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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84화 (284/317)

284화

양쪽이 부딪치면서 퍼지는 마력의 파동은 대놓고 이쪽에서 큰 전투가 있다고 광고하는 수준이었다.

정말 이 장소가 합류하는 장소라면 아주 멀리 있더라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상태에서 지원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접근한다면 우리는 단숨에 그 접근을 알아챌 수 있을 터였다.

어지간해서는 내 감각을 벗어나기 힘든데 거기에 흩어진 일행들마저 기척을 숨긴 채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으니 이 일대에서 놓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공작이 죽은 시점이니 기왕이면 구해서 가고 싶을 텐데…….’

이쪽 전력에 의해 주요 전력 중 하나가 죽었다. 예상외의 사태인 만큼 수가 얼마 되지도 않는 귀족 계급의 뱀파이어를 그리 쉽게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저쪽의 전투는 단시간만에 끝나지는 않았다. 내가 공작급의 뱀파이어를 쉽게 죽이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나였으니 가능한 것이지 귀족 계급, 그것도 백작급의 뱀파이어가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생각보다 전투가 길어지고 있었다.

‘노린 거기는 하지만.’

물론 백작이 만만하지 않을 뿐, 전력 자체는 이쪽이 압도적이다. 힘 차이가 저 정도로 나는 만큼 온 힘을 다한다면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이유는 없었다. 다만 다른 백작 하나를 유인하기 위해 연기를 조금 할 뿐이었다.

‘저렇게까지 버틴다면 전력을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바럴드 백작이 처한 상황이 버틸만하다고 착각하고 뒤늦게라도 나타난 준다면 성공이다.

“…찾았다.”

나연의 중얼거림.

먼 거리까지 정찰을 보낸 실라페에게 상대가 걸린 모양이었다.

“서쪽에서 접근 중이야.”

“수고했어.”

과거 나연이 하유진과 함께 주로 정찰을 담당했을 때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나는 즉시 전음을 이용, 주변 일행들에게 상대의 등장을 알렸고, 자세한 위치를 듣기 무섭게 남은주에게 나연을 데리고 전장을 이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어차피 금방 끝나.”

“알겠어.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고.”

주하연과 나서윤, 한바다와 함께 곧바로 발견된 백작을 향해 달려나간다.

우리가 전속력으로 움직이자 단숨에 숨겼던 기척이 드러났고 상대는 뒤늦게 함정이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도주를 시도했지만, 이미 거리를 좁힌 순간 도망치는 것은 실패나 다름없었다.

“젠장, 빌어먹을. 뭐 이런…….”

“이러면 마왕 하나 남은 건가?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는 거 같아, 오빠.”

“서윤이 말이 맞습니다. 지구에서도 이러면 좋을 텐데 말이죠.”

“…그건 안 될 것 같은데요. 솔직히 상층은 상성이 안 맞았다 뿐이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난이도는 거인 쪽이 더 높았어요. 지구 거인은 더 강하다고 추정되니까…….”

한바다의 희망에 안타깝다는 듯 주하연이 현실을 일깨웠다.

한바다 또한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겠지만.

생각보다 이쪽의 전력이 강하자 리베티 백작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새로운 전력이 나타났다고는 들었지만… 공작 각하께서 당하실 만하네. 빌어먹을… 한 놈만 강한 게 아니잖아… 이건 정보가 잘못되었다고…….”

리베티 백작이 겁먹은 기색으로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정보가 약간 잘못 알려진 모양이었다.

“이건 모조리 괴물이잖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모습. 그가 보기에는 우리가 더더욱 괴물같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움찔.

그러는 듯하던 백작이 순간 몸을 잠시 물러나던 것을 멈추고는 슬쩍 허공을 바라보는 듯했다. 이후 잠시 시선이 우리를 스치더니 한순간 핏물로 화한다.

“어디를!”

뱀파이어의 변신 능력 중 하나.

안개나 박쥐 등의 형태로 변해 그 장소를 탈출하는 기술이다.

핏물로 변한 곳 일대를 모조리 범위에 넣고는 공간을 침식했다.

단숨에 빨아들이듯 한 곳으로 뭉치자 다시금 뱀파이어의 형태로 돌아온 리베티 백작이 바닥을 차며 내 공격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미친!”

