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역습>
“위치는… 파악되지 않는다고 해요.”
드넓은 남극 대륙. 처음 왕자를 지키던 일부를 제외하고 뿔뿔이 흩어져 나타났던 거인들은 수련자들에게 패퇴한 이후 왕자의 곁으로 집결했었다. 그 과정에서 각국의 남극 기지는 사실상 전멸했다. 그 행동을 끝으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 듯하더니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보였다.
항시 감시를 위해 각국이 노력하기는 했으나 어지간한 거리에 있는 것들은 순식간에 들켜 파괴당했고, 제한적으로 상대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 순간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뿔뿔이 흩어진 거인들. 그들이 어느 순간 대륙을 떠나 바다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긴 것.
무슨 방법을 사용한 것인지 수면 위로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고, 추격하던 이들마저 모조리 떨쳐내 버린 이후 모두 모습을 감춰버렸다.
‘미치겠군.’
이래서는 해안선과 닿은 국가 모두가 타겟이 되어버린다.
제한된 숫자를 가진 우리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거인들이 바다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세계 전체로 알려져 버렸고, 바다와 근접한 국가는 하나같이 수련자의 파견을 가이아에 요청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뿔뿔이 흩어 놓을 수는 없었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이 정도로 절실한 적은 없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들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들 수는 없었다. 우수한 마법사 전력이 존재하지만 텔레포트 게이트는 수준만 높다고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많은 시행착오가 따르는 일인데 현재 우리는 그만한 경험을 마음대로 쌓게 해 줄 수 있을 정도의 시간과 자원이 부족했다.
일회성 스크롤로 만들어 쓰자니 좌표를 비롯해 제작에 드는 재료가 보통이 아니었다. 탑에서야 시스템 상점들이 있었지만, 현재는 이용할 수가 없었다. 아키밀리의 차원도 아예 탑과 분리되어버리는 바람에 네비오스는 아키밀리가 중개해 준 곳으로 본점을 옮겨버린 상태였으니까. 연락할 방법이 현재는 없었다.
본래라면 아무리 거인이라도 물속에서 며칠이나 버틸 수는 없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게다가 왕자까지 모습을 감춰버렸다. 하다못해 왕자의 위치라도 알았다면 피해를 감수하고 그쪽이라도 먼저 쳐 버렸을 텐데….
골치가 아팠다.
한참 방법을 찾는 와중 몇몇 국가의 로비가 들어왔다. 그 안에는 한국 또한 포함되어 있었는데, 현재 한국에 머물고 있는 나를 포함한 길드원들이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한국 또한 바다와 접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초기 나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중국 쪽에서도 이전의 대응에 사과하며 비공식적으로 많은 지원과 특혜를 약속하며 우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애쓰고 있었고, 아예 섬 국가인 일본이나 우리에게 가장 적극적인 미국 쪽에서도 나 본인이 가족과 함께 미국 본토로 넘어와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특히 우리를 직접 서포트하는 인원들은 지원해주는 국가의 요청을 받았는지 아예 직접 대놓고 말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지금 당장 가족들을 데리고 움직여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다. 위험은 거인들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거인이 있는 동안은 최소한의 대비만 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결국 전국에 흩어져 제법 많은 호위 인력이 들던 가족들의 보호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길드원들의 가족을 모두 한 장소로 모이게끔 만들었다.
각국은 나에게 요청을 하면서도 온갖 첨단 장비와 인력을 동원해 목숨을 걸고 바다 전체를 수색하고 있었다. 설령 침몰당하더라도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해안 쪽 시민들을 내륙으로 대피시키는 것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목숨을 건 노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한계에 달했던 것일까. 약 3일간의 수색 끝에 일부 거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로를 생각해 봤을 때, 가장 가까운 육지를 완전히 무시한 채 상당수가 미국 본토로 향하고 있었다. 그 수가 무려 40개체. 그리고 그 소식이 알려지기 무섭게 오세아니아 대륙이 습격을 당했다.
“…이거 설마….”
상륙한 거인은 다섯 개체. 게다가 동시에 뉴질랜드 또한 거인 한 개체가 습격했고, 이어서 남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최남단 또한 거인들이 하나둘 상륙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수는 각각 7, 10에 불과해 나타난 모든 수를 합쳐 봐야 23개체에 불과했다.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은 이들이 조금 있기는 했으나, 주 전력은 확실히 미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거인들 간에 어떤 연락 수단이 있는 것 같아요.”
주하연의 말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본토로 향하는 거인들이 들키기 무섭게 동시에 습격해 온다. 모종의 연락 수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 미국이지?’
수련자들이 많은 곳을 기습할 생각이었다면 적어도 미국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가이아 길드원 일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으니까.
‘습격이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인가? 우리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나?’
확실히 가장 많은 수가 습격을 가한 곳은 미국이고, 동시에 아무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우리의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다면 가장 큰 전력이 소멸한 곳으로 가는 것도 이해 못 할 선택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성군들까지 수련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성군도 모두 미국 본토에 있었으니까.
“왕자의 모습은 확인하지 못했어요. 아마 보이지 않는 이들은 그의 호위일 가능성이 높아요.”
나 또한 주하연의 의견에 동의했다.
“미국으로 가죠.”
그렇다고 흩어진 거인들을 살려 보낼 생각은 없었다.
나는 즉시 타국의 수련자들에게 그들을 막을 것을 주문했다.
전부를 막지는 못할 터였다. 중국만 해도 고작 둘 막는 것에 전력을 다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렇다고 방치할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들 먼저 처리하고 싶지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미국이다. 게다가 성군 모두가 있는 장소인 만큼 버릴 수도 없었다.
