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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76화 (276/317)

276화

레고스트의 행동에 대부분의 성직자들과 교황까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무례하다면 무례한 행동이었다. 뒤늦게 등장해서는 교황과 이야기하고 있던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온 것이었으니까.

나는 내게 내밀어 진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감이 넘치는 것이라고 봐 줄 수도 있었다. 늦은 것도 지금 이쪽 세계의 상황을 생각하면 감안해 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내가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후에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나는 슬쩍 눈을 돌려 교황을 바라보았다.

교황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내림으로서 내게 미안함을 표시했고, 나는 그제서야 상대의 손을 마주 잡으며 입을 열었다.

“반갑다. 유신후다.”

“아하하. 네가 이번에 우리를 도와줄 구원군이구나. 확실히 대단한데. 내 파티를 제외하고 이만한 힘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 봐.”

초면부터 상당히 친한 척 구는 용사의 태도에 나는 대답 대신 묵묵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확실히 쓸만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래도 한 세계의 마지막 희망 취급을 받는 용사다. 용사라는 이름에 부끄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일단 벽은 확실히 넘었고, 내 눈에 띄는 사소한 움직임들부터가 가벼운 말투나 행동과는 다르게 빈틈이 없다시피 했다.

최소한 2등위는 넘어서는 실력. 그렇게 판단이 되었다.

외모는 약 20대 중반 정도로 보였지만 저 경지라면 외모와 같은 나이는 아닐 터였다. 솔직한 말로 나 또한 외모는 탑에 입장했을 당시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는 모습이다.

“와줘서 고마워. 정말 힘들었었는데… 겨우 살았어.”

확실히 그는 진심으로 우리를 반기는 눈치였다.

“여신님께 이야기는 들었어. 우리와 비슷한 처지라고……. 도와준 만큼 나 또한 최선을 다할거야.”

“그래.”

일단 당장 겉으로 보이는 심성 자체는 나빠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교황님. 갑자기 끼어들어서. 너무 반가운 나머지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아닙니다. 용사님.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확실히 그간 저희를 위해 크게 무리를 해 오셨으니…….”

내가 용사의 무례를 눈감아 주고 자신에게 사과까지 해 오자 교황은 긴장된 표정을 풀며 이해한다는 모습을 보였다.

‘하기야 이해할 수밖에 없기는 하다만…….’

교황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는 하니까.

내심 생각을 조금 달리했다.

당장에야 겉으로 보이는 심성이 나빠 보이지 않겠지만 상황 자체가 자신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함을 알고 일부러 저리 행동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용사가 교황에게 인사를 하는 사이에 나는 다른 용사 파티의 인원들을 살폈다.

일단 용사 파티에서 그랜드 마스터로 보이는 자들은 용사 본인을 포함해 다섯 명.

기사로 보이는 여자와 도적으로 보이는 남성. 거기에 활을 든 엘프와 장검을 허리에 찬 여성. 여기에 용사 본인을 포함해 다섯이었다.

‘마법사도 만만해 보이지는 않고…….’

조용히 용사와 교황을 바라보는, 강대한 신성력을 품고 있는 여성 또한 눈에 띄었다.

‘이쪽 세계의 성녀인가.’

내가 자신들을 살피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용사 파티원을 또한 내 일행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경계심과 반가움, 거기에 찬탄이 섞인 복잡한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내 일행들은 대부분 용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교황과 용사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용사가 다시금 내게 찾아왔다.

“방금 탑에서 나왔지? 적응이 어렵지는 않아?”

“괜찮다.”

“그래? 그래도 당분간은 쉬면서 몸을 점검하는 것이 좋을 거야. 우리도 다들 그랬거든. 아, 우리도 탑 출신이야. 너희처럼 처음으로 탑을 나선…….”

나는 수다스럽게 말을 해대는 용사를 적당히 상대해 주었다.

확실히 막 탑을 나오면 느낌이 다르기는 하다. 일단 시스템을 더는 사용할 수 없게 되며 상태 창을 불러올 수 없게 된다.

탑을 나올 때는 몸 자체가 완전히 재구성되어버린다. 환골탈태와는 조금 다르다. 더는 시스템의 보정을 받지는 못하게 되지만 스킬들과 보정 받던 능력치들이 탑 밖에서는 완전한 본인의 힘이 될 수 있도록 체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탑에 있을 때에 비해 약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느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사실이다. 약간의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렇기에 당장은 전투에 끼어들기보다는 쉬며 적응 기간을 가지라는 용사의 말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이쪽 세상에서는 나름 상식이었는지 교황 또한 우리를 위해 별채를 준비하며 비슷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한 달 정도는 적응 기간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작은 규모의 실전도 나름 도움이 되실 겁니다. 혹여 실전을 선호하신다면 적당한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놈들은… 언제든지 쳐들어오니 말입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확실히 교황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이쪽 세계의 용사인 레고스트는 내게 접근해 여러 말을 걸다가 마왕 쪽 세력의 습격 사실을 듣고는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하고는 곧바로 자리를 비웠으니까.

그렇다보니 싸울 장소 자체는 남아도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머물 장소를 제공한 뒤 교황이 자리를 떠나자 일행들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용사라고 불릴 만은 하네요.”

시작은 주하연이었다.

“나는 그 용사라는 놈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저도 그래요. 안 그러는 척하면서 은근히 우리들 훑어보고.”

“확실히 그런 시선을 느끼기는 했지.”

나서윤과 하유진, 한바다가 차례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실력은 괜찮아 보이기는 했는데…….”