한 순간의 판단.

조금만 변신이 늦었더라면 죽었을 거다.

이미 한 차례 상층에서 뱀파이어들과 싸운 경험을 해 온 이쪽이다. 저런 기술에는 이미 당해본 상태였다.

‘당시에는 몇 번 놓쳤지만…….’

지금은 아니다. 애초에 모든 뱀파이어들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다.

나는 내 공격을 피해낸 리베티 백작을 향해 무기를 내리쳤다.

일행은 그 순간에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나서윤은 빠르게 마법을 외며 라베티를 공격할 준비를 마쳤고, 주하연 또한 그런 나서윤의 옆에서 천국의 분노 스킬을 막 사용하려는 모습이었으며 한바다는 상대가 도망칠 경로 중 가장 까다로운 곳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의 선택은 도주가 아니었다.

“열리라! 이어지리라!”

리베티의 외침.

내가 공격을 함에도 방어는커녕 허공에 손을 휘젓기 바빴다.

이대로 간다면 저 무방비한 몸을 두 동강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붉어지고는 직감이 경종을 울린다.

익숙한 느낌에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리베티의 몸을 향해 내리치던 검의 경로를 바꿔 단숨에 리베티의 그림자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단숨에 상대의 그림자가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거대한 붉은 손이 튀어나왔고, 내 공격을 여유롭게 막아내었다.

‘이건 또 뭐…….’

붉은 손은 내 공격을 막아낸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불안한 느낌에 붉은 손을 향해 공간 계통의 마법을 사용했지만, 소용없었다.

“…이게 뭔…….”

이미 저 일대가 공간 계열 기술이기 때문일까. 내가 간섭을 할 수가 없었다.

거대한 붉은 손. 잠시 멈췄던 그것은 곧바로 땅을 짚더니 마치 바닥을 짚은 채 몸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주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는 힘을 주는 것 같은 모습에 맞춰 천천히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 이런 건 또 처음인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중얼거림. 천천히 하나둘씩 신체 부위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반대쪽 팔, 머리, 어깨, 몸통, 허리, 무릎, 다리.

순서대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처음 보는 외향이었으나 그게 어떤 존재인지는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마왕…….”

북부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던 마왕. 그것이 이곳 보로크 협곡에 나타났다.

“후욱. 후욱.”

전신이 붉은, 덩치만 3m에 달하는 괴물.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것은 잠시 멍하니 서 있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전신 자체를 피가 뒤덮어 그 크기를 키운 모양이었다.

핏덩이가 완전히 사라지자 나타난 것은 평범판 크기의 뱀파이어였다. 하지만 느껴지는 기운 만큼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나와 동급.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마왕이 입을 열었다.

“실례했군. 이것이 없으면 그림자 통로를 쉽게 건널 수가 없어서 말이지. 그래. 자네가 이번에 새로 합류한 용사인가?”

어딘가 여유까지 느껴지는 말투에 몸이 저절로 긴장된다.

이미 이전부터 틈을 노려 공격해보려 하였지만, 상대는 좀처럼 틈을 주지 않았다. 아마 내가 기습을 했더라도 여유롭게 막아내었을 터였다.

“흠… 대단하군.”

작게 중얼거리는 마왕. 그는 이어서 입을 열었다.

“공작을 죽인 것은 너겠군. 허. 대충 어떻게 죽였는지 알만 하군. 인간이 로드의 인장을 갖고 있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 그래. 어떤 차원이 개입했지?”

“…….”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마왕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결국 거대 차원과 연합이라도 한 모양이군. 차라리 내게 점령되는 것이 낫지 타 차원에게 골수까지 빨아 먹히는 선택을 했다는 건가? 이쪽 차원의 관리자는 참으로 어리석구나.”

잠시 헛웃음을 짓던 마왕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침략한 내가 할 말은 아닌가. 후. 마계에서의 세력 싸움에 밀려 타 차원으로 왔거늘 또다시 이런 처지라니. 어째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군. 겨우 몸을 회복했는데도 말이야.”

‘세력 싸움에서 밀렸다…라.’

