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뱀파이어 공작. 첫 목표를 공작으로 잡겠다는 레고스트의 말에 나는 찬성을 표했다. 내가 원한다면 다른 이를 목표로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해도 이편이 가장 효율적이다.
“그렇게 하죠.”
별 말 없이 허락하는 내 말에 용사의 얼굴이 밝아진다.
용사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얼굴은 조금 묘해졌다.
“공작 정도면 상당히 강합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여성 검사, 핑기나의 질문에 주하연이 차갑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우리 수준은 대충 보일 텐데요?”
“그, 뱀파이어들은 생각보다 상대가 까다로워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이전 보르가가 한 짓이 있다 보니 상대의 태도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말을 꺼낸 검사도 괜한 말을 했다 싶은 표정이었다.
“시기는 언제가 좋겠습니까?”
분위기가 더 나빠지기 전에 레고스트가 빠르게 물어왔다.
“최대한 빠르게 했으면 하는군요.”
여기서 분위기가 더 나빠지는 것은 나 또한 원치는 않았다.
보르가 놈이 한 짓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실제로도 나중에 기회를 봐서 손을 봐 줄 생각도 갖고 있었다. 훗날 또 그딴 태도를 취하면 레고스트가 나선다고 하더라도 따로 손을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훗날 우리를 도와줄 이들까지 싸잡아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레고스트의 과한 친한 척이 귀찮기는 하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선을 크게 넘지는 않았으니까.
이정도로 눈치를 보게 만드는 것 정도면 된다.
내가 하루라도 빨리 쳐들어가기를 원한다고 말하기 무섭게 용사는 적극적으로 상대의 정보를 공유하며 위치, 적당한 시기, 이쪽에 참여할 인원들에 관한 이야기 등을 빠르게 내뱉었다.
핀로프 성. 과거 한 왕국의 수도였던 장소. 상당히 멀리 떨어진 장소다. 그럼에도 용사가 이곳을 가장 먼저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의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곧바로 상대의 심장부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상용 텔레포트 게이트? 그런 것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말입니까?”
“네. 제국으로 피신 온 왕족 중 하나가 그 왕국 출신입니다. 게이트 활성화에 필요한 것이 좌표뿐만이 아니라 왕족의 피까지 있어서… 현재까지 망가지지 않은 상태라고 하더군요. 본래는 탈출용이지만 이쪽이 침투하게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왕족의 탈출용이었던 만큼 안정성이 탁월하고 특별히 제작된 것인 만큼 저쪽에서 장난질을 칠 수도 없다고 한다. 차라리 파괴를 당하면 당했지 장난질은 불가능하다고. 과거 궁정 마법사였던 대마도사 수준의 마법사가 제작한 텔레포트 게이트라고 한다.
“문제는 저쪽 또한 이 텔레포트 게이트의 존재 자체를 알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공작이 계속 그 왕궁에서 지낸다는 점입니다. 함정이 있기는 할 텐데…….”
즉 대놓고 다 같이 함정으로 돌진하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용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기껏해야 시간을 끄는 것 정도일 겁니다. 도발용으로 사용당했었습니다. 그거.”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닐 거라는 말. 하기야 애초에 뱀파이어들의 혈마법은 함정에 그리 좋은 기술이 아니다. 직접 사용하는 만큼 그런 쪽은 상당히 잘 알고 있었다.
“저희 수준이라면 그 정도 함정쯤은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을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이전 자신들끼리라면 공작이 작정하고 도망칠 경우 도저히 잡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게, 그들의 전력은 이미 노출될 대로 된 상태였으니까. 충분히 고려했을 터다. 그러나 현재는 그 전력의 수준이 차원이 다르다. 그랜드 마스터가 열이 넘고 대마도사 또한 이쪽과 저쪽을 합치면 넷이다. 성녀도 둘이나 존재했고.
마왕과 공작, 두 백작 모두가 다 같이 함정이라도 파지 않는 이상에야 막을 수가 없었다.
