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각자가 최초로 있던 장소로 돌아갈 수도 있고, 원하는 위치로 보내줄 수도 있다.”
“원하는 위치로 가고 싶네요.”
“나 또한 마찬가지요.”
“우리들 또한.”
대부분의 길드장 및 랭커들은 원하는 위치를 선택했다.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가는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고 지금 날뛰는 거인들은 빠르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거인들의 위치는 모두 파악이 되는 겁니까.”
“물론이다.”
가이아는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부분은 흩어져 있지만… 일부는 뭉쳐 있더군. 아마 뭉친 쪽이 우두머리일 거다.”
왕자, 오데르.
“우두머리의 이름은 오데르. 거인의 왕자라고 보면 된다.”
“오데르…….”
“왕자…….”
왕자. 그 계급 자체에 조금 압박을 느낀 듯했다.
“왕자라고는 하나 병력은 저게 다다. 저 왕자를 위해 추가적으로 파병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내부 세력 다툼에서 밀린 왕자라고 하니.”
“…그렇습니까.”
역효과인 듯했다. 하지만 다들 금세 마음을 추스른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어차피 우리는 싸워야 하니까.
“영국에는 거인이 몇이나 나타났나요?”
“하나다.”
“다행이네요. 그럼 저희 영국 왕실 길드는 바로 그 거인 주변으로 보내주세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왕춘이나 야마모토 같은 랭커들 또한 자신들의 조국을 선택하고 있었다.
일본에는 둘, 중국에는 아홉, 독일과 프랑스에는 각각 하나씩의 거인이 떨어진 상태였다.
“미국에도 열이나…….”
프레드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한국에는 거인이 없다.”
그 말에 수련자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다.
“…한국을 침략한 거인이 하나도 없다고?”
누군가의 중얼거림.
“가장 큰 세력이 저쪽인데…….”
즉 이쪽은 전력이 가장 강한 주제에 사실상 당장 급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겠느냐?”
“타 국가에 인원을 분배할 생각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수의 수련자들이 애타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쉽게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오자마자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상황인데다가 저들 입장에서는 장기간 얼굴조차 보지 못했던 사이였으니까.
그나마 엘리자베스가 나서려는 듯했으나 내 시선에 발길을 돌렸다. 물론 영국에는 인원을 분배할 생각이었다.
나는 차례로 인원을 분배했다.
아멜리아를 포함해 열 남짓한 인원을 영국으로. 영국 왕실 길드도 함께하는 만큼 하나 정도는 잡고도 남는다. 솔직히 말해 전력을 좀 과하게 투자한 감도 있었다. 영국 쪽 거인은 덩치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고 한 기억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고 아멜리아는 중요한 전력인 만큼 호위를 붙인다는 느낌이 강했다. 가이아가 위치는 알아도 그 수준까지 일일이 알지는 못했으니까.
그 외에 출신 수련자가 없는 국가들 위주로 절반에 가까운 전력을 분배했다. 일부 인원은 문제가 없는 한국에 배정하기도 했다.
‘혹시 모르니까.’
한국에 있는 가족들. 우리들의 정체가 알려지면 그들에게 영향이 갈 수 있는 만큼 만약을 대비한 인원 배치였다. 꼭 거인들만 해를 끼치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거인들을 상대하게 될 길드원들에게는 당연하게도 생존을 우선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헤어졌던 길드원들과 해후를 나누지 못하는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는 없었다.
“그 외에 저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모조리 미국으로 보내겠습니다. 성군(聖軍)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 요청에 가이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과의 공조는 중요했다. 현대의 무기가 거인들에게 통하지는 않겠지만, 정보 수집과 미국이라는 국가가 갖는 그 영향력만큼은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내 선택에 프레드가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왔다.
그로서는 기쁜 선택이리라.
“그렇다면 너는 어디로 가겠느냐?”
“저는…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내 선택이 의외였을까. 대부분의 수련자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당연한 선택이었다.
중국쪽 수련자들 전력으로는 거인 모두를 처리할 수가 없었다. 만약 저들을 다 막지 못하면 거인들은 주변으로 흩어질 테고, 그 목표는 한국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당연히 피해야 할 일이다.
내 선택에 왕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고마운 선택이오.”
“필요에 의한 선택일 뿐입니다.”
선을 긋는 내 말에도 왕춘은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럼 시간이 없으니 곧바로 시작하지. 단, 나의 성녀와 그 수호자는 남도록.”
순간 자신들의 이야기인지 알아듣지 못한 둘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주하연과 남은주가 그제서야 이유를 알아챈다.
정확하게 재계약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곧바로 가이아는 손을 들어 올렸고, 손끝에서부터 황금빛이 퍼져 나왔다. 몸에 닿는 즉시 익숙한 느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둘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이 빛에 닿는 즉시 가이아의 신도가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될 터였다. 일종의 정식 계약이다. 지구로 돌아온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이 탑에서 그녀의 간섭력으로 성장했고, 그녀 자신도 힘을 성장시킬 필요가 있는 만큼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정식 계약을 한다고 당장 큰 변화는 없겠지만. 신성력을 사용할 것도 아니고.
“그럼, 수련자들이여. 지구를 부탁하마. 나 또한 최선을 다할 것이니.”
그 말을 끝으로 빛이 수련자들을 삼켜버렸다.
* * *
[외계의 침략? 지구 멸망의 징조?]
