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가장 앞서서 들어간 것은 나였다. 본래라면 한바다 내지는 남은주가 앞장서야 하는 것이 맞기는 했다. 정 안된다면 레고스트 파티의 기사, 구알라사가 나서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었고.
아무리 시간끌기용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함정이 있는 곳이다. 전위들이 나서는 것이 옳은 행동이었다. 다만 남은주는 나연을 전담하기로 이야기가 된 상태였고 구알라사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바다가 앞장서기로 했을 때, 나는 내가 직접 나가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직접 나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한바다가 이상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내가 그녀를 못 믿어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 또한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터다. 애초에 같이 행동한 것이 몇 년인데 그녀를 못 믿을 이유가 없었다.
“방어야 에고 웨폰이 있으니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작정하고 도망치기 전에 찾아야 하니까요.”
애초에 따지자면 나도 전위에 속하고 스펙상 내가 가장 우수하다. 그녀나 남은주만큼 방어에 치중된 스킬들은 없지만 장비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도 가장 능하니 내가 나서서 문제가 될 정도면 누가 앞장서더라도 문제가 생긴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망칠 가능성이 높은 공작을 붙잡아야 한다. 모든 인원 중 가장 감각이 우수한 것은 나인 만큼 내가 움직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게이트를 통과하기 무섭게 상당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확실히 여러 가지를 준비한 모양이었다.
일대는 이미 포위된 상태였다. 언제 우리가 게이트를 활성화 할 지도 몰랐으면서 미리부터 준비한 모양이었다.
여러 뱀파이어들의 모습이 보인다. 대부분 상급 이상의, 따지자면 마스터급에 해당하는 뱀파이어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하나같이 마법을 준비한 채 우리를 노리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기 무섭게 곧바로 혈마법들이 쏟아진다.
그러나 에고 웨폰의 자율 방어를 뚫고 내게 도달하는 마법은 단 한 개도 없었다. 혈신의 갑옷과 연동된 에고 웨폰은 그 성능이 더욱 향상되었고 덕분에 백에 가까운 마법이 쏟아짐에도 내게는 어떠한 피해도 없었다.
내가 정면을 틀어막는 사이에 나머지 일행들이 게이트를 건너왔으며 내게 마법을 쏟아붓는 뱀파이어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감각에 집중했다.
일대 공간에 대한 정보가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들어왔고 성 내부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위치를 순식간에 파악해 나갔다.
‘찾았다.’
공작으로 추측되는 존재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이 성에 관한 정보는 알아 둔 상태. 과거 왕이 머무는 장소에 거하는 중이었다.
그쪽 또한 우리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건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는 행동이었다.
“여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우선은 공작을!”
내 말을 듣기 무섭게 레고스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살짝 고개만 끄덕여 주고는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우리의 무위를 확인한 이상 자신들이 남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대지의 울림!”
“질풍 가르기!”
구알라사와 핑기나가 앞으로 나서며 우리가 나설 길을 만들었다.
길이 뚫리기 무섭게 다른 뱀파이어들이 달려들었지만, 상관은 없었다.
“대 격노!”
스걱! 펑!
몰려들던 뱀파이어들이 단숨에 쓸려나간다.
그러나 확실히 처음 레고스트가 말했던 것처럼 시간 벌이를 최우선으로 설정했었는지 게이트가 있던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한 문을 부수기 무섭게 여러 함정들이 나타났다.
통로가 무너지고 독안개가 사방에서 뿜어져 나왔으며 여러 투사체들이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심지어는 여러 마법이 발동되는 함정들마저 차례로 준비되어 있었다.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들이나 우리에게는 시간 벌이 그 이상은 되지 못했다.
“실라페! 독 안개를 밀어줘!”
“수호!”
“블링크.”
무시무시한 속도로 함정들을 파괴한 뒤 지상으로 올라오기 무섭게 또다시 기다리던 뱀파이어들의 혈마법이 쏟아진다.
“신후 님.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우선 이동을!”
슬슬 일행들 또한 도망치는 공작의 기척을 느낀 듯 내게 먼저 가라는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저들이 시간을 끌어 봐야 그리 오래 끌지도 못한다. 금세 따라올 터. 그러나 그런 시간마저 아까울 만큼 공작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일행을 뒤에 놓고 달리며 나는 기묘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진짜로 이러면 실망인데.’
확실히 저 정도면 본인이 도망칠 시간을 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가 없었더라면 아마 성공적으로 도망쳤을 터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력의 차가 크고 자신이 있었기에 레고스트의 계획에 동의하기는 했으나 솔직히 정말 도발만을 위해 게이트를 남겨 놓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대가 중간에 멈췄을 때도 방심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특이한 장소는 아니었다. 평범한 공터로 보였으며 딱히 다수의 뱀파이어들이 함정을 판 것 같지도 않았다.
“용사가 아니로군?”
뱀파이어 공작 베스웨이퍼.
뱀파이어 답게 상당히 젊고 아름다운 외형이었다.
“네가 공작인가.”
“알고 찾아온 것이 아닌가? 너는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확실히 공작이 맞았다. 들었던 정보와 일치한다. 나는 다짜고짜 검을 뽑아들었다.
“특이하군. 분명 인간들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있을 텐데 갑작스레 이런 이들이 출현하다니…….”
그의 얼굴에는 명백한 당황이 떠올라 있었다.
“탑은 충분히 감시하고 있을 터. 어디에서 너희 같은 이들이 나타났는지 모르겠군.”
그러나 당황도 잠시였다. 어차피 내가 순순히 자신을 놔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듯 차근차근 나를 살펴보았다.
“마왕의 불사를 깨기 위해서는 너를 죽일 필요가 있겠지.”