“백작 둘은 선봉장 노릇을 하는 중이니 둘이 나설 때를 노리면 온전히 공작만을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랜드 마스터 없이 전투를 치르는 장소는 아마 피해가 어마어마할 터다. 그렇게 위험한 곳이라면 내 길드원들도 빼버릴 생각이니까. 그러나 공작을 잡는 것은 그만한 희생을 할 가치가 있었다.
결국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습격하겠다는 결론이 나왔고, 즉시 참여할 인원들이 정해졌다.
당연하게도 저쪽은 보르가를 포함한 전원이었고 나 또한 내 파티원 전원과 거기에 더해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프레드와 조연은을 추가했다.
조연은은 궁수로서 유일하게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다. 솔직한 말로 그녀가 벽을 넘을 줄은 몰랐기에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기쁜 오산이랄까.’
이연솔 같은 경우에는 충분히 참여할만했으나, 남아서 길드원들을 통솔 및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나연 같은 경우에는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럼에도 뺄 생각은 없었다. 사샤가 없더라도 그녀는 중급의 바람 정령 하나를 데리고 있었고, 그녀의 정령력이나 친화력, 그간의 경험 등을 생각해 봤을 때 어지간한 상급 정령사 이상의 활약을 해줄 터였다.
거기에 더해 파티원들의 강력한 주장 또한 있었다.
“언니를 빼면 괜히 그놈에게 밀리는 것 같잖아.”
더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고. 나서윤이 강하게 주장했다. 다른 파티원들 또한 마찬가지 의견이었기에 그녀 또한 전력에 포함되었다.
남은주가 전담으로 그녀를 보호할 예정이었다.
‘은주는 이번에 나설 일이 별로 없을 테니까.’
그녀는 악마들의 영역에서 집중적으로 공략당하고는 했었고 몇 번이고 죽을 뻔했었다. 신성력 가졌지만 그녀가 성녀도 아니고 나처럼 벽을 넘은 존재도 아니다 보니 마족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던 것. 마족들은 신성력을 상당히 거슬려 했는데, 주로 만만한 그녀가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덕분에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녀는 상당히 단단해졌고 비록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지키는 것에 한해서는 한바다조차 뚫기가 어려워할 수준으로 발전했다. 반격은 힘들지만, 지키는 것 하나만큼은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었다. 스킬을 극한으로 활용한다고 할까.
그러나 이번 전투에서는 벽을 넘긴 그랜드 마스터가 많다 보니 그녀가 할 일은 크게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참가할 인원까지 정해지자 이후는 간단한 전략 회의가 전부였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고, 가벼운 교류전을 약속하게 되었다.
미룰 이유가 없었기에 교류전은 곧바로 다음 날로 예정되었고, 교류전에는 보르가 또한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처참했다.
“흐음…….”
“저건…….”
용사를 지원하는 기사단의 인원들과 우리 쪽 길드원들까지. 그리 많은 인원이 오지는 못했다. 각자의 역할이 있었고 정보 유출의 가능성도 있었기에 믿을만한 인원 몇만 참가한 채 이뤄진 교류전이었다. 우리들이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는 저쪽도 알긴 알 테지만 그 수준의 뛰어남이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니까.
그 덕분에 이러한 습격도 가능한 것이었고.
그러나 그 수준 차이가 이들이 짐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커억.”
나서윤은 현재 보르가를 가볍게 짓누르고 있었다.
마검사인 그녀에게 도적 타입은 상성상 유리한 면이 있었다. 대련인 이상 습격이 쉽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이렇게까지 압도적일 줄은 보르가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수준 떨어지네. 은신 능력도 부족하고, 상대를 감지하는 속도도 느려. 경지가 아깝다. 그 수준으로 어떻게 언니 실력을 평가질 한 거지?”
사샤만 있었어도 너는 그 자리에서 입이 꿰매졌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서윤의 저러한 태도에도 레고스트 일행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제 보르가가 시비를 걸었던 나연이 나서윤의 친언니라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더는 할 말이 없을 만했다.
그들의 친선전 성적은 무척이나 초라했으니까.
