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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69화 (269/317)

269화

상층에서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고, 준비해 온 것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1회차의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고 충분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상당히 부족했었다. 경지도 그렇고, 거인들의 힘도 그랬다. 상당한 준비를 해 왔었는데도 엄청난 희생을 치르지 않는다면 상층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맞추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아마 1회차에서 상층에 올라온 인간들은 그 높은 벽에 절망했을 터다. 타고난 종족의 벽은 무척이나 높고 견고했다.

‘그럼에도 플로어 마스터들은 그들을 상층으로 올렸지.’

오랜 시간 버텨낸 그들을 플로어 마스터들은 상층으로 올리게끔 만들었다. 지금의 플로어 마스터들에게 물어봐야 소용은 없었다. 그건 과거의 플로어 마스터들이 했던 선택이니까.

이유 자체는 짐작이 간다. 고향인 지구가 위기에 처했는데 최상위권 수련자라는 것들이 고향을 버리고 안주하려 했던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터다.

플로어 마스터 중에는 관리자 출신이 많다고 들었으니까.

게다가 중층에서 할 수 있는 성장은 정해진 편이었다. 한계를 넘으려면, 결국 상층으로 가야만 한다.

설령, 거기서 대부분이 죽어나간다고 하더라도.

1회차와는 다르게 나는 한정된 중층의 자원을 내가 선택한, 재능 있고 의욕이 있는 이들에게 모조리 집중했다. 그 결과 과거와는 다른 수준의 집단이, 무척이나 이른 시간에 탄생했다. 단일 집단으로 이만한 규모와 힘을 지닌 경우는 1회차의 역사에서도 없었다.

그렇기에 중층을 정리한 채 상층으로 올라왔고, 높은 벽을 만나버렸다. 그랜드 마스터 사이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상층에서 제대로 겪었으니까. 중층의 그랜드 마스터들은 솔직한 말로 고만고만한 것이었다.

가이아의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던 그 차이를 체감했다.

그래도 그간 다른 사람들을 키워온 것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마수라는 대안을 찾아냈고 지금에 와서는 마수가 없어도 충분히 상층에서 해 볼 만한 힘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마수는 계속 쓸 테지만.’

기껏 얻은 것을 썩힐 수는 없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이용해야 한다.

길드원들은 예상대로 대부분이 벽을 만나버리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다.

확실히 상층에서의 경험은 중층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최상급의 마스터를 달성했고 재능이 상당히 중요한 마법사들도 상급 마법사가 10명이나 나와버렸으니까.

길드원들의 평균 레벨은 90 중반에 다다랐다. 가장 높은 내가 98. 거인을 그렇게도 죽여대었는데도 아직 4차 전직까지는 두 걸음이나 남아 있었다.

왜 중층에서는 4차 전직이 불가능한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중층에서 귀했던 것들은 상층에서는 필요한 조건에 지나지 않았으며 상대가 강한 만큼 우리들 또한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커니더의 반응은?”

“싸울 생각으로 보입니다. 자신들이 불리하다는 사실은 알지만… 아무래도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항복은 없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거인의 고향, 통칭 둥지로 돌아가겠다는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최고의 소식이다. 애초에 둥지에서부터 둘의 파벌은 달랐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절대 힘을 합치지는 못 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고 역시 둘이 힘을 합하는 상황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처럼 고향이 위험하기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이유가 있을 터.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은 알 바가 아니었다.

저들을 모조리 죽이고 우리 또한 성장하여 나가는 것이 목표니까.

“여신상이 다섯 개라고 했던가?”

적색, 청색, 녹색, 황색, 자색.

황색을 제외한 네 개를 각각 둘이서 나눠 가진 상태라고 한다.

다른 하나를 우선적으로 수색하고 있었지만 한쪽이 약해지기 무섭게 약탈 본능이 일어난 상태.

‘다른 하나를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정말 편한데…….’

하지만 수색은 위험하다.

