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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90화 (290/317)

290화

브리니아가 우리를 보낸 장소는 정확히 말해 지구보다는 가이아의 개인 공간에 가까웠다. 세계의 틈. 수련자들이 잠시 머물 수 있도록 가이아가 준비한 공간인 듯했다.

나로서는 이미 1회차에 와본 적이 있던, 익숙한 장소였다.

“오랜만이군요.”

“그래. 정말 오랜만이구나.”

짧은 말이었으나 그 안에는 많은 감상이 담겨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어.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늘…….”

“그랬다가는 의지가 꺾여버렸을 겁니다.”

나는 몰라도 대부분의 수련자들이 그랬을 거다. 아무리 지구의 시간이 멈춰 있다고는 해도 그만한 시간이 흐르면 탑의 삶에 적응해버리고 말 거다.

“하긴 그렇겠지. 그래도 그 짧은 시간 만에 용케도 이만한 세력을 구축하였어.”

개인적으로는 압도할만한 세력을 모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앞서 말했듯, 그랬다가는 탑에 적응해 버릴 테니까.

“그대도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고.”

확실히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해볼 만하기는 하겠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가이아. 그녀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감정이 어려있었지만, 동시에 아쉬움 또한 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방심할 단계는 아니지만 동시에 승산도 있는 정도.

“그래도 브리니아가 제대로 지원은 해 준 모양이군. 헌데… 왜 나의 성녀에게서 브리니아의 흔적이 이리 강하게 느껴지는 거지?”

묘하게 불쾌해 보이는 가이아. 확실히 브리니아가 걱정할만한 이유가 있기는 한 듯했다.

“제가 요청해서 그렇습니다.”

나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고, 가이아는 내 부탁이었다는 말에 표정을 풀었다.

“하기야. 다시 직접 계약을 하면 그만이기는 하지. 네 판단은 존중하겠다.”

브리니아의 이야기 말고도 전할 말이 남아있었다.

“아키밀리라는 자를 아십니까?”

“아키밀리? 들어본 적은 없다.”

플로어 마스터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일까 일일이 모두를 알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수련의 탑의 플로어 마스터입니다.”

“플로어 마스터… 그렇군. 그런데 그가 뭐 어쨌다는 거지?”

“저희 전력을 추가하고 싶은데, 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가 말했던 조건을 가이아에게 전달하자 가이아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세계의 연결인가… 대충 목적은 알겠군.”

“마수들 중에는 생각보다 쓸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상층, 악마의 영역에서 얻은 마수들은 거인의 영역 마수들보다 그 질이 한층 더 뛰어났다. 마기가 가득한 만큼 마수들 또한 강했던 것. 덕분에 1등위 전사 거인보다 강한 마수들만 수십에 정예 길드원들이 미끼로 사용할 마수들도 수백이다. 아주 큰 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세계의 연결은 그리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특히 탑에 소속되었던 세계라면 더더욱. 탑에 소속되었다는 것은 한차례 침공을 받았던 곳이라는 뜻이다. 차후 같은 곳에서 공격이 올 수도 있어. 정확하게 목표로 지정 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니라.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여러 세계가 연결된다는 것은 그만큼 침략당할 기회가 늘어난다는 뜻이고.”

브리니아가 관리자로 있는 제소시아와의 연결만 해도 위험한데, 아키밀리의 세계까지 연결되어버린다면 위험도가 더 올라간다는 말이었다.

그 걱정이 이해는 된다.

그러나 나는 다른 말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는 것은 이번에 거인을 막아도… 다시금 침략을 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거인에게?”

“그럴 수도 있다. 물론 저들은 도망자에 가까운 존재인 만큼 위치를 숨기기는 했겠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

도망자. 문득 거인의 층에서 얻었던 정보가 떠오른다. 가이아 또한 대강은 알고 있던 정보인 모양이었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알게 된 정보이니라. 결국 제대로 된 도움 따위는 받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가이아의 얼굴에 냉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래도 그 덕분에 브리니아와 만날 수 있었다고.