이쪽 차원을 침공했을 때부터 몸이 정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간 틀어박혀 몸을 치료한 듯했다.

쓸데 없는 말을 지껄이며 어깨를 돌리던 마왕이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물러가겠다고 해도 놓아줄 생각은 없겠지?”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어지간하면 싸우지 않고 보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미 이쪽 차원을 한 차례 방문한데다가 외부로 쫓아내기 위해 경계를 허무는 순간 새로운 침략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것이 나았다.

아무래도 제소시아 차원이 타 거대 차원과 연합했기에 나름 제 몸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제안한 듯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연합한 차원은 여기와 비슷한 처지, 아니 오히려 더 심한 처지의 차원이다. 이곳을 오랫동안 지킬 여유는 없었다. 게다가 진짜 거대 차원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귀찮은 짓은 하지 않을 거다. 그의 제안은 결국 지금 귀찮은 일을 피하고자 미래에 더 큰 재앙을 불러오는 짓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결국은 손해인 행동이다.

결론적으로 침략해 온 놈들은 모조리 죽여야만 한다.

‘만만해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지…….’

웅웅.

계속해서 울어대는 검을 슬쩍 바라본다.

겁 먹을 필요는 없었다. 이미 한 차례 마왕과 싸워서 승리해본 몸. 경지도, 신체 능력도, 마력도, 경험도. 그 어느 것도 나는 마왕에게 밀리지 않았었다.

분명 이 마왕은 탑에서 본 그 마왕은 아니었다. 탑에서 본 마왕은 저런 초장거리 이동 기술 따위는 없었다.

정확히는 리베티와 함께 사용한 듯하지만…….

사전에 준비된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한 것도 아니고, 마법 물품을 이용하지도 않았다. 그림자를 이용해 위험한 부하의 곁으로 이동하는 능력이라니…….

상당히 유용해 보였다.

“한바다 씨, 서윤아.”

“네, 신후 님.”

“응. 오빠.”

“리베티를 맡아. 마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하연 씨. 둘을 지원해 주세요.”

주하연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쯧. 어지간하면 물러가고 싶었거늘.”

마왕이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검을 불러내었다.

웅웅웅웅웅.

완전한 핏빛으로 이루어진 검. 그 검이 등장하기 무섭게 내 흡혈검이 더더욱 크게 울부짖었다.

‘기억하나 보네.’

탑에서, 상대 마왕의 장비를 집어삼켰던 기억. 그것이 남아있는 듯했다.

그리고 덕분에 흡혈검은 완전한 진화를 이룩했다.

“그것도 삼키면… 더 강해지려나.”

“삼겨? 아, 이것 말인가. 하긴. 인간이라도 로드의 인장을 갖고 있으니, 가능은 하겠군.”

그는 작은 착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대는 갑옷인가. 그래. 그것도 좋겠지. 검도 나빠 보이지는…….”

또다시 입을 열어대는 마왕을 향해 나는 단숨에 돌진했다.

일대의 공간을 침식한다.

하지만 마왕은 마왕이었다.

확실히 내 공격을 인지했고, 가볍게 자리를 이탈한다.

이어 내 경로가 비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빠른 대응. 그와 동시에 물러난 마왕이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악!

단순한 휘두름에 검에서 피 일부가 떨어져 나온다.

“성격도 급하군.”

그리고는 단숨에 피의 칼날이 되어 나를 향해 쏟아져 나왔다.

둘, 넷, 여덟.

단숨에 분화하며 내 전신을 노리고 쏘아진다. 한 번의 휘두름에 수백 개의 칼날이 튀어나온다.

그 마법에 내 에고웨폰이 반응한다.

경로를 이탈해 비틀리는 공간에서 탈출한다. 이어 날아오는 혈마법을 에고 웨폰이 반응해 대부분을 처리했고 일부는 내 스스로 혈신의 갑옷을 이용, 마주 혈마법을 사용해 상대의 공격을 모조리 파훼했다.

이어서 이전, 리베티 백작에게 했던 것마냥 다시금 검을 내리그었다.

“낙뢰.”

이전과는 다른, 압도적인 속도로.

어마어마한 범위를 짓누르는 압력에 마왕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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