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해동(解凍)>
“흐아. 내가 없는 사이에 별의 별일이 다 있었네. 그래서, 쟤들이 우리랑 같이 지구 갈 애들이라고?”
“정확하게 정해진 것은 없어. 사샤, 그만 좀 날아다녀.”
“그간 얼마나 답답했는데 돌아다니는 것도 뭐라고 하냐. 너무한 거 아니야?”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는 좀…….”
레고스트 일행을 앞에 둔 채 날아다니는 사샤와 그런 사샤에게 핀잔하는 나연. 그러나 레고스트 일행은 그런 대화보다는 사샤 자체가 더 신기한 모양이었다.
특히 엘프인 네세네 같은 경우에는 고대 정령인 사샤를 보며 굉장히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말은 걸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사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인 듯했다.
실제로 깨어난 사샤의 힘은 장난이 아니었다. 최상급 정령이라고는 하지만 제 입으로 등급 외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사샤, 나연 페어를 상대하려면 평범한 길드원들로는 어려웠다. 벽을 넘은 수준의 길드원들이 필요했고, 그마저도 나나 나서윤을 제외하면 혼자서는 어려운 편이었다.
‘한바다도 어떻게 되려나?’
그녀 또한 기술 교류를 하며 여러모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특히 나서윤처럼 무언가를 알아챈 느낌도 없잖아 있었으니까.
다만 하유진 같은 경우에는 사샤가 천적에 가까웠다.
어디에 숨든 손쉽게 위치를 특정해내고 기습적인 공격도 모조리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는 내가 사용하는 공간 계통 공격도 미리 감지하고 피해낼 수 있는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사샤의 공격은 다른 의미로 방어가 불가능했다.
‘설마 거인의 피를 재료로 쓴 내 갑옷까지 뚫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본인 스스로 거인의 마법 저항력을 뚫기 위해 방향을 정했다는 말을 듣고는 할 말을 잊었다.
“그럼 곧 있으면 지구에 간다는 이야기네? 기대된다.”
어째 거인과 싸울 생각보다 지구를 간다는 것 자체에 더 흥분하는 기색이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는 본인도 많이 생각했다는 것을 결과로 보여주었으니까.
신나보이는 사샤를 보며 나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행동 좀 조심해. 거기는 너 같은 존재는 없었다고. 엄마가 놀라면 가만 안 둔다?”
“아, 걱정하지 마.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최대한 예의 바르고 조심스럽게 행동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 같아도 걱정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본인이 가족에게 기피당할 것을 걱정했었던 나연이다. 눈앞에서 사샤가 날아다닌다면 평범한 일반인이었던 나연의 어머니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을 거다. 게다가.
‘예의 바른 사샤라…….’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것보다, 어때? 할 만할 것 같아?”
사샤가 나를 향해 물었다. 역시 생각 자체는 하고 있었던 듯했다. 나는 잠시 생각해 본 뒤 답했다.
“정확히는 브리니아 여신이 얼마나 지원을 해 주는지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지금까지 갖춘 전력을 생각하면, 해 볼만은 해.”
“그래?”
주하연이 아직 공간 계열 공격을 막을 방법을 완전히 익히지 못한 것은 아쉽다. 어쩌면 이대로 익히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고려해도 이쪽 전력이 만만하지는 않다. 초기에 저들이 대응하지 못할 때 얼마나 수를 줄일 수 있느냐가 관건일 뿐.
원하는 대답을 들었기 때문일까. 레고스트 일행의 소개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사샤는 대강 얼굴을 익히기 무섭게 세상 구경이나 하겠다며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렸고, 나연은 레고스트 일행에게 사과하며 곧바로 그런 사샤를 쫓아 자리를 비웠다.
제국 전역에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마왕의 잔당을 사실상 전부 처리한 상황이었으니까.
축제는 열흘 가까이 지속되었다. 살아남은 인간과 이종족들은 하나같이 무척이나 기쁜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아직 일이 전부 끝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살아남았지만 새로운 전투가 남아 있었다.
지구의, 거인들과의 전투. 제국은 축제가 끝나기 무섭게, 아니 정확히는 축제 중에도 전시 체제를 제대로 풀지 않았다.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축제도 잠시, 제국은 이전과 비슷할 정도의 긴장감을 되찾았다. 그러나 제국민들의 얼굴에는 이전만큼의 절망감은 없었다. 내가 등장했고, 자신들의 용사도 있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우리를 믿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축제가 끝나고 약 한 달가량의 시간이 흘렀을 때, 예고도 없이 브리니아가 강림했다.