4개 모두 중앙 쪽에서 발견되었다고 들었다. 우리가 외부에서 야금야금 갉아먹기는 했지만 지난 반년간 본격적으로 중앙을 침공한 적은 없다시피 했었다. 반란군들이 신경을 쓰고 있지만 도시 내부라면 모를까 노예인 그들이 도시 외부에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일 중요한 순간인 만큼 끝까지 조심해야만 한다.

지금 쯤이면 저들도 외부의 세력이 개입했다는 사실 자체는 알 터다. 하지만 그럼에도 눈앞의 적이 더 중요할 뿐. 하기야 그 정도 세력이라면 확실히 무서워할 이유가 없기는 했다.

“우리는 움직임을 멈춘다. 최대한 지켜만 보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반란군 쪽에서 나와의 소통을 위해 파견한 남자는 내 지시에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이대로 방관만 하실 생각이신가요?”

“네. 이제는 저들도 멈추지 않을 테니 끼어들 필요가 없습니다.”

승자가 결정되는 순간까지 조용히 버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였다.

주하연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지금의 결정이 무척이나 달가운 모양이었다.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게 준비만 해 놓으세요.”

“네. 그렇게 해 둘게요.”

상층, 거인의 층에서의 일이 사실상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그 사실은 길드원들 또한 누구보다도 잘 알 터다. 그 때문인지 반년 만에 찾아온 휴식기임에도 긴장감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나서윤이 성장하기 무섭게 아멜리아와 이연솔은 그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배워왔고 끝에 다다른 인원들은 나와 나서윤만이 도달한 장소에 오르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었다. 습격을 멈추었다고 하여 그러한 노력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지막에 가까운 만큼 더더욱 집중하는 모습.

이틀이 지나자 클라이디스 쪽 거인들이 커니더 영역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자 경로 상의 도시 두 개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동 속도는 느리다. 마치 협박하는 듯한 모습.

커니더의 영역을 클라이디스가 제 영역인 것 마냥 헤집고 다녔다.

그러자 커니더는 자신 휘하의 도시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불응했다고?”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클라이디스의 협박이 통한 모양입니다.”

클라이디스는 커니더의 영역을 휘저으며 휘하 도시들에게 사자를 보냈다. 움직이지 말라고.

“아무리 우리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닌데, 그게 통했다고?”

“그게… 유신후 님이 원인이십니다.

“나 때문이라고?”

“예. 그간 외부에서 커니더 쪽이 불리하도록 공작을 해 오시지 않았습니까? 클라이디스가 유신후 님이 마치 자신이 비밀리에 키워온 집단인 것처럼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확실히 커니더 휘하의 도시들은 지난 반년간 우리로 인한 피해를 많이 봤다. 하지만 그렇다고 클라이디스 쪽에게 피해가 안 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신들을 숨기는 것이 중요했고 커니더가 유리한 전장을 철저하게 무너뜨리며 우리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클라이디스 쪽 또한 모조리 몰살해 왔다.

그런데도 우리를 자신들의 세력인 것처럼 포장했다니… 어이가 없었다.

물론 전원이 배신한 것은 아닐 터다. 클라이디스 휘하의 도시들이 그들을 막아선 것도 고려를 해야 한다. 하지만 파벌이라는 이름 하에 뭉친 커니더 직속의 전사들 및 일부 몇몇 도시들과 다르게 대부분의 산하는 커니더의 무력에 짓눌린 상태로 산하로 들어갔다.

클라이디스 휘하의 도시 대부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클라이디스는 건재한 데 비해 커니더는 그 힘이 약화되었다. 게다가 정체 모를 외부 세력인 우리가 클라이디스 휘하라고 공작된 지금이라면…….

‘그럴만하기는 하군.’

생각보다 세력 차이가 커졌다.

일방적일 가능성이 커졌다. 피해가 없지는 않겠지만 예상보다는 적을 듯하다.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다.

“…클라이디스 또한 소집령을 내렸다고?”

