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걱정>
“…이렇게 빠르게 해결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솔직히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여신과의 독대. 마왕을 처리한 이상 이쪽이 해야 할 일은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전군을 출전시킨 황제는 생각보다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초기에야 예상했던 대로 피해를 입었다만, 마왕이 내 손에 죽어버리고 동시에 두 백작마저 죽어버리며 지휘부를 완전히 잃은 뱀파이어들은 이전처럼 제국의 군세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대부분이 미쳐 날뛰었고 저들끼리 싸우기도 했으며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그 과정에서 뱀파이어 영역 내에서 살아 있던 인간이나 이종족들이 다수 희생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지구와의 연결은 조금 미루었으면 합니다.”
“저로서는 환영할만한 일이네요.”
뱀파이어 잔당들도 처리해야 하고, 제국 내부의 문제들도 해결해야 한다. 내 쪽도 사샤나 주하연과 같이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만큼 서로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뱀파이어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난 후라면 성녀와 용사에게 힘을 더 실어 줄 수 있을 거랍니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그들에게는 나름 실망감이 있었다. 그러나 여신이 힘을 더 베풀어 준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비록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한 차례 침략을 막아내었다. 세계 자체가 위기를 한 번 겪었었으니 조금 더 성장할 테고, 그러면 관리자의 힘 또한 성장하는 법이다.
“그러면 당분간 시간을 얻는 것으로.”
“알겠어요. 정말 고마워요. 계약자님. 덕분에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요. 세계를 대표해서 인사를 드리겠어요.”
계약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녀 또한 이중 계약으로 나와 계약했던 여신이기는 했으니까.
“아직 끝난 것 아닙니다. 지구와 연결이 될 예정인 이상 지구의 위기는 이쪽 세계의 위기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한 세계의 재앙을 사실상 홀로, 그것도 짧은 시간 만에 막아내었기 때문일까. 나에 대한 브리니아의 평가가 어마어마하게 상승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강해지기는 했지.’
완전히 변형 완료된 신화급 장비도 손에 넣었으며 가진 것들을 완숙하게 다룰 수도 있게 되었다. 과거의 나와는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수준이 되어버렸다.
지금의 나라면 어지간한 세계의 위협은 혼자서도 막아낼 수 있다. 규격 외. 그 수준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었다.
지구는 어지간한 세계의 위기가 아닌 것이 문제지만.
“그럼, 준비가 다 된다면 다시 연락하겠어요. 아마,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에요.”
“고생하시죠.”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눈 이후 나는 초대된 공간에서 벗어났다.
밝은 빛이 사라지고 나자 처음 이 세계로 초대했을 때와 비슷한 광경이 눈앞에 보였다.
교황과 여러 성직자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내 길드원들과 용사, 황실에서 파견된 인원 등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정도.
“여신님께서는…….”
“당분간 시간을 주신다고 하시더군요. 우선 마왕의 잔당을 모조리 처리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죠.”
“그 외에는…….”
나는 이 세계의 용사와 성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힘을 회복하고 나신 후에 둘에게는 추가적인 가호가 내릴 겁니다.”
“여신이시여…….”
“그렇습니까…….”
성녀 애니디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고 용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의 힘이 한없이 부족하다는, 그렇기에 여신의 도움을 더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조금 씁쓸한 듯했다.
물론 그게 지원의 전부는 아닐 터다. 여신이 얼마나 힘을 회복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지에 따라 지원의 규모가 달라질 터였다.
“세계의 연결이 머지않았습니다. 그곳에도 마찬가지로 재앙이 존재하고, 이곳보다 훨씬 위험할 겁니다.”
“대가라고 하였습니다. 저희 세계를 주해 주셨으니 저희 또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교황의 말에 반발하는 자는 없었다. 자신들의 세계가 안전해 졌다고 입을 닦기에는 당장 눈앞의 내가 멀쩡한데다가 무엇보다 여신이 결정한 일이다. 이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실 겁니다.”
“물론입니다. 만반의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그 외에 여신이 전달을 부탁한 몇 가지 일들을 전한 이후 대신전을 벗어났다.
나와 내 길드원들에게는 상당한 자유가 보장되었다.
길드원들의 공로도 괜찮았지만, 무엇보다 내가 마왕을 쓰러뜨려 버렸고, 내 일행들 또한 백작을 잡는 것에 상당한 기여를 한 만큼 당연한 대우였다. 대부분의 길드원들은 잔당 토벌에는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지구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아는 만큼 다들 묘한 기분에 휩싸인 듯했다.
가진 것을 점검하는 길드원들도 있었고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고자 수련을 하거나 이쪽 세계의 강자들과 기술을 교류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 수련이라…….’
어쩔 수 없기도 했다. 그간 몸에 완전히 배어버린 습관이기도 하니까.
대분의 길드원들과 내 파티원들은 그런 기술 교류에 참여하는 편이었다.
예외는 나나 나서윤 정도.
나와 나서윤은 서로 대련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나서윤이 발전의 실마리를 얻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주고 있었다.
유일하게 나연 만큼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나서윤의 대련을 구경하던가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편이었다. 이쪽 세계에도 엘프들이 있고 정령에 대해 배울 것들이 여럿 있기는 했지만 나연의 수준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사샤 자체가 워낙 유니크한 정령인 만큼 초기에나 잠시 교류를 했을 뿐 지금은 필요성을 못 느끼는 듯했다.
오늘치 대련이 끝나고 멍하니 있는 나연에게 접근했다. 나서윤은 샤워를 하러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사샤는?”
매일 반복되는 질문. 나연이 오늘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영 늦네. 도대체 얼마나 달라져서 나오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덕분에 지금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다고.