* * *
“…저건 도대체 뭡니까?”
“화신(化身)이라고 볼 수 있어요.”
여신이 제국 수도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나는 그녀의 초대를 받았다.
신전과 제국 황실을 통해 이미 알려진 사실이기는 했지만, 여신이 직접 나타나 말하는 것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동시에 존재하는 겁니까?”
“비슷하면서도, 달라요. 제 의지가 깃든 분신 정도로 생각하시면 된답니다.”
‘별걸 다 할 수 있군.’
괜히 관리자가 신이라고 칭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늘 그렇듯, 당신에게는 감사하고 있답니다.”
짧게, 다시금 감사를 표하는 브리니아.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은 좋지만, 매번 이러니 조금 귀찮기는 했다.
‘배은망덕한 것보다야 낫기는 하지만…….’
“덕분에 세계도 다시금 견고해져 당분간 침략을 당할 일은 없을 거랍니다. 비록 많은 지성체가 죽었지만 세계 자체는 성장해서 제힘도 강해졌고요. 덕분에 여러모로 지원을 해 드릴 수 있게 되었어요.”
“어떤 것들입니까?”
나로서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다.
“가장 먼저, 레고스트와 애니디 뿐만이 아니라 그 파티 전원에게 축복을 내릴 생각이에요. 상상 이상으로 힘이 커졌거든요. 세계를 지키면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요.”
어차피 위태롭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덕분에 수월해 졌다는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성군(聖軍) 또한 조직할 수 있게 되었어요.”
“…성군이요?”
“네. 어디까지나 지원이 한계고 거인들과의 전투에서 직접적인 도움은 크게 안 될지도 모르지만… 최근에 가이아님의 성녀가 익히려는 기술을 쓸 수 있을 거에요. 게다가… 상대 거인들이 왕자 휘하에 들어감으로써 얻는 버프 효과를 줄일 수도 있고요.”
이름이 성군인 주제에 디버프를 거는 역할이라는 뜻이다.
“…그 정도면 엄청 도움이 되는 거 같은데요.”
“대신 성군이 무너질수록 그 힘은 약해질 거예요. 어떻게 본다면 지킬 수 없는, 쓸데없는 짐이 늘어난 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서…….”
“못 가게 막으면 됩니다. 그만한 실력은 갖췄어요.”
1:1로 나를 상대하면서 뒤쪽의 성군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 전에 죽을 테니까. 그건 상대가 3등위 거인이라도 마찬가지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있다고?’
생각보다 크게 도움이 되는 여신이었다.
“그… 가이아님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의 브리니아.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거인을 막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도움이 될 말이라면 일단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그게, 지금 주하연 성녀가 현재도 애니디가 사용하는 안정화를 아직 배우지 못했잖아요?”
안정화. 공간 계열의 공격을 막아내는 기술 이름이다.
“그녀의 능력이 애니디보다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이아님의 지원이 없다시피 하니… 단기간에 익히는 것은 어려울 거에요.”
나는 계속하라는 표정으로 브리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허락한다면 계약자님처럼 이중 계약을 하고 싶어요.”
“…그게 됩니까?”
나만 해도 이중 계약을 하기 위해서는 신화급 스킬이 필요했다.
“된답니다. 탑에서와는 전혀 다른 형태지만요. 거기서는 중간에 탑과 시스템이 끼어들어 가계약의 형태를 취하게 되지만… 여기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계약을 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다만?”
“주하연 성녀 같은 경우에는… 신후 님처럼 가이아님과 직접 계약을 하신 것은 아니라서…….”
생각 해보면 탑을 통해 직업을 얻고 이후 성흔마저도 탑 내부에서 특이한 형태로 얻었었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가이아님이 기분이 나쁘실 수가 있어요. 물론 나중에 직접 계약을 받으면서 저보다 영향력을 키우실 수는 있겠지만… 일단 첫 번째 직접 계약은 제가 되는 거나 마찬가지라…….”
고개가 기울어지는 말이다. 브리니아가 은근히 가이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 반응을 눈치챈 것인지 브리니아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다른 신도도 아니고 무려 성녀니까요.”
“…그렇습니까?”
이유가 그것뿐만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관리자들끼리 통하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 상황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어디까지나 할만하다 수준이지 확실한 것은 아닌 만큼 저러한 것들은 받아 둬야 한다.
“그렇다면 일단은 도와주시죠. 그런 것으로 뭐라 하지는 않을 겁니다. 무엇하면 제 요청이었다고 해 두죠.”