“예. 커니더 쪽이 세력전으로 몰고 가기 무섭게 그쪽도 바로 소집령을 내렸습니다.”

“도시들의 합류 경로를 가져와라.”

“…예?”

“저쪽의 세력이 줄어들었으면, 이쪽도 줄어들어야지.”

한쪽이 유리하게는 해 줄 거다. 하지만 그 차이가 너무 크게 둘 생각은 없었다.

“이쪽이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이미 영역 내부로 진입했고, 커니더의 도시를 코앞에 두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 * *

나는 길드원들과 함께 클라이디스에게 합류하는 거인들을 잘라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 사이에 동요가 퍼졌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합류하던 거인들. 처음에는 배신을 의심했지만 전투의 흔적을 발견하기 무섭게 그들 사이로 동요가 퍼졌다.

이런 경우는 지난 반년간 지겹도록 느꼈을 터다.

-클라이디스 휘하의 비밀 세력이라는 놈들이 배신했다.

그러한 이야기가 퍼져 나왔다.

덕분에 커니더 쪽의 사기가 달아올랐다.

“휘하의 세력 하나 관리 못 하는가?”

커니더. 지배자 계급임에도 덩치가 20m에 달하는 거인이었다.

“하하하. 판단조차 그르쳐 멸망 직전에 놓인 주제에 말은 잘하는구나. 그놈들은 내가 알아서 처벌한다. 그 꼴을 보고 싶으면 항복을 해라.”

커니더의 도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자 또한 지배자임에도 커니더에 비해 그 몸집이 부족하지 않았다.

클라이디스. 현재 가장 큰 세력을 갖게 된 거인 세력의 우두머리였다.

“웃기는군. 누가 멸망 직전이라는 거지? 꿈도 크구나, 클라이디스. 지도자를 잃어 망해버린 파벌 주제에 어찌 돌아가려 하는가? 차라리 내게 항복하고 여신상을 넘겨라. 오데르 님께서는 패배자인 너희들이라도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실 거다.”

“…건방지군 커니더. 오데르도 패배해 변방으로 쫓겨났을 텐데 잘도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군. 비록 나의 주인은 떠나가셨으나 아직 후계자이신 아스티드 님이 남아계시다. 그분의 곁으로 돌아가 다시금 세력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커니더의 도발에 클라이디스가 분노한다.

“공격하라! 저들을 모조리 찢어 죽인 후 모두 둥지로 돌아간다!”

“막아라! 정신 못 차리는 패배자들에게 줄 승리는 없다! 저들을 죽이고 둥지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가 될 것이다!”

거인들의 함성이 대기를 울리고, 클라이디스의 거인들이 빠르게 커니더의 거대한 도시로 달려나갔다.

수백, 수천의 거인들이 굉음을 흘리며 도시로 나아가는 장면은 신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아주 먼 곳에서 그런 그들의 전쟁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드원들은 최대한 멀리, 전장에서 들키지 않는 장소에 숨어 있었다. 전쟁의 승자가 결정되는 순간, 우리가 난입할 셈이었다.

외곽에서 야금야금 뒤나 치던 이들이 설마 직접 공격할 줄은 예상하지 못할 터다. 설령 공격해 온다고 해도 이긴다는 자신감이 넘치겠지. 그들은 그만한 생각을 할 자격이 있는 이들이었다.

3등위 거인이 각각 다섯. 내가 커니더 쪽의 3등위 하나를 죽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커니더 쪽은 여섯에 달하는 3등위 거인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2등위 또한 각기 스물이나 된다. 그 세력의 질이 달랐다.

오만이나 경솔한 것이 아닌, 힘이 바탕이 된 자신감이었다.

내 곁에서 전투를 지켜보는 나서윤 또한 저들의 세력을 직접 목격하며 좀처럼 굳은 표정을 펴지 못했다.

그 표정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나서윤과는 그 이유가 달랐다.

오데르.

나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구를 침공한 거인, 그들의 우두머리인 왕자의 이름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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