[갑작스레 나타난 초인들]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거인들. 그 정체는?]
[100만의 희생, 추모의 물결]
[초능력자들]
첫 습격은 사실상 대성공이었다.
거인들은 파괴에 취해 우리들의 등장을 뒤늦게 눈치챘고, 대부분이 제대로 저항을 하지 못했다.
패배한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쪽도 분명 피해는 있었고, 기껏 귀환에 성공한 수련자들 다수가 첫 전투에서 사망했다.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곳은 상층이 아닌 지구. 죽은 이들이 부활할 방법은 없었다.
내 길드의 피해는 없다시피 했다. 마수 몇을 잃은 것이 전부일 정도. 내 길드원들은 자신들이 배정받은 거인이 상대할 만하다고 판단한 것은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고 애매하거나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곳에서는 빠르게 빠져나왔다. 목숨을 중시하라는 내 지시를 충실히 이행한 셈이었다. 그로 인해 포기한 장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나 그것까지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당장 얼굴을 모르는 사람보다 내 길드원들이 중요한 것도 있었지만, 이들은 현재 보충이 불가능한 전력이다. 해볼 만하다고는 해도 이쪽이 크게 유리한 것도 아닌데 전력을 함부로 낭비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조금 불리할 정도였었지.’
첫 습격으로 죽인 거인은 약 80 남짓.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를 줄여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단 한 번 있는 기회에 불과했다.
죽은 거인들마저도 대부분이 2등위로 추정되었으니까.
3등위 거인 대부분은 그 목숨을 부지했다. 역습에 수련자들이 죽어나간 것도 대부분 3등위 거인들의 공간 공격에 의해서였다.
내가 갔던 중국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공격 해왔던 모든 거인을 죽이는 것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 많은 중국의 수련자들을 잃었고 왕춘 또한 몇 번의 위기를 겪었지만, 동시에 크나큰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검선이다.”
“신인께서도 같이…….”
“검선님! 잠시 시간을 조금…!”
우르르 달려드는 민간인들과 기자 무리들. 우리가 보인 힘이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주요 전투 장면들 일부와 나나 다른 수련자들의 모습이 대중 매체를 통해 퍼져 나간 것이 원인이었다. 처음의 전투는 몰라도 이후 몇 군데 패배한 전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전투 장면들이 카메라에 제대로 담겼던 것.
“…부끄럽소. 당신 앞에서 검선이라고 불리다니…….”
왕춘은 분명 성장한 실력을 보였지만, 그 수준은 나에 비하면 상당히 떨어지는 정도에 불과했다. 혼자서 2등위 거인을 상대하는 것도 아슬아슬한 수준이었고 3등위 앞에서는 살아남는 것이 고작인 정도였다. 그 때문에 중국인 수련자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한 거인은 둘에 불과했다. 즉, 반 이상을 나 혼자 처리한 셈.
그렇기에 그는 검선이라는 명성을 얻었으나 그 명성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것보다 정부 쪽이나 제대로 통제하시죠.”
“…걱정 마시오. 뒤탈은 없을 거요.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이리 많은 사람이…….”
정보가 샌 것 같았다.
현재 나는 중국 쪽 일이 해결된 만큼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이었다.
문제는 세계적인 혼란 때문에 대부분의 항공편이 현재 멈춘 상황이라는 것.
바다 자체를 혼자 힘으로 건너게 생긴 상황이었다. 지구에는 텔레포트 게이트가 없었으니까.
지금 내 수준으로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직접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마수가 있으니까.’
비행형 마수. 전투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이동용으로는 쓸만할 것 같아 미리 준비했던 놈이다.
“제발, 제발 떠나지 마십시오, 신인이시여!”
“왜 저희를 버리시는 겁니까!”
“…가시오.”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막아서며 왕춘이 말했다.
“기껏 도와주었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 무척 송구하오.”
거인들이 습격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만에 우리들이 나타났다. 상당수의 전장은 정리되었지만 패배한 곳에는 군이 투입되었고, 그들은 참패했다.
그런 전장을 정리한 것이 나였고.
총의 탄환도, 저격도, 미사일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아마 핵까지 사용했을 터. 핵을 직격당한다면 분명 피해를 입기는 할 테지만, 그건 2등위 전사 거인까지였다. 3등위 쯤 되면 공간째 갈아버릴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직격을 한다고 해도 죽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마력이 없는 공격은 쉽게 막을 수 있으니까.’
그건 수련자들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중국 정부에서는 빠르게 나와 수련자들에게 접촉해 왔고, 나는 그러한 접촉을 거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단순히 친절한 접촉이 아니었던 것.
그들은 자신들의 주석과 직접 만나게 하겠다고 하면서 나에게 수많은 제한을 걸려고 했었다.
당연히 내가 그런 취급을 받으며 중국의 주석을 만날 이유가 없었고.
‘벌써 시작인가.’
강한 힘을 가진 수련자들을 단순히 구원자로만 보지는 않는다. 통제할 수 없는 무력을 가진 무력 집단. 아마 대부분의 국가 지도층들은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이 필요하기도 하다는 거다. 통제하기 힘든 것도 있지만 동시에 거인들을 군대만으로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당장 군대의 힘만으로 우리를 억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치할 수는 없었다. 하루빨리 우리를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위치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왕춘 또한 동의하는 바였고.
나는 곧바로 마수를 소환했고, 나를 붙잡는 시민들을 뒤로한 채 곧바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