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기억이 안 날 만했다.
‘내가 8살 때라…….’
당연하지만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특히 2회차인 지금은 작은 추억 하나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하유진의 말이 공감이 간다.
솔직히 말해, 나 또한 가족의 얼굴이 조금 희미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래도 유진이는 나은 편이더라.”
“…그게 낫다고?”
“응. 유진이가 그러더라. 기억 안 나도 괜찮다고. 너도 있고, 같이 다닌 일행들도 있으니까… 지구로 돌아가도 별로 안 무섭대.”
무섭다라는 말이 걸린다.
“그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은 무섭다고 하더라. 가족들이랑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고, 우리들, 평범한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강해졌잖아.”
“……….”
“가족이, 친구들이, 자신들을 거부할까 봐 그게 그렇게 무섭대. 무서워할 사람들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막상 직접 거부 당할까 봐 그게 두렵다고 하더라.”
기껏, 지구를 위해 목숨을 걸고 탑을 지나 다른 세계에서까지 싸웠다. 그 결과가 주변으로부터의 고립이라면… 두려울 만했다.
고향에 왔지만 정작 중요한 인간관계는 모조리 박살 난다는 뜻이니까.
“그래도… 같은 경험을 공유한 길드원들이 있기는 하니까. 무섭지만, 그래도 돌아갈 거라고. 이제까지 한 것들이 있는데 억울해서라도 꼭 갈 거라고…….”
길드원들이, 서로가 서로의 안식처와 같은 역할이 되는 모양이다.
좋은 방법이다.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나 또한 그런 것에 관해서는 생각해 놨었다.
애초에 저런 경우를 제외하고도 이 정도 힘을 지닌 무력 집단을 가만히 둘 국가는 없었다.
괜히 제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영국 왕실 길드와의 끈도 남겨 놓은 것이 아니었다.
나름 여러 생각들이 있는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도 스스로 잘 극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확실히 길드원들과 교류가 많기는 한가 보네.’
내 입장 상 듣기 어려운 이야기임은 분명했다. 나와 길드원들 사이에는 벽이 있기는 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내 선 안쪽의 사람들을 아끼는 편이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친근한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선이 있다고 할까. 괜히 억지로 친근한 이미지를 연출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도, 모두 힘들어하는 건 아냐. 생각보다… 서윤이는 별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더라.”
“그런 기색이 없기는 했지.”
나서윤에 관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자주 이야기도 하는 만큼 그런 기색이 있었다면 알아챘을 터다.
“하연 언니는 크게 걱정하는 편이었고… 바다 언니도 조금은 그랬어. …은주가 가장 심각했지만.”
남은주에 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 소꿉친구인 이성훈도 탑에 놓고 온데다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았으니까. 정확히는 그렇게 도와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꺼림칙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잘못된다면… 원망하겠지.’
당연한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책임은 질 생각이었다.
“너는?”
움찔.
내 말에 나연이 반응한다. 침묵도 잠시, 그녀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나도 걱정되지. 처음에 말했잖아?”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 곧바로 서윤이 이야기로 넘어갔지만.”
“…당연히 걱정돼.”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나연이 중얼거렸다.
“당연히 걱정되지. 엄마가 나를 무서워하면 어떻게 하나, 서윤이는 알아볼까,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솔직히 예전처럼 지내는 것은 어려울 거다. 그녀도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터. 그저 거부만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기분이지 않을까.
게다가 그녀는 나서윤과도 함께 넘어온 사이니까.
그녀가 거부 받는다는 것은 나서윤 또한 배척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나서윤은 괜찮다고 했지만, 직접 겪고 나서도 그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너 어떠냐니까 결국에는 서윤이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니까 어째 또 서윤이가 끼어들었다.
원래 이런 애다 보니, 정말 별 방법이 없기는 했다.
“하기야. 가까운 사람에게 괴물 취급을 받고 배척받으면… 힘들기는 하겠지.”
내 말에 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어떻게든 해 볼게.”
나 또한 괴물 취급이나 받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영웅 취급을 받으면 받았지. 주변에서 그런 취급을 받으면… 그런 이들이라도 좋다고 받아들인 이들마저 생각을 바꿀 수가 있었으니까.
“…뭐?”
“그러라고 있는 직책이니까.”
생각보다 많은 짐을 지려는 모습에 나연이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 하려고 꺼낸 이야기 아냐. 너도…….”
말이 길어지려 하는 모습에 나는 가만히 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못 믿어?”
“…그건 아니지만……. 너, 너무 비겁한 거 아냐?”
못 믿기에는 그간 이룬 것이 많았다. 말만이 아닌, 그간 해 온 내 행적이 나연의 입을 막았다.
“뭐,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못 하겠다만, 그래도 너무 과하게 할 필요는 없어. 그런 쪽으로 최악이 되지 않도록 할 테니까.”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나연을 가볍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런 거 말고, 어머님께 나 소개할 걱정이나 하시지.”
“…아.”
잠시 나와의 관계를 떠올린 나연의 동공이 작게 흔들렸다.
본인이 원하기도 했고, 눈앞의 일을 걱정하느라 그런 생각이 들지 않기는 했겠지만, 일단은 연인 관계이기는 했으니까. 그것도 자신의 동생까지 포함한.
“…뭔 남 얘기처럼 말하고 있어?”
나연의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태도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때마침 샤워를 끝내고 돌아온 나서윤이,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 * *
대련을 끝내고 시간이 남기 무섭게 나는 곧바로 주하연을 찾아갔다.
그녀가 부길드장이기도 하고, 여러 실무를 담당하고는 했었으니까.
“기술 습득은 잘 되시나요?”
