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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79화 (279/317)

279화

대치는 오랜 시간 이어졌다. 정확히는 우리의 겉모습만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 대기의 마력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순간에 변해버린 내 기세에 내 상대인 레고스트 뿐만이 아닌 일대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길드장님은 여전하군.”

“…상대가 불쌍할 정도인데. 이거 진심이신가 본데?”

“하기야 직접 잘못한 놈의 우두머리니까. 나연 님도 길드장님의 애인분 중 하나이시니… 오래된 일행이시기도 하고. 화가 나실만하지. 아마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이미 사달이 나도 진작 났을걸? 맺고 끊는 것은 확실하신 분이니까.”

“쯧. 그놈의 거인 놈들 때문에…….”

길드원들은 긴장한 가운데에도 익숙하다는 듯이 떠들고 있었고, 내 파티원들 또한 묵묵히 상황을 볼 뿐이었다.

그에 반해 레고스트 쪽 사람들은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펴지도 못했다.

압도적인 격차로 패배했더라도 정신까지는 잃지 않았던 보르가가 완전히 정신을 잃고 꼬꾸라졌으며 그런 동료를 저들은 제대로 신경조차 써 주지 못했다.

주저 앉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솔직한 말로 조금은 실망이 들 정도였다.

기세조차 온전히 버텨 내지 못한다. 아마 이 상태에서 내가 어느 한 쪽을 공격할 경우 내 휘하 인원들은 그래도 자신의 실력 정도는 온전히 보여줄 것 같은 데 비해, 저쪽은 제 실력도 제대로 못 발휘하고 내 손에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나름 망해가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싸워 온 이들이 기세 하나에 마음이 흔들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뭐, 일단은 벽은 넘은 놀들이고… 조금 굴리면 쓸만하기는 하겠지. 그간 손발을 맞춰온 파티이기도 하고.’

내 길드원들이 4차 전직을 하며 새로 얻은 스킬이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함께 사용하는 기술인 만큼 저들 또한 그와 같거나 비슷한 부류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터였다.

사실상 수련의 탑이 용사들에게 이 스킬을 사용하게 하기 위해서 그간의 과정을 거치게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 길드원들이 그 스킬을 습득하고 난 뒤 벽을 넘지 못했음에도 셋 정도면 1등위 거인은 상대할 수준에 닿는 것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레고스트의 영역은 완전히 내게 짓눌려 버렸고 이대로는 저항 한 번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어떻게든 무기를 든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에는 망설임이 가득했다. 포기하는 것보다도 더 처참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듯했다.

이미 영역 싸움에서 완패했다. 주변에 영향력은 쥐뿔도 행사할 수 없었고 주변의 마력은 그를 배척할 것이다. 강기를 형성하는 것부터가 방해를 받는 수준이다. 그런 상태로 덤벼 봐야 내가 당해줄 리가 없었다.

쩌적.

그가 망설이는 사이 일대의 공간이 빠르게 일그러진다.

레고스트가 기함하며 몸을 뒤로 빼내는 모습을 보였다.

“이건… 마왕의!”

“공작 정도라면 쓸 수 있을 겁니다. 설마, 그것도 모른 겁니까?”

“이렇게 빠르지는… 젠장!”

그가 말하는 사이 어느새 일대 전체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보이며 흔들리고 있었다.

용사는 방어를 포기한 채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사방의 공간이 빠르게 흔들리고 용사가 도망치는 경로가 불안하게 뒤틀린다.

공간의 뒤틀림. 저 사이에 걸려든다면 단숨에 육체가 박살이 나버릴 터였다.

그 강대한 육신을 지녔던 거인들도 저 공격은 피하기 바빴으니까.

그것은 마왕도 마찬가지였다.

방어가 사실상 불가능한 기술.

“항복!”

아니나 다를까 도망칠 공간이 점점 사라져가는 모습에 레고스트는 제대로 공격조차 해 보지 못하고 곧바로 항복해 버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이쪽에서는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인데 반해 저쪽에서는 설마 이렇게까지 개개인의 능력 차이가 날 줄을 몰랐다는 듯한 경악 섞인 탄성이었다.

‘하기야 그들의 희망이었던 용사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나는 가볍게 생각을 떨치며 레고스트를 향해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걸 인간도 사용할 수 있는 거였습니까?”

“수준이 높아진다면 가능합니다. 서윤이도 조금은 할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나와는 조금 다른 개념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어차피 결과는 같았다. 다만 아직 능숙하지는 못했다.

내 말에 레고스트는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다시 도전하고 싶습니다.”

“…또요?”

승산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을 잘 알 터다. 그런데도 재도전을 하겠다는 의사를 표한다. 내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망신이 부족한 건가?’

그러나 레고스트는 한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유신후 님께 저희 파티원 전원이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나는 차갑게 말했다. 아무리 그들이 4차 전직 이후 받은 스킬을 쓴다고 한들 나를 이기지는 못한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전력을 다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대련인 이상 죽이려고는 안 했습니다. 그랬다면… 살아남지 못하셨을 겁니다.”

내 냉정한 말에 저들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감정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목숨이 걸린 일에 가볍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저런 무모한 말을 꺼낸 시점에서 이런 말을 들을 각오는 해야 한다.