거대 길드가 소속된 여러 국가들이 반발하기는 했으나 수련자들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저들을 막지 않으면 어차피 결국에는 순서만 다를 뿐 멸망당하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타국의 국토에서 싸우는 것이 저들에게도 이익이다.
우리는 곧바로 주일 미군과 우리가 소유한 마수를 이용해 미국 본토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고,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거인들의 습격을 받았다.
* * *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지원받은 공군들이 공격당해 바다로 추락한다.
공격의 전조를 알아챈 나와 길드원들은 빠르게 탈출해 무사할 수 있었으나 지원받은 공군은 사실상 전멸이나 다름없었다.
바다 위에 가볍게 내려앉은 내가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뭔…….”
“으하하하하! 드디어 찾았구나!”
거대한 웃음소리와 함께 바닷속에서 여러 거인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고작 일곱 남짓. 하지만 그들 중 하나는 특별한 놈이었다.
“…오데르?”
“그래. 이몸이 바로 오데르다. 네놈을 찾고 있었지. 설마, 설마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거대한 힘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찾아왔거늘, 설마 이곳을 지나갈 줄이야! 어찌 이런 기회가!”
“…이게 무슨 배짱이지?”
나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주변에 보이는 거인은 고작 일곱. 이들을 제외한 다른 거인들의 위치는 사실상 파악된 상태였다.
물론 보이는 일곱 거인의 수준이 만만치는 않았다. 전원 3등위에 해당하는 거인들. 하지만 지금 우리들의 전력은 저들을 못 잡을 정도는 아니다.
한국 출신인 가이아 길드원 전원이 나와 함께 있었고 동시에 내 직속 파티원이 모두 이 자리에 있었다.
탑을, 최소한 상층 하나 이상을 클리어한 우리들이다. 고작 하늘에서 좀 떨어졌다고 큰 부상을 입을 정도로 허술한 사람은 없었다.
솔직한 말로 마법 지원이 없더라도 이만한 전력이면 3등위 거인 열 이상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최대 화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법 지원이 가능한 상태다.
‘기회…인가?’
하지만 저들도 바보는 아닐 거다. 우리가 어느 정도 전력인지도 모른 채 다짜고짜 공격해 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기회를 그냥 날릴 수는 없었다.
나는 즉시 무기를 꺼내 들었고, 내 길드원들 또한 빠르게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서로의 목표를 정한다. 마법사들이 급하게 뒤로 빠져나갔고, 이연솔이 그런 그들을 통솔하기 시작한다.
“크하하하. 역시 단순히 약해 빠진 차원은 아니었다는 건가. 그 생명력이 어마어마한 데 비해 전력은 형편없어서 시시한 기분이었거늘.”
나는 나서윤을 향해 왕자를 우선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성군이 없는 이상 왕자의 버프는 거슬린다.
‘왕자가 가장 약하기도 하고.’
호위들의 움직임이 제한되는 효과도 있었다.
“기쁘구나. 그래도 전사라 부를 만한 이들이 있어서. 역시 떨어진 열매를 거저 줍는 것보다야 치열한 전투 끝에 얻는 열매가 더더욱 단 법이지!”
크게 웃어 젖히는 왕자. 홀로 떠드는 사이에 길드원들의 전력 배분이 끝났다.
나는 즉시 모든 힘을 해방했다. 시야가 옅게 붉어지고 동시에 강기가 크게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하연의 안정화가 펼쳐지기 직전, 오데르가 크게 외쳤다.
“오라! 충실한 친위대여!”
동시에 공간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뭣…….”
이런 기술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가이아 또한 이야기해 준 적이 없었다.
흔들리던 공간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거인들이 빠르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해일!”
“템페스트!”
곧바로 반응한 나와 나서윤의 공격이 그들을 향했다.
하지만 왕자를 지키던 친위대 중 하나가 곧바로 움직여 우리의 공격을 막아선다.
쿵쿵!
주변의 바다가 들썩인다. 아쉽게도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단숨에 적의 전력이 강화된다. 상대해야 할 거인의 수가 단숨에 네 배로 증가해 버렸다.
“처음 보는가 보군? 하기야. 이런 권능을 언제 본 적이 있을까.”
“…권능?”
“왕자급 거인 중에서도 진정한 충성을 받는 일부만이 사용하는 힘이다. 3등위 전사들, 공간을 다룰 수 있는 이들 중에서도 극도로 훈련받은 이들만이 이 소환에 응할 수 있지.”
오데르가 기쁜 표정으로 웃는다.
“그대의 얼굴을 안다. 가장 많은 전력이 투입된 두 곳을 차례로 막아낸 인간.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힘을 지녔더군.”
오데르가 팔을 벌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왕자, 그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오데르다. 모든 친위대와 나는 심령으로 연결되어 있지. 평범한 지배자들과 나를 같이 보지 말거라. 여기 있는 전력은 모두 알고 있다. 인간들 중 가장 강하고, 가장 중요한 핵심 전력들. 그런 이들이 뭉쳐 있구나. 너희와 교전한 모든 친위대들이 내게 알려왔다. 너희만 없어진다면 사실상 이곳은 나의 식민지가 될 터.”
오데르의 표정이 변한다. 기쁜 표정이, 전투적으로 일그러진다. 그리고 동시에 사나운 목소리로 외쳤다.
“내 충실한 친위대들이여. 저들을 모두, 죽여라.”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