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75화 (275/317)

275화

제소시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열세 번째 꽃. 정원이니, 꽃이니, 아름다움이니 할 때부터 예상하기는 했지만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미(美) 계통인 모양이었다.

“반가워요. 구원자분들. 제 이름은 브리니아. 제소시아를 관리하는 여신이랍니다.”

구원자. 다른 말로는 용사. 우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브리니아. 확실히 미 계통이기 때문인지 엘프 뺨치게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강대한 신성력은 그녀의 분위기를 한층 더 성스럽게 만들어 주었으며 가련하면서도 닿을 수 없는 것 같은 신비스러운 느낌과 함께 스스로를 신으로 칭하는 만큼 숭배해야 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하고 있었다.

어딘가 뒤죽박죽이면서도 동시에 당연하다는, 당당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뵙는군요.”

실제로 내 정신은 그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대부분의 길드원들 또한 그녀를 쳐다보며 그 모습과 분위기에 취하기보다는 완전히 달라진 환경에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악마들의 영역, 마계에서 빠져나온 것에 더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힘들기는 했지.’

300이 넘는 마법사들과 200에 가까운 정예 길드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고 아마 상층을 탈출해 지구에 도착했을 터다. 시간이 멈춰 있어서 내가 지구로 돌아가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만.

‘그들에게는 한순간이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수가 희생되었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전력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확실히 보통이 아니기는 하네요.”

내 단호한 말에 브리니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수는 확 줄었지만, 우리의 질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황이다.

거인의 영역과 비교했을 때 악마들의 영역에서 훨씬 큰 희생이 있었다. 원인은 다양했다. 마수들도 사용할 수 없었고 영역 자체의 환경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악의 환경이었으며, 마족과 우리들의 상성이 좋지 못했다.

거인의 층에서 상당히 단련이 되었던 우리들이다. 올릴 수 있는 한계까지 강해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악마들의 층은 정말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마계의 공기 자체가 우리를 환영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공격력의 대부분을 마법사들에게 유지했던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사방을 채운 것은 마기들이었고 사용한 마력을 보충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대부분은 휴식과 안전을 위해 미궁으로 들어가야만 했을 정도였다.

마수들을 사용할 수 없었던 이유도 이것이었다. 사방이 마기였기 때문인지 마수들을 향한 지배가 자주 흔들렸던 것.

마법사들은 대부분 짐덩이로 전락했으며 최상위 종족인 마족들은 개개가 거인보다는 약했으나 그 다채로운 전법과 기괴한 공격 방식들 때문에 우리들이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한 공격에 짧은 시간 만에 적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초기 전투는 그럭저럭 잘 버텼지만 이후 끝없이 싸우는 과정에서 일행들은 지쳐갔고 짐덩이로 전락한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희생되었다. 중간에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미궁으로 대피해야만 했고, 마왕과의 전투에서는 결국 상당수의 마법사들을 포함한 길드원들이 쓸려나가는 상황이 찾아와 버렸다.

물론 그러한 경험들 덕분에 그랜드 마스터들이 탄생하고 혹독한 조건에서 마법을 단련한 마법사들의 수준이 어마어마하게 높아졌지만.

게다가 살아남은 길드원들은 전원, 4차 전직을 달성하고 이제껏 없었던 특수 스킬들을 획득했다. 스킬 슬롯조차 사용하지 않는, 특수한 보상.

최종 레벨인 100. 살아남은 길드원들은 전원 그 레벨에 도달했다.

현재 나의 길드원들은 하나같이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되어 있었다. 벽을 넘은 자들은 없다시피 하더라도 지금이라면 서넛 정도만 모여도 1등위의 전사 거인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걸 가능케 하는 스킬을 4차 전직과 동시에 얻어버렸다.

“약속을 지켜 줘서 고마워요.”

“저희들이 먼저일 뿐입니다.”

“알고 있어요. 저 또한 약속을 어길 마음은 없답니다. 애초에 그럴 수도 없고요.”

