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베노리온 제국. 이쪽 세상에서 유일하게 국가의 기능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국가이기도 하며 브리니아 교의 총 본산이 속해 있는 국가이기도 했다.
우리의 적응기 동안 전혀 간섭을 하지 않던 곳이기에 딱히 신경을 쓰지는 않았었다. 그렇다 보니 갑작스러운 호출이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다.
황제의 부름 소식이 들리기 무섭게 교황이 우리를 찾았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게 해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황제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노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 달간 몸에 적응을 하며 수많은 전장에 영향력을 끼쳤다. 실제로 내 길드원들이 참여한 전장은 하나같이 깔끔하게 처리가 되었고, 그러한 소식이 황제의 귀에 안 들어갈 수는 없었을 터다.
적응 기간도 사실상 끝났다 보니 더는 막을 명분이 없었다고.
“사실은 레고스트 용사님께서 첫날 늦으신 것도 폐하와 독대를 하시느라 그랬던 것이더군요.”
그러나 지금 그 레고스트는 전장 한가운데 있었고 황제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부른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말씀을 안 하십니다. 하지만…….”
교황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당장은 보여주기가 목적인 것 같기는 합니다.”
“보여주기라…….”
교황의 의견은 간단했다.
마왕의 침공으로 대다수의 국가가 멸망했고 현재 제 기능을 하는 국가는 베노리온 제국이 유일하다.
하지만 과거 왕족이었던 이들이 모두 사망한 것은 아니었다.
무사히 살아남은 왕족이나 귀족들이 베노리온 제국에는 다수 존재했고 그런 이들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다는 대답이었다.
“마왕의 침공을 무사히 막아낸 다음도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후 유신후 용사님의 고향인 지구와 연결된다고 하는 만큼 미리 안면을 트실 생각이시겠지요.”
“…그렇군요.”
그건 이쪽에도 나쁜 일은 아니다. 타이밍이 좋다고 볼 수는 없기는 하다만, 미래를 생각하면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교황은 미안해했으나 나는 이러한 일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거절하기 힘들기도 했고. 나름 일국의 황제가 먼저 초대한 것이다. 아무리 용사, 그것도 타 세계의 용사라고는 하나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홀로 황제의 초대에 응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흔쾌히 응해 주어 반갑소.”
카브리쉬 베노리온.
황제는 제법 이른 나이에 황제위에 오른 듯했다. 제법 완숙한 위엄을 뽐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로 보였으니까.
상당히 열정적인 성격으로 보였다.
“늦었지만 제국의 황제로서 우리 세계를 위해 도움을 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소.”
“거래일 뿐입니다.”
“그렇지. 우리도 도움을 드려야 하는 입장이니.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 뒤로 이어지는 말들은 소소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힘든 점은 없는지,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제국의 분위기나 현재 제소시아 세계의 상황 등 간단한 이야기들에 불과했다.
황제가 직접 부른 것치고는 대단치 않은 이야기들이거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교황의 예상이 맞았군.’
일단은 보여주기 성격과 안면을 트는 목적이 강한 모양이었다.
한참 겉도는 듯한 대화가 끝나갈 무렵 불쑥 황제가 입을 열었다.
“승산은 어떻소?”
마왕과의 전투.
마왕에 의해 세계의 절반 가까이가 점령당한 세상이다. 아무렇지 않게 물어본 듯했지만 황제는 조금 긴장한 듯했다.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소이까.”
황제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대는 레고스트와는 다른 듯하오.”
“…….”
“제국에는 여러 멸망한 왕국의 생존자들이 존재한다오.”
“그렇습니까?”
“다음에도 또 만났으면 하오.”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간접적인 제안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로 돌아간 뒤, 거인들을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수련자들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터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하겠지. 그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일 터다.
그럼에도 돌아가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렇기에 미래에 연결될 세계의, 사실상 하나 남은 국가와의 연줄은 내게 있어서도 상당한 이득이다.
황제와의 별것 아닌 독대가 끝난 이후 마왕군의 침공을 재차 막아낸 레고스트가 급하게 우리를 찾아왔다.
“폐하를 만나 뵈었다고 들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내 모습에 레고스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별일 아니었다.”
“그래? 흐음…….”
그 황제가 그럴 리가 없다며 중얼거리는 레고스트.
황제와 사이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적응을 끝냈다고 들었어.”
“그래.”
여전히 친한 척 말을 거는 레고스트를 향해 적당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함께 움직이자. 네 길드원들이라고 했던가? 하나같이 대단한 실력자인 덕분에 방어가 수월해 졌으니까.”
나는 레고스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같이 움직이기는 해야 한다. 당장 마왕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우선은 같이 행동하며 적의 세력을 깎아내고 난 이후에야 수월하게 마왕과 싸울 수 있을 거다.
내가 허락하기 무섭게 레고스트의 표정이 밝아진다.