지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렇다면 저희 세계가 가장 위험한 것 아닙니까? 하나라도 저런 이들이 있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고작 짧은 시간 연명하자고 그 고생을 한 것이 아니다.”

가이아는 더이상의 위험을 피하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전력을 더욱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성군(聖軍)과는 상성이 좋지 못해 따로 쓰게 되겠지만, 그래도 그만한 전력을 그냥 내다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 가볍게 볼 수 있는 전력은 아닙니다. 확실히 도움이 될 겁니다.”

내 단호한 태도에 가이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지금 살아야 미래도 걱정할 수 있는 겁니다. 그들이 있다면 승리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질 겁니다.”

“지금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위기가 초래된다면 또 힘든 싸움을 하는 것은 그대가 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 가족은 지구에 있었고, 나는 다른 세계로 떠날 수도 없는 몸이었다. 이미 가이아와 브리니아라는 두 관리자와 계약까지 한 상태. 나와 가족이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차라리 거인이 또 쳐들어온다면 그때를 생각해서라도 전력은 더 있어야 한다.

“…할 수 없군. 그대가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한참을 고민하던 가이아가 마침내 허락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더 미룰 필요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미궁 조각을 사용해 통로를 열었고 가이아는 그 통로를 통해 아키밀리의 세계와 접속했다.

관리자와 플로어 마스터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아키밀리는 연결된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내 계약자를 통해서 했으면 하는군. 계약자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주었을 뿐이니.”

“…고맙다.”

“약속한 대로 미궁 조각을 통해 길을 열어주시죠.”

“물론이다. 얼마든지.”

이키밀리는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밝은 목소리로 내 요청에 응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미궁은 탑과 완전히 분리되는 겁니까?”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상관 없다.”

밝은 목소리로 아키밀리는 말했다.

“설령 내 세계가 한동안 마수 사육장에 불과할지라도 상관 없다. 회복만 할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되어준다면 훗날 지성체가 다시 나타날 테니까.”

내게 미궁 조각을 돌려주며 아키밀리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부디 끝까지 네 고향을 지켜 줬으면 좋겠다. 네게는 최대한 협력하도록 하지.”

“…그거 감사하군요.”

지구가, 어떠한 상황이고 누구에게 침략을 당했는지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플로어 마스터였으니까. 게다가 과거 관리자였던 만큼 지금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지구가 언젠가는 다시금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세계가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저렇게까지 기뻐하고 있었다.

위기가 아닌, 정말 큰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는군요.”

“이제야 봤느냐? 온 지는 제법 되었느니라.”

회색빛 세계에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얼굴들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공주부터 왕춘, 야마모토 하지메, 톰 뮐러와 크리스토퍼 등 하나같이 중층에 남겨 놓고 온 이들이었다.

‘벌써 올라왔나?’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내심을 짐작한 아키밀리가 대답해 주었다.

“탑과 다른 세계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탑은 특수한 공간이니까. 지구야 시간이 멈춰 있었지만, 네가 제소시아에 있었을 때는 이야기가 다르지.”

상층에 있었을 때는 비슷하게 흘렀을 거라고.

‘그러고 보니… 1회차에서는 10:1이었던가?’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지. 저들은 너희와 다르게 상층을 제대로 끝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법 오래 버텼다고 들었다. 뭐, 다 함께 올라간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황제가 속앓이 좀 했지.”

그래도 단물은 제법 빨아 먹었다고.

‘결국 플로어 마스터들이 올려버린 모양이군.’

대충 예상은 했던 결과다.

“제법 쓸만해 보이기는 하네요. 하나같이.”

과거 랭커였던 이들은 벽 자체는 넘은 모양이었다. 탑에서 나온 만큼 이전처럼 명확하게 상태 창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대강의 수준은 알 수 있었다.

“아이템도 생각보다 준수하고…….”

“다들 네가 떠나고 노력 많이 했으니까.”

“그건 궁금하군.”