브리니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순간 머리가 순간 아찔해지는 미소였다. 어지간한 수련자들이라면 저 미소 하나에 목숨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를 포함한 내 휘하의 길드원들은 어지간한 수련자가 아니기에 소용없었지만.

이쪽이 저들의 위기를 돕고, 이후 저쪽의 인재들이 우리 세계를 돕는다. 두 세계가 동맹을 맺는다고 볼 수 있었다.

그 대가로 두 세계가 연결되어 버릴 테지만.

세계가 연결이 된다는 것은 세계의 벽이 얇아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만큼 침략받기 쉬운 차원으로 전락하는 만큼 어지간히 강력한 힘을 갖춘 세계라도 타 세계와 연결되는 것은 꺼릴 만했다.

저렇게 연결이 되어버리면 다시 끊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지는 데다가 서로가 연결이 된 만큼 서로를 침략할 가능성마저 생겨버린다.

하지만 지구와 이곳 제소시아는 선택권이 없었다. 사실상 도움을 받는 것을 거절당하다시피 한, 망하기 직전인 차원들이다.

지구의 거인, 제소시아의 마왕.

우리가 괜히 악마들의 영역을 다녀온 것이 아니었다.

‘직접 보니 느낌이 많이 다르군.’

시스템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 같았다.

“저의 세계에는 그대들의 도착을 미리 말해 놓았답니다. 덕분에 저는 한동안 세계에 간섭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요.”

그 때문에 나와도 더는 대화가 불가능했다고.

“상대 마왕은 역시…….”

“네. 강림한 마왕은 뱀파이어 로드에요.”

실제로 악마들의 영역에서 우리가 상대했던 마왕은 뱀파이어 로드였다. 뱀파이어로서, 마왕의 위에 오른 자. 물론 완전히 다른 개체일 테고, 어디까지나 참고에 지나지 않으나 경험을 해 본 것은 분명히 도움이 될 터다.

나는 마왕에 대한 여러 정보를 브리니아로 부터 얻었다. 세력의 크기, 위치, 그들의 특성들. 현재 제소시아는 절반 가까이가 마왕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다수의 인간이 마왕의 노예가 되었고, 배신자들이 줄을 이었으며 심지어는 마수들까지 이용한다. 게다가 이쪽에도 수련의 탑이 나타났는데, 지금은 쓸모가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저들이 마수를 사용하는 것은 이해할 만했다. 인간과 다르게 마기를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일부이기는 하나 마수들이 복종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악마의 영역에서 충분히 겪어본 상황이다.

“저의 계약자인 당신이라면 비교적 쉬운 상대겠죠. 운이 좋았어요.”

비교적 쉬운 상대. 틀린 말은 아니다. 피의 주인 스킬이 있는 이상 다른 종족이 마왕인 것보다야 한결 수월할 터였다. 악마들의 영역을 거치며 여러모로 그 가능성과 스킬의 사용 방법을 깨달은 이상 어지간한 뱀파이어들은 내게 대응조차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상대는 마왕이다. 기본적으로 군세를 거느리는 마왕의 특성상 얕봤다가는 이전의 참상이 재현될 뿐이다.

‘여기서 죽으면 진짜로 죽는다.’

상층과는 달랐다. 이미 탑을 나온 이상 여기서 길드원들이 죽는다면 실제로 죽는 것이다. 여기서 죽는다면 개죽음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정보를 전달하기 무섭게 브리니아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다른 차원의 신들이 우습게 되었네요. 단 한 명의 수련자조차 빼내지 못했으니…….”

탑을 나오는 과정에서 과거 있었던 일처럼 일종의 경매 시간이 있기는 했었다.

가이아는 현재 육체가 잠들어 끼어들지는 못했지만, 그 영향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우리들 모두 타 차원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거절해 버리자 저쪽에서 손을 쓰지는 못했다.