따로 행동하겠다고 할까 봐 걱정한 듯했다.
개인적으로는 따로 행동해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저들이 실력 정도는 직접 봐 두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는 같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나와 내 일행은 가장 최전선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레고스트의 일행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중성적인 느낌의 여성 기사 구알라사와 말수가 적어 보이는 마법사 캐터리, 활발해 보이는 성격의 검사 핑기나와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엘프 궁수 네세네.
거기에 더해 성격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 남성 도적인 보르가, 마지막으로 차분한 느낌의 성녀 애니디까지.
용사를 포함한 이 일곱 명이 용사의 직속 파티인 모양이었다.
“이들이 그 지구의 용사 파티인가? 흐음…….”
이미 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적, 보르가는 우리들을 슥 살피며 입을 열었다.
“나름 쓸만해 보이기는 하는데… 수준 떨어지는 이들은 왜 데리고 온 거지?”
보르가는 공격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거기 성기사 정도라면 뭐… 부족하기는 하더라도 버티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은데, 거기 너. 정령사. 걔는 왜 데리고 온 거냐? 최전선이 우습나?”
갑작스러운 시비에 일행의 얼굴이 굳는다.
“보르가 씨.”
레고스트가 딱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야! 너 또 그 더러운 버릇 나오냐? 적당히 해!”
검사인 핑기나가 그러한 보르가에게 분노를 표했다.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레고스트의 다른 일행들도 명백하게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저거 지켜줄 생각 없으니까,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나머지 인원은 뭐… 환영한다.”
자신의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보르가라 불린 남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말을 끝낸 뒤 자리를 피했다.
“…죄송합니다. 저분 성격이 조금…….”
‘…뭐지 저 병신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내 일행들 또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보르가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유진 같은 경우에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허락만 해 준다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는 듯했다.
슬쩍 눈을 굴려 나서윤을 바라보자 표정이 완전히 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지간히 분노한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는 정령사입니다. 정령이 특별한 녀석이라 아직 조정 중에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습니다만, 분명히 전력에 도움이 될 겁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용사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왔다.
서로의 일행이 있기 때문인지 평소의 가벼운 모습이 아니었고, 나 또한 그러한 상대에게 맞춰주었다.
물론 그냥 지나가지는 않았다. 보르가라는 놈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 후에도 그런 행동을 할 경우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또다시 그럴 경우에는… 제가 직접 징계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그런 레고스트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였다.
첫 만남이 엉망이기는 했지만 다른 일행들은 정상적이었는지 무사히 소개를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저쪽이 실수를 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주도권은 이쪽으로 완전히 넘어와 버렸다.
레고스트는 서로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대강은 들으셨겠지만… 저희 세계는 절반 가까이가 마왕에 의해 점령되어 있습니다. 종족은… 뱀파이어입니다.”
공적인 자리이기 때문인지 그는 상당히 진중한 어투였다.
“마왕의 이름은 테켈. 휘하에 고위 귀족 개체를 네 마리나 거느린… 강대한 마왕입니다.”
고위 귀족 개체. 작위를 가진 뱀파이어, 그들 중에서도 백작급 이상의 뱀파이어들을 뜻한다.
“공작급이 하나에 백작급이 셋입니다. 백작급이라고는 해도 휘하에 거느린 뱀파이어들 수가 너무 많아서… 아무리 벽을 넘으셨다고는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 혼자서는 도저히 백작급 귀족 개체 하나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묵묵히 레고스트의 말을 경청했다.
실제로 그렇기는 했다. 상층의 악마들의 영역에서 만났던 마왕 또한 비슷한 숫자의 고위 귀족들을 거느렸었고, 백작급 정도면 휘하의 뱀파이어들이 수천이다.
통칭 가문이라 칭하는데 마치 내 휘하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합동 마법 마냥 그 힘을 공유할 수가 있어서 상대하는 것이 무척이나 까다롭다.
“우선은… 그런 귀족 개체를 먼저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지금 그들은… 여러분의 존재를 잘 모르니까요.”
워낙 소규모 전투에만 참여하다 보니 우리의 실력을 제대로 드러낸 적이 없기는 했다.
“곧바로 마왕을 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위 귀족들을 처리하지 않는 한… 마왕은 죽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경험해 보았으니까.
‘확실히 귀찮기는 했지.’
“그럼 목표는 고위 귀족일 텐데… 누굽니까? 목표는.”
레고스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본래라면 백작부터 차근차근 공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여러분의 힘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현재 상황이 너무 아깝더군요. 마왕은 불가능한 만큼, 저희는 저들의 이인자를 공략하고자 합니다.”
공작이 하나 백작이 셋.
방금 했던 말이 머리를 스친다.
“저희의 첫 목표는 베스웨이퍼.”
지도를 꺼내 든 레고스트가 한 장소를 짚으며 조용히 말했다.
“뱀파이어 공작입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