“그렇다고 나가자니 너무 불편해서. 왜? 혹시 대련 구경하는 게 불편해?”
“설마. 그럴 리가.”
구경하는 것이 불편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현재 밖으로 나갔다가는 아마 즉시 수많은 찬사와 감사 인사 세례를 받을 터였다.
초기에는 용사와 성녀를 찬양하는 듯했으나 그들 스스로가 밝히기도 했고, 제국과 대신전의 발표도 있었다. 사실 마왕을 쓰러뜨리고 세상을 구하는 것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나라고. 게다가 대대적인 선전 과정에서 내 외형까지 대강 퍼지는 바람에 못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특히 지금의 이 외모는 가족들도 못 알아볼 가능성이 높았다.
‘진짜 동화 속의 용사군.’
잘생긴 외모에 뛰어난 실력. 위기의 상황에 등장한 것까지. 많은 부분이 일치했다.
덕분에 성 밖으로 나가기가 무척이나 껄끄러웠다.
그 와중에 나를 찾아온 병사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신후 님? 그…….”
“…또 입니까?”
망설이는 병사를 향해 묻자 곧바로 긍정이 돌아왔다.
“예. 에블리누스 왕국의…….”
“안 된다고 말씀 전해 주세요.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병사가 뒤로 물러섰다.
“또 살려달라는 그 이야기야?”
“그래. 로지우스의 왕족들과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하는 요청이야.”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안 돼.”
내 단호한 대답에 나연은 입을 다물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우리에게 도움이 안 돼. 되려 방해지.”
제국은 현재 멸망당했던 왕국들의 지원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당장 지구와의 연결이 코앞이다. 이런 상황에 왕국들을 재건시키겠다고 인력과 자원을 쏟아 넣을 수는 없었다.
지금 제국이 마왕의 잔당을 처리하는 것부터 곧 있을 지구와의 연결에서까지 우리를 도와줄 텐데 도움은커녕 되려 방해나 할 수는 없었다.
왕족들의 대부분이 목숨을 건지면 여러모로 제국에서 무언가를 뜯어가려고 할 테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왕국 재건은 지상 과제가 될 테니까.’
당연한 일이다.
“나중을 생각해도 조각조각 난 왕국들이 여럿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제국과 거래하는 편이 나아.”
‘차라리 제국이 더 커지게 돕고 말지.’
그 편이 내게 더 유용하다. 뭐, 용사가 지원하고 내가 도와줬었던 로지우스 왕국은 어쩔 수 없겠지만.
“…응.”
나연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능력을 가진 것은 나고, 최고 결정권을 가진 것도 나다.
납득을 한 듯했던 나연의 얼굴이 다시금 어두워진다. 그러나 분위기가 방금의 일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생각해?”
“그게…….”
잠시 뜸을 들이는 듯하던 나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구로 돌아간 뒤의 생각. 엄마도 생각나고……. 우리, 다 많이 변했잖아.”
“…거인이 먼저 아냐?”
“진다면 뒤가 없잖아. 그리고 질 생각도 없으면서.”
당연한 이야기다.
“우리가 이기고, 아니 이기지 않더라도 한 번쯤은 가족들 얼굴을 보게 될 거 아냐.”
“그렇겠지.”
“그때, 어떤 반응일지 몰라서. 우리가… 8년? 정도 됐잖아. 탑으로 들어간 지. 아니, 9년인가?”
얼추 맞았다. 제소시아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탑은 이야기가 다르니까. 상층은 두 영역을 클리어했고, 그것을 완수하는 데 걸린 시간이 년 단위였다.
‘나름 빠르게 나온 건데도… 그렇게 되었나.’
나로서는 더더욱 긴 시간이다. 1회차의 기억마저 있으니까.
“서윤이는 아예 16살 때 넘어왔는데 지금은 벌써 20대 중반이야. 나도 서른이 넘었고. 물론 외형은 변한 것이 없지만…….”
“더 예뻐졌겠지.”
“…….”
나연이 조용히 얼굴을 붉혔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사실이었다. 정령력 같은 힘을 다루고 4차 전직까지 해 가며 성장해온 나연이다. 오히려 처음 탑에 들어왔을 무렵보다 외형적으로 더 아름다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지구의 기준으로 봤을 때 도저히 30대의 외모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되려 20대 초반 정도의 느낌. 외형만큼은 탑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 어려졌다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외모가 오래가겠지.’
경지에 이른 이들은 전성기의 몸 상태를 더 장기간 유지한다. 즉, 잘 안 늙는다는 소리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지구에 있을 엄마가 보기에는… 방금 전까지 16살 어린 딸이 단숨에 24살이 되어 나타난 거니까. …엄청 어색하시겠지.”
그건 다 그럴 거다. 아마 내가 그렇게 그리워하는 내 가족들은 내 얼굴도 못 알아볼 터였다.
‘…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리가…….’
내 얼굴이기는 하지만 지금 외모에 익숙해지는 것은 수개월이 걸렸다.
당연한 일이고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금 슬프기는 하지만.
“다른 길드원들도, 하나같이 그런 생각을 하더라고. 우리 길드원들, 어렸을 때 탑에 들어온 사람들 제법 되잖아. 대부분 젊기도 하고.”
“…….”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릴수록 비교적 잠재력이 컸으니까.
‘대부분이 20대… 였었지.’
10대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물론 미궁에 있을 무렵의 이야기지만.
“유진이는… 부모님 얼굴도 기억이 잘 안 난대.”
“…….”
8살.
하유진이 처음 탑에 입장했던 나이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