 보였고 일부는 치명상이었는지 다량의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천천히, 천천히 몸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왕자가 주는 버프 자체가 재생력까지 올려주는 모양이었다.
아마 다음 마법 또한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멜리아가 있거나 나서윤이 마법 지원을 할 수 있었다면 오데르를 직접 노릴 수 있겠으나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인의 수를 먼저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목표를 바꾸세요.
“네!”
내 전음에 이연솔이 빠르게 대답한다.
마법이 실패로 끝났다. 한차례 힘겨워진 전투. 길드원들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었다. 더 이상의 지원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 무섭게 나는 두 거인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드디어 덤비는 거냐!”
“오데르 님의 영광을 위하여!”
짜증날 정도로 내게 따라붙었던 이들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나를 향해 무기를 휘두른다.
나 또한 정면으로 검을 맞부딪쳐 갔고, 서로의 무형 강기가 허공에서 충돌한다.
꾸웅.
일대의 공기가 강하게 밀려난다. 충돌의 결과는 이쪽의 우세였다.
설마 둘의 공격을 그대로 밀어버릴 줄은 몰랐는지 한 거인이 크게 외친다.
“경계하라 하실 만하구나! 좋다, 어디 누가 이기는지 제대로 해 보자!”
나는 거대한 강기를 줄이고 늘리며 둘을 동시에 견제하여 서로가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틈이 만들어지기 무섭게 혈마법을 뿌려대었고 기회가 있다면 빈틈을 노출하는 한이 있더라도 달려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한 내 빈틈을 보고 달려드는 거인을 에고 웨폰이 틀어막는다.
설령 막지 못해 상처를 입어도 상관없었다. 불사의 육체와 본 차원으로 돌아옴으로써 강해진 가이아의 신성력은 자잘한 상처 따위는 한순간에 재생해버린다. 치명상만 피할 수 있으면 충분했고, 에고 웨폰은 치명상만은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하지 않았다.
두 거인을 동시에 밀어붙인다. 3등위 둘이라고는 하나 공간 계통을 쓸 수 없다면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밀어붙이며 내심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예상 보다, 쉽다.
‘성장… 했나.’
두 차례, 마왕과의 전투. 그간 쌓아온 거인들과의 전투 경험. 그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구로 돌아오며, 가이아가 깨어나며 더 강해진 성흔과 신성력의 힘은 최고 수준이나 다름없는 내 육체를 한 차례 더 강화할 정도였다. 솔직히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 중국과 미국에서 싸웠을 때보다 오히려 더 강해진 것이 느껴진다.
가이아의 힘이 강해질수록 나 또한 강해지고 있었다.
경험, 성장, 거기에 더해 가진 것들이 강화되니 둘 정도는 손쉽게 밀어붙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순간이었다.
“…막아!”
내 외침이 후열을 향한다.
최소한의 재생을 끝마친, 오데르의 호위 중 하나가 전장을 빠르게 주파하고 있었다. 바다 밑은 사샤의 영역이다. 그 때문인지 바다 위로 최대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곧바로 다음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음을 알고, 그 틈을 찔러 들어온 것.
사샤가 물을 이용해 그런 거인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러나 거인은 거칠게 사샤의 방해를 뚫어버리고 있었다.
당장 손이 남는 인원은 없었다. 마법사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다. 그사이 주하연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남은주가 앞으로 나섰다.
한국에서 당한, 가족들의 거절 때문에 정신이 흔들렸음에도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는다.
“…여신의 가호, 철벽의 수호자, 수호…….”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사용한다.
어지간한 전사 계급의 거인들도 뚫을 수 없다.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저놈은 둘이서 합동 마법도 막아낸 3등위 거인이다.
남은주가 마지막으로, 그간 사용하지 못했던 스킬을 꺼내 들었다.
“순교자.”
거대한 신성력이 남은주를 감싼다. 신성력이 마치 거대한 방패이자 성벽과도 같이 정면을 틀어막았고, 그 위로 거인의 일격이 떨어져 내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