“그렇다면 안심이죠. 허락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어요.”
내 말에 브리니아가 안심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보증하면 믿을 수 있다는 듯한 반응.
나는 거기에 한 술 더 떴다.
“기왕 도와주실 수 있다면… 혹시 남은주도 가능합니까?”
“…남은주… 라면…….”
“성기사입니다.”
브리니아는 알고 있는 눈치였다.
“…확실히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벽은 넘지 못했지만, 분명히 다른 길드원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도움이 되는 인재다. 그녀가 얻은 스킬들은 하나같이 수준이 높고 귀한데다가 서로 시너지 또한 괜찮았다.
“이건 정말로 제가 부탁드리는 겁니다. 여유가 되신다면 꼭 좀 부탁드립니다.”
오히려 어지간한 성군보다 그녀 하나가 더 도움될 가능성이 높았다.
“알겠어요. 계약자님의 부탁이시라면.”
브리니아는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말들을 행동으로 옮겼다.
제국군과 성기사들, 사제가 포함된 일정 군대가 강대한 신성력을 머금었고 용사 일행은 축복을 받았으며 주하연과 남은주는 곧바로 내가 있는 장소로 소환되었다.
화신이 하는 일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소환된 두 명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내게 설명을 듣고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잘 안 되고 있었는데… 고마워요 신후 씨.”
“나중에 지구 쪽 신과 재계약을 할 필요는 있을 겁니다.”
사실상 탑을 나온 시점에서 제대로 계약이 된 것은 맞지만, 지금처럼 직접 만나서 하는 것만큼 강하지는 못할 거다. 괜히 브리니아가 걱정한 것이 아니었다.
주하연과 남은주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신후 오빠.”
별것 아니다. 말 몇 마디 했을 뿐.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발전이 멈춘 지 제법 오래된 그녀다. 그런 만큼 이런 기회는 그녀에게 정말 소중할 터였다.
나와 같은, 하지만 약간은 다른 이중 계약을 통해 마침내 주하연은 원했던 기술, 안정화를 익혀내었고 남은주는 육체 자체의 스펙 상승과 더불어 더 많은 신성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벽을 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 자체는 벽을 넘은 것과 다름없는 수준에 도달했으며 동시에 성장한 신성력을 통해 스킬 자체가 더 강해진 효과를 누릴 수 있을 터였다.
아무리 신체 능력이 발전했다고 한들 실제 벽을 넘은 이들과 대거리를 하는 것은 어려울 터다. 정식으로 벽을 넘은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그녀의 장점은 수비에 있었다. 그것도 스킬들을 통한 수비. 그녀가 공격을 완전히 포기한 채 수비에만 전념한다면 어지간해서는 그녀의 방어를 뚫을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안정화를…….’
남은주의 스킬, 정확히는 탑에서 나옴으로써 더는 스킬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해지긴 했지만, 철벽의 수호자를 사용할 경우 주하연이 방금 얻은 안정화가 사용 가능하게 되어버렸다.
허탈할 정도의 결과. 하지만 주하연은 오히려 그런 남은주를 축하해 주었다.
“후…….”
브리니아는 상당히 지쳐 보였다.
“신후 님의 부탁이어서 상당히 신경을 썼답니다. 그래서 일부러 성군의 규모를 작게 만들었어요. 그들이 안정화를 쓰는 시간도 짧아질 테고… 그래도 왕자급 거인의 버프를 줄이는 역할은 충실하게 해 줄 거랍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내 인사에 브리니아는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해 주신 것과 앞으로 하실 일들에 비하면 약소한 일에 불과해요.”
“…….”
약간의 부담이 느껴질 정도의 말.
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성군이 완성되고, 주하연과 남은주가 새 계약을 맺었으며 용사 일행의 스펙이 상승했다.
그러나 쉴 틈은 없었다.
약간의 적응 기간을 거친 이후, 곧바로 출정식이 이어졌다.
여신의 화신이 재강림하고 차원의 문이 열린다.
일시적인 연결. 완전한 연결에는 시간이 걸리고, 가이아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일시적인 연결일 지라도 우리들이 지나가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가세요, 용사들이여. 가서 거인들을 무찌르세요.”
전형적인 화신의 대사. 그러나 성군의 환호는 진심이었다.
차원의 문을 건너고, 회색의 빛이 우리를 맞이한다. 건너간 성군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굳어간다.
그들은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내 길드원들도 회색빛에 물드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모든 이들이 굳어버린 장소.
그곳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나의 계약자여.”
가이아, 그녀의 목소리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