“아뇨. 다릅니다. 저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만… 저희 전부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저는 용사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니까요. …신후 님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그의 얼굴에는 작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딘가 간절해 보이는 표정. 분명 그들은 무언가 믿고 있는 것이 있었다.

‘4차 전직 외에 뭔가가 또 있는 건가?’

그들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면 알아두는 것도 좋을 터였다.

“…그렇게 원하신다면.”

“감사합니다.”

시간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괜찮다는 말로 대답한 그들은 곧바로 성녀인 애니디를 통해 자신들의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었던 보르가는 자신들이 단체로 나에게 다시 도전한다는 말에 결의 섞인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입을 함부로 놀렸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들이 몸을 치료하고 진형을 잡는 사이 나서윤이 내게 와 물었다.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오빠?”

저들이 나를 상대로 단체로 덤비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보여줄 것이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구차하고 마음에도 안 들어.”

“일단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는 할 테니까. 알아둘 필요가 있기도 하고.”

“그 대상이 오빠일 필요는 없잖아.”

“뭐, 본인들이 콕 집어 나를 선택했으니까.”

“알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 오빠.”

“그래. 고맙다.”

나는 가볍게 나서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나서윤의 표정이 조금 풀린다.

그녀가 물러나자 레고스트가 입을 열었다.

“그럼, 가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저들의 기세가 일변한다.

‘맞네. 통합.’

4차 전직 스킬 통합. 서로 간에 완벽에 가까울 정도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사기적인 스킬이다. 마치 연결된 서로의 감각과 생각을 공유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스킬은 신기하게도 서로의 정신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직감 수준으로 아군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될 뿐. 그렇기 때문인지 이전 내가 베풀거나 겪었던 것처럼 경지 상승에 도움이 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전투에 한해서는 마치 한 몸마냥 움직이는 현상을 볼 수 있게 된다.

그 효율은 어마어마하다. 연습만으로는 완성이 불가능한 대응을 가능케 해 주었으며 동시에 전력이 단숨에 몇 배나 상승하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심지어 통합 스킬끼리 영향을 받는 아군 간에는 마력이 섞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지경이었다.

‘직접 사용하면서도 되게 신기하기는 했지.’

나 또한 4차 전직의 보상으로 통합 스킬을 얻기는 했으나 나에게는 무의미했다. 서로 생각을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하더라도 현재의 나에게 맞춰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천하의 나서윤조차도 공간 계열 기술을 사용하는 나에게 제대로 맞춰 행동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수준이었으니까.

‘제법이기는 한데…….’

확실히 이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것으로 나를 완벽하게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단숨에 저들 주변의 마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쪽 또한 빠르게 방어를 해 오지만, 고작 숫자가 늘어난 것이 다인 놈들에게 질 이유는 없었다.

단숨에 주변이 장악되고 이전처럼 완전하게 장악할 필요는 없었기에 주변 일대를 완전히 뒤틀어버리기 시작했다.

‘죽어서는 안 되니…….’

“어?”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단숨에 내가 일그러뜨린 공간이 천천히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대량의 신성력. 그것이 공기 중으로 살포되면 공간의 뒤틀림은 하나둘 바로잡기 시작했다.

특이한 문양으로 변해버린 신성력들. 어디서 많이 본 모양이었다.

‘브리니아……?’

열세 번째 꽃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신성력이 대놓고 브리니아의 문양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의 마력과 공간에 신성력이 스며들듯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내 공간 기술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막혀들며 공격이 완전히 무효화 되어버렸다.

물론 내가 당황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탓이 크다. 저항했다면 저리 쉽게 내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것보다 이렇게 손쉽고 안정적인 방법으로 내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것에 너무 크게 놀랐다.

역으로 생각하면 거인들의 공격을 막을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것도 무척이나 안정적인 방법으로.

나는 즉시 다시금 공간을 뒤틀었고 한층 공격을 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느리다. 그것도 무척이나.

동시에 주변을 장악하기도 조금은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도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상상 이상인데.”

“그런 공격을 할 수는 없습니다만… 막을 수는 있습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선물이 뜬금없이 튀어나온 듯했다.

“이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신성력을 이용한 기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애니디 밖에는 사용할 수 없기는 합니다만….”

솔직히 어지간해서는 주하연이나 내가 사용할 수 있을 터인데, 마력의 눈동자로 살펴도 어떻게 해야 사용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애니디의 신성력이 나를 방해하는 효과 말고도 저들의 몸에 직접적으로 파고들어 되려 저들의 능력을 증폭시키는 기능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아무리 통합으로 연결된 아군끼리는 마력간 반발이 없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쓸 줄은 몰랐다. 시도 자체가 위험한 짓을 잘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니디는 버프와 방어를 동시에 해내고 있었다.

내 공격이 어렵게 되자 레고스트 일행이 조금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확실히 이러면 내가 공간을 이용해 상대를 압도할 수는 없을 터다.

하지만, 솔직히 그뿐이었다.

나는 즉시 주변의 마력을 모조리 빨아들이며 거대한 강기를 생성했고 압도적인 크기의 강기 앞에서 어이없어하는 레고스트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직접 상대해 드리죠.”

내 공격을 막아내고 본인들의 능력을 올리기 무섭게 내게 달려들 자세를 취하던 레고스트 파티.

나는 그들을 향해 먼저 달려들어 버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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