몇몇 인원들, 대표적으로 한바다 같은 경우에는 히든 클래스였던 만큼 저쪽에서는 강하게 설득해 왔지만, 얄짤 없었다.

그 과정에서 회귀 전 만났었던 천사를 다시금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떨거지라 비웃었던 천사. 그러나 이번에는 일절 그러한 태도를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러할 이유가 없기도 했고. 1회차 시절에도 마지막에는 결국 나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던 기억이 있는 만큼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용사가 하나같이 최소가 5성급에 등급 외 판정을 받은 인원들 또한 무더기로 나왔으니 군침을 흘릴만했어요, 확실히.”

그녀는 한껏 신이 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열세 번째에 불과하니, 곧 망할 차원이니 떠들던 신들이 여러분이 저희 세계를 돕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지은 표정을 여러분도 보셨어야 했는데.”

‘…그 성격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군.’

브리니아의 말에 길드원들의 얼굴이 조금 떨떠름해진다. 저 외모로 수다스럽게 다른 신들을 욕하는 모습이 어딘가 신비스러웠던 그녀의 이미지를 완전히 부숴버린 모양이었다.

별로 영양가가 없는 이야기였기에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하루라도 빨리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휴식도 취해야 하고, 대비도 해야 하니까요.”

내 말에 브리니아는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곧바로 표정을 바로 하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바로 이동시켜 드릴게요.”

곧바로 허공에 빛이 뭉치더니 하나의 게이트가 되었다.

“다시 한 번 환영하겠어요, 구원자님들. 제소시아를 잘 부탁드려요.”

이전보다 더욱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브리니아를 향해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나와 길드원들은 곧바로 게이트를 통과했다.

* * *

빛의 길을 지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브리니아의 형상을 조금 흐릿하게 만든 듯한 여신상이었다.

거인의 영역에서 보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여신상.

시선이 간 것도 잠시, 나는 곧바로 우리를 환영하는 무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오… 여신이시여… 감사드립니다.”

성직자로 보이는 수많은 인원들.

그런 그들 앞에는 한 노인이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나올 때마다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노인 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성직자들 또한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 수가 수백에 이르자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환호하고 있었다. 성당 내부 같았는데, 내부가 웅웅 울릴 정도의 함성이었다.

“여, 여러분이 타 차원의 용사님들이십니까?”

“맞습니다.”

감동에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묻는 노인. 느껴지는 신성력의 양으로 보아 최소 추기경 내지는 교황 수준인 듯했다.

용사라는 말이 조금 어색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은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 긍정에 노인이 무척이나 기쁜 표정으로 외쳤다.

“브리니아 여신이시여, 저희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감사드립니다. 믿고 있었습니다… 으흑…….”

“성하…….”

“용사님들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만 눈물을 멈추시지요, 성하.”

‘정말 교황인 모양이군.’

교황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신 기도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진정되기 무섭게 교황이 입을 열었다.

“이곳의 사정은 알고 계십니까?”

“여신님께 이미 들었습니다. 마왕 때문에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이라고…….”

“맞습니다. 저희 세계의 용사님과 그 동료분들이 최대한 노력하고 계십니다만, 마왕의 세력이 너무 강대하여…….”

교황이 입을 여는 사이 거대한 기척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마족은 아니다. 분명 인간의 기척이었다. 기세를 숨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시선을 돌리자 교황 또한 이 기척을 느꼈는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쿵.

단숨에 문이 열린다.

교황이 함께하는, 나를 맞이하는 장소였다. 그런 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결코 얕볼 수 없는 수준의 힘을 가진 이들. 최소한 벽을 넘은 이들이 다섯이다.

‘용사인가?’

미래,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지구를 도울 이들이다. 적대할 필요가 없는 자들.

“이런, 벌써 왔네. 늦어서 미안.”

그런 놈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반가워. 나는 이 세계의 용사인, 레고스트라고 한다.”

말과 함께 가볍게 내밀어 진 손. 나는 그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