내가 입을 열기 무섭게 그는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후후. 그게 쉬울 것 같은가?”
공작은 팔을 펼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곳에서 멈춰 섰는지 아느냐? 이곳은 본래 용사의 무덤으로 쓰기 위한 장소였다. 예상외의 상황이기는 하나 그대 또한 벽을 넘은 인간. 너에게 쓰더라도 아깝지는 않겠지.”
공작이 손을 휘젓기 무섭게 평범해 보였던 공터가 차차 모습을 바꿔간다.
바닥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하며 일대에 역한 피냄새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 대지가 흐물흐물해지고 주변에서 그를 호위하던 뱀파이어들이 곧바로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아, 이건가.’
하지만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혈계(血界).
뱀파이어들이 타 종족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개인 영역이었다. 귀족급 이상의, 강대한 뱀파이어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종족 고유의 기술.
평소에 인간의 피 내지는 자신의 피를 비축해 놓고 전투시에 꺼내 쓰는 저장고 같은 것으로 어떻게 본다면 한바다의 스킬인 마력의 바다와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만 피는 뱀파이어가 가진 힘의 근원에 가까운 것이어서 저 혈계 내부에서라면 평소보다 강한 힘을 낼 수 있고 어지간한 피해를 입어도 순식간에 회복하며 저장된 피가 마르지 않는 이상 무한히 마법을 쏟아낼 수 있었다.
“이것을 이쪽 세상에서 쓰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베스웨이퍼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축하한다. 이건 이쪽 세계의 용사조차 모르는 기술이니. 나의 혈계에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이쪽 세계의 용사조차 모른다.
‘그건 조금 이상한데…….’
이쪽 세계에서는 혈계를 쓸 일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인간의 전력이 부족했고, 혈계는 땅을 중심으로 하는 데다가 준비도 엄청 많이 필요해 대부분 수비 상황이나 중요 거점 방어를 위해 사용하니까.
하지만 내가 혈계를 경험한 것은 탑에서였다. 그런 만큼 용사가 이것을 모른다는 말에는 고개가 기울여질 수밖에 없었다.
저놈과 이야기할 일은 아닌 만큼 나는 이야기를 돌렸다.
“혈계라. 혈계의 약점은 알고 있나?”
“…뭐?”
“보통 혈계는 상위 계급의 뱀파이어 앞에서는 사용하지 않지. 타 종족과 싸울 때 사용할 뿐.”
어느새 베스웨이퍼의 혈계가 완전히 개방되었다.
그리고 나는 묵묵히 한 손을 들어 올리며 혈신의 갑옷을 불러내었다.
상대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른다.
혈계를 상위 계급의 뱀파이어 앞에서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모든 힘을 통째로 빼앗길 가능성이 있다.
상층, 악마의 영역에서 알게 된 사실 중에서는 혈신의 갑옷에 관한 것도 있었다.
로드급 이상의 뱀파이어만이 사용할 수 있는 혈계의 변형.
결코 빼앗기지 않는 혈계.
이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내 피의 지배력은 로드급의 힘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로드급을 죽이고 얻은 힘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내 마력이나 경지가 낮은 것도 아니다.
그에 반해 상대는 공작급 뱀파이어.
혈신의 갑옷이 환호하듯 공명음을 뿜어내었다.
* * *
“이걸 혼자서…….”
“예상은 했지만 이건 진짜…….”
뒤늦게 찾아온 용사 일행이 허탈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완전히 말라버린 공작의 시체였다.
“어떻게 해야 이렇게 죽일 수 있는 겁니까?”
레고스트가 질린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다.
“스킬의 힘이죠. 과거 뱀파이어의 힘을 빼앗은 적이 있습니다.”
“뱀파이어의… 힘을?”
뒤늦게 생각이 났지만, 이놈은 나의 혈신의 갑옷 또한 알아보지 못했다.
마왕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가 만든 혈계의 변형은 갑옷이 아니었지만 분명 다른 형태의 장비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가 사용한 장비는 망토.
“당신 설마… 탑의 상층조차 클리어하지 못했던 겁니까?”
“…….”
내 말에 저들이 침묵했다.
아무래도 이들은 제대로 상층을 클리어하고 세상에 온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군.’
브리니아가 괜히 가이아와 계약을 한 것이 아니었다.
확실히 상층을 클리어한 인재가 있었다면 마왕 하나 정도의 침공은 막았을 거다.
가이아 입장에서는 누구의 도움이라도 필요했고 브리니아의 도움이 있었기에 시간을 멈출 수 있었으며 나 또한 성장에 도움을 받은 만큼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었기에 나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힘을 빼앗으셨다면… 설마 뱀파이어들을 휘하에 넣으실 수 있는 겁니까?”
“뱀파이어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 본인이 뱀파이어는 아니라서요.”
“그런… 그렇다면 혹시 뱀파이어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 단언에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만, 지배된 이들에게 자유 정도는 줄 수 있습니다.”
그게 한계다.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은 로드도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용사의 표정에 희망이 깃들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부디 로지우스 왕가의 일원들에게 자유를 주실 수 없으십니까?”
간절한 표정의 레고스트.
나는 그를 향해 물었다.
“그래 봐야 그들은 영원히 뱀파이어의 몸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인간들에 의해 배척받고 멸시받을 겁니다.”
살기 위해서는 피를 마셔야 할 거다. 그리고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아야 할 터다.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제국 내에 혼란을 줄 겁니다. 제국의 모든 인원이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내부에 분열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자유를 얻었지만 뱀파이어라는 점과 로지우스 왕가의 사람이라는 것이 걸린다.
내 거절에 가까운 말에 레고스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런 레고스트를 그들의 일행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드윈 로지우스 때문입니까.”
내 말에 레고스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