“그건 맞아. 벽을 넘은 놈들만 다섯이었으니까. 마법사도 나름 쓸만해 보였고.”

나연의 중얼거림에 한바다가 대신 대답해 준다. 현재 나연은 잠들어버린 사샤 때문에 기감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사샤는 다른 정령과는 다르기 때문에 탑 밖으로 나온 뒤 신체를 조정하는 과정에 있었다. 사샤는 수련자는 아니나 나연 덕분에 시스템의 여러 보정을 받고 있었고 탑 밖으로 나오며 그러한 것들을 신체에 체화시키기 위해 현재는 알 형태가 되어 나연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저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때문에 한바다가 그녀를 철저하게 보호해 주는 중이었다.

“그 마법사, 아마 연솔 언니 수준은 될걸?”

“…그정도야?”

“대충 느껴지는 걸로 봐서는.”

나서윤의 말에 다른 일행들이 놀란다.

이연솔은 현재 나서윤이나 아멜리아 못지않은 수준의 마법 실력을 갖고 있었다. 길드원 전체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인재이며 순수 마법 실력만으로 대마도사라고 불릴 수준에 달한 이다.

솔직한 말로 공격력에 있어서만큼은 어지간한 그랜드 마스터보다 강한 만큼 저쪽 마법사 또한 상당한 전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여기에 온 보람은 있는 것 같아요.”

“오빠가 괜한 짓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

“게다가 저건 용사 파티일 뿐 다른 전력도 분명 있기는 할 거고.”

일행들은 레고스트가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올 만한 가치는 있었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길드원들 또한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이쪽 세상에서는 죽으면 정말 죽습니다.”

내가 입을 열자 주변이 고요해지며 나를 향해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렇기에 행동 방침은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입니다.”

“확실히 여기서 죽으면 화는 엄청날 것 같습니다, 길드장님.”

한 길드원의 대답에 가벼운 웃음이 퍼진다.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타 세계를 구하는 과정에서 죽는다면 확실히 억울하기는 할 거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이곳의 적도 뱀파이어 로드입니다.”

내 말에 모든 길드원들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층, 악마의 영역 마지막 보스는 마왕인 뱀파이어 로드였고 거기서 우리는 상당수의 전력을 잃어버렸다.

“같은 개체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유리하지는 않습니다.”

“…….”

“그렇기에 인원을 나눕니다. 아마 이쪽은 반격을 원하겠죠.”

전력, 특히 그랜드 마스터 전력이 따로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본 용사 파티가 다라면 전력이 단숨에 두 배 이상 늘어난 거다.

당연하게도 이쪽 세계에서 언제까지 방어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한 달 정도 지내며 몸이 완전히 적응된다면 하루라도 빨리 이쪽 세계의 일을 마쳐야 한다.

나와 일행들, 길드원들 사이에서 공통된 하나의 열망이 흘러나왔다.

무사히 지구로, 집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거인의 침략을 저지한다.

“반격을 원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수비를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나는 내 직속 파티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를 포함해 일부 인원만이 공격에 가담합니다. 나머지 인원은 수비에 치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쪽이 허락해 줄까요?”

“저희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저들이 뭐라고 한들 그렇게 할 겁니다.”

주하연의 걱정을 단칼에 끊어 낸다. 우리에게는 충분한 힘이 있었다. 저들이 싫어한다고 한들 쉽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도와주러 왔다고는 하지만 저들이 원하는 대로만 움직여줄 생각은 없었다.

“살아남는 것. 그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세요. 그리고 마수의 사용은 불허합니다.”

애초에 사용할 수도 없었다. 현재 미궁 조각은 내 개인 공간만 연결되어 있을 뿐 탑 내부의 미궁과는 완전히 연결이 끊어져 있었다.

그에 관해서는 열세 번째 꽃에게 말해 보았지만 현재 자신은 힘을 모두 소진한 상태인데다가 사안이 워낙 중해서 가이아와 함께 이야기를 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아키밀리의 제안에 대해서는 이후에 생각하도록 하겠다고. 하지만 일단은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미 지구와 연결된 마당에 연결된 세계가 하나 정도 더 추가되는 것을 꺼릴 이유는 없다고. 더 위험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가 연결된 이상 어차피 엄청난 차이는 없을 거라고 말했다.

우리의 행동 방침을 정하기 무섭게 우리는 곧바로 교황을 통해 소규모 전투가 일어나는 곳으로 인원을 분산시켰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전투를 통해 익숙해지는 것이 더 빠를 터다.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행동해 오기도 했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에 교황은 감사를 표해 왔다.

그러나 일부 인원들을 제외하고는 수비에만 치중할 것이라는 말에 조금 난색을 표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쪽 세계의 용사, 레고스트의 말로 인해 간단히 해결되었다.

“애초에 벽을 넘은 이들이 아니면 별 도움이 안 됩니다. 마왕은… 상당히 강해요.”

이미 한 차례 마왕과 싸워본 경험이 있다는 용사는 내 선택을 지지했다. 그 덕분에 교황을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약 한 달간 나와 내 길드원들은 몸을 적응시키는 기간을 가졌고 용사 레고스트는 바쁜 와중에도 그런 우리를 간간이 찾아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덕분일까. 최초의 태도 때문에 용사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내 일행들도 차츰 그런 용사의 행동에 익숙해져 갔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몸을 완전히 적응시키기 무섭게 이쪽 세계의 황제라는 놈이 우리를 불러들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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