마법사들 간의 전투는 위험성이 너무 크고 친선전이 의미가 없는 관계로 제외되기는 했으나 가진 마력의 양이나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종류를 본다면 이쪽이 압승이다. 애초에 대마도사 수준의 마법사가 셋이다. 하나인 저쪽보다는 당연히 우세했다.
마법사들뿐만이 아니다. 그랜드 마스터들 간의 친선전 또한 이쪽이 우세한 것은 변하지 않았다. 현재 나서윤에게 농락당하는 보르가 외에도 기사들의 대결인 구알라사와 한바다, 검사인 핑기나와 암살자인 하유진 간의 대련에서 이쪽이 압도적으로 이겨버렸다. 특히 하유진과 핑기나의 대결은 하유진이 핑기나의 감각을 완전히 농락한 데 반해 나서윤과 보르가의 대결은 역으로 나서윤이 완전히 갖고 노는 수준이라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나서윤의 경우 본인이 대마도사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은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순수하게 전사로써 상대를 압도하는 중이었다.
그나마 궁수 간의 대결에서 네세네가 조연은을 미세하게 앞서기는 했지만 다른 대결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인 만큼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서윤 님! 봐주지 마세요!”
“어허! 눈 돌아간다!”
“저놈이 다시는 혓바닥을 함부로 굴리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보르가가 나연을 무시했다는 말은 하루 만에 길드원들에게 퍼진 상태였다.
나연은 그 특유의 성격 때문에 모든 길드원들에게 사랑받는다고 볼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그녀를 무시한 보르가의 이미지는 최악의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길드원들의 기세에 저쪽에서 이끌고 온 기사들이 짓눌릴 지경.
조금 불만스러운 기색이 있기는 했으나 잘못은 저쪽이 한 이상 저들도 어쩔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내 길드원들은 제국을 위해 헌신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명분도, 입장도 이쪽이 우위였다.
나서윤의 일방적인 폭력에 보르가는 항복이라는 말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말을 꺼내려 하는 순간 나서윤이 절묘한 공격으로 말을 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길드원들의 환성이 울려 퍼진다.
나연은 조금 어색한 얼굴이었다.
본인이 욕을 먹기는 했고 기분이 나쁘기는 했지만, 저 꼴이 될 때까지 얻어맞을 필요가 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로서는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 충분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십여 분을 더 얻어맞고 나서야 그는 겨우 항복할 수 있었고, 남은 대련이라고는 나와 네고스트의 대련뿐이었다.
네고스트는 쓰러진 보르가를 주워 뒤로 치운 이후 중앙을 향해 나섰다.
“오시죠.”
공적인 상황이기 때문일까. 그는 현재도 내게 말을 높이고 있었다. 이전의 친근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
그러면서도 그는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다. 동시에 무척이나 비장한 표정이었다. 앞서 파티원들이 줄줄이 대파당했다.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세우려면 그가 쓸모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딱 봐도 실력이 대강 눈에 보인다는 것이었다.
솔직한 말로, 내가 아닌 나서윤이 나서도 이길 정도다. 저들이 보여준 모습을 보면 그마저도 제대로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저쪽도 수련의 탑을 나왔을 텐데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나?’
약간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나서윤이 슬쩍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동시에 들려오는 전음.
―내가 대신할까?
―…아니. 나서지 마.
일단은 친선전이다. 상대 파티의 리더가 나왔는데 이쪽에서는 나서윤을 보내는 것은 나중을 생각했을 때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미 나서윤은 전투를 치른 몸.
저만한 실력도 분명 도움이 된다. 아무리 우리보다 부족하다고는 해도 벽을 넘은 사람을 함부로 대해 감정이 상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앞으로 나섰고, 검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전력을 다하기를 원하십니까.”
“…예.”
사실상 대답이 정해진 질문.
이미 앞서 우리 일행의 실력을 보았다. 그런 만큼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을 터다.
애초부터 주도권은 쥘 생각이었고 시작은 저쪽의 보르가 놈이 먼저 했다.
나는 단숨에 모든 힘을 개방하며 레고스트를 노려보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