“…신후 씨? 여기는 왜…….”
내가 나타나기 무섭게 주하연이 의아한 모습으로, 하지만 무척이나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주하연은 곧바로 다과를 가져다주었고, 우리는 우선 가벼운 안부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최근 습득하려 하는, 공간 계열의 공격을 무효화하는 기술이 생각보다 무척 까다로운 모양이었다.
여신의 배려로 그 원리를 듣기는 했지만, 자신은 애니디처럼 직접적인 도움을 받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나처럼 이중 계약자도 아니고.’
제법 긴 시간을 떠들며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연과 했던 대화까지 화제가 되었다. 본래 찾아온 이유이기도 했다.
“연이가 그런 걱정을… 하긴…….”
길드 전체에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말에 주하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만하죠. 저만 해도…….”
말을 멈춘 주하연을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연이 말에 의하면 상당히 걱정을 많이 하는 쪽에 속하시다고 하던데… 이유를 물어봐도 됩니까?”
“…종교 때문에 그래요. 제가 나름 모태 신앙이라서… 지금에 와서는 다른 신을 모시고 성녀까지 되었잖아요.”
주하연은 슬쩍, 성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때문에 골치가 아파요. 과거에도 생각했지만, 저희 집안은 상당히 독실했거든요.”
“…그건 조금 힘들기는 하겠네요.”
예상치 못한 이유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뭐, 걱정하지 말아요. 현실을 직접 보면… 달라지겠죠.”
‘그게 그리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거 같은데…….’
종교만큼 까다로운 것은 없으니까.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그것만 물으러 오신 것은 아닐 테고… 슬슬 오신 목적을 말씀하실 때가 된 것 같은데.”
“응원차 온 것도 맞기는 합니다만…….”
“그래서 다른 이유가 없나요?”
“…아뇨. 일단 길드원들과 만날 장소라던가, 기간을 조금 정하려고 했었죠.”
첫 계획에 따르면 나타나는 순간을 이용해먹기 위해서 길드원들과 뿔뿔이 흩어질 예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모일 시간, 장소를 정해야만 했고, 덤으로 길드원들의 걱정도 조금 케어할 생각이었다.
“뭐, 개인 사정이라던가 지구의 집 주소 같은 것은 대부분 길드에 들어올 때 작성해서 알고 있기는 하겠지만…….”
나중을 생각해 초기에 받아 놓은 개인 정보의 일부였다.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해 수집해 놓았을 뿐이었지만. 복지의 일부이기도 했고.
길드원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지구의 가족들을 도와줄 것. 길드원들의 의욕을 높이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주하연의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에 별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보통 목적이 없으면 잘 찾지 않는 경우가 많기는 했었다.
‘진짜 자주 찾아가기는 해야겠군.’
주하연이 알게 모르게 섭섭한 티를 내는 모습에 작게 반성했다. 하기야 언제부터인지 주하연과 만날 때는 언제나 업무 이야기들이었으니까. 그만큼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고.
지구의 시간이 멈춘 시점과 지금 노리는 첫 습격을 끝내고 모일 시기, 장소 등을 정한다.
사실상의 업무. 하지만 주하연은 언제 섭섭한 티를 냈느냐는 듯 곧바로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주하연과의 일이 끝나고도 자리를 뜨지 않을 채 조금 더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는 다음 날부터 차례로 일행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닌 척하며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린 한바다라던가 충분히 걱정할 만한 남은주, 오히려 가족들에게 배척받아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하유진과 나서윤.
시간이 난다면 주하연과 나연을 찾아가 잠시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자유롭게 휴식 겸 길드원들의 멘탈 관리에 시간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제국의 마왕 잔당 처리는 계속해서 진행되었으며, 갈수록 브리니아의 힘은 회복되어 갔다.
마왕의 잔당 청소가 거의 끝나갈 무렵.
사샤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 * *
“와, 진짜 오랜만이다.”
“…사샤?”
“이야, 리더 님아! 잘 지냈어? 그 사이 마왕까지 잡았다며?”
사샤는 성장하던 시기의 기억은 전혀 없는 듯했다.
“…진짜 많이 성장했네.”
외형이야 여전히 중성적이었고, 몸집은 성인인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느껴지는 힘은 장난이 아니었다.
“…최상급?”
“아냐 아냐. 음… 어떻게 보면 지금 최상급 정도의 힘을 가진 것은 맞는데…….”
사샤가 조금 골치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일단, 등급은 없다시피 해졌어. 내가 4대 속성의 정령도 아닌데,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보면 등급 외라고 봐도 되기는 하겠네.”
등급 외 정령.
“그게 최상급 정령과 차이가 뭐지?”
“일단, 한계가 없다고 보면 돼. 정확히는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희의 벽과 같은 느낌이랄까? 지금이 최종 진화 형태라고 봐도 돼. 조건만 갖춰지면 여기서 끝없이 성장할 수 있어.”
“…그만큼 오래 걸리겠군.”
“응. 아마 진짜 오래 걸릴 거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만족해.”
충분히 만족할 만했다.
“축하한다.”
“으하하. 고마워.”
사샤가 호탕하게 웃어 제꼈다.
그런 사샤를 향해 너 때문에 시간 낭비 오래도 했다고 나연이 핀잔했다. 기분이 좋은 사샤는 그런 나연의 투정마저도 웃으며 받아주었지만.
‘좋기는 하겠네.’
사샤 개인에게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결과일 터였다. 등급이라는, 성장의 한도가 사실상 없어진 것이니까.
어쩌면 훗날 새로운 정령왕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정말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이곳저곳 날아다니는 사샤를, 나는 웃으며 바라보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