가이아의 말에 아키밀리는 정중한 태도로 그들의 행적을 읊어주었다.

그러는 사이 천천히 회색빛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도착하기 무섭게 멈춘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 것.

멈췄던 일행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키밀리의 이야기를 잠시 중단시킨 가이아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온전히 흐른다면 다시금 거인들이 우리의 세계를 파괴할 것이다. 이곳과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길지는 않을 거다.”

“…….”

“막아라. 꼭 승리하기를 기원하지. 때때로 줄 수 있는 도움은 주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세계가 성장한 만큼 이제는 내게도 신앙이 필요하다. 그것 또한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군.”

“그쪽이라면 많이 나서 주셔야 할 겁니다.”

“직접 힘을 쓰기는 힘들 거다. 지금 막 깨어난 나로서는 한계가 명확하니.”

“등장만으로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 정도라면.”

곧이어 일행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가…….”

“드디어…….”

“지구가… 맞나? 여긴 도대체…….”

“신후 님?”

“…유신후 라고?”

“뭔 사람이 이렇게…….”

웅성웅성.

수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사방에 울리기 시작했다.

“조용.”

가이아의 한마디에 일대가 단숨에 조용해져 버린다.

“처음 보겠군. 반갑다. 나는 지구의 관리자, 가이아라고 한다.”

“지구의… 관리자?”

“신이라고 부르기도 하더군.”

“신? 신이라고?”

“지구로의 귀환을 환영한다. …돌아와 주어서 고맙다는 말 또한 해 주고 싶군.”

가이아의 말에 사람들이 다시금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신이라면, 왜 지구가 그 꼴이 되도록……!”

“우리가 저 지옥에서 얼마나!”

갑작스럽게 터지는 분노. 그러나 가이아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 나도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었고.”

가이아는 차분하게 거인들이 쳐들어오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지구라는 세계 자체가 성장함에 따라 마나가 생기게 되었고,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마나는 세계의 성장에 필요한 양분이고, 그것을 탐낸 타 세계의 표적이 된 것이며 자신은 세계에 마나가 제대로 생기기 시작하면서 움직일 수 있게 된 만큼 대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천천히 설명했다.

상황이 급한 만큼 저럴 시간이 없는 것 또한 맞았다. 하지만 최소한 지구를 위해 목숨을 걸 이들이다. 그들에게 최소한의 설명은 해 주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저들의 분노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저들이 겪은 바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냉정한 이들은 분명히 있었다. 특히 내 소속 길드원들은 하나같이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분노한 이들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지금 화를 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고, 또한 내가 가만히 있는 모습에 나서지 않는 듯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분노하는 수련자들을 향해 가이아는 차분한 태도로 하나씩 대답해 주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도움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었고, 시간을 멈추기도 했으며 자신의 대리자를 선택해 탑에 보내기도 했다고.

“대리자? 그게 누구…….”

“유신후다.”

“…유신후?”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다. 내 길드원들 또한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납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확실히 내가 보인 능력은 뛰어난 면이 있었으니까. 그 이면에 가이아의 지원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탑 내부에 관여할 수는 없어 많은 도움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는 착실하게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탑 내부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는 말에 수련자들의 표정이 바뀐다. 결국 대부분은 내 스스로 이루었다는 뜻이 되니까.

확실히 회귀를 제외하면 받은 것은 이중 계약 스킬과 관리자의 눈동자 정도였다. 정보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내가 회귀함으로써 갖고 있던 정보들이다.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거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테지.”

거인들이 움직인다. 그 말에 수련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거인의 영역을 클리어하지 못했다면 거인에 대해 끔찍한 기억이 남을 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들은 귀환을 선택한 이들이다.

곧 수련자들이 표정을 가다듬는다. 하나같이 탑을 거친 이들. 대부분은 뭐가 우선인지는 금방 파악한 듯했다. 그럼에도 분노하려는 소수의 인원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이들을 각 길드의 수장들이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가이아가 입을 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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