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깨어난 나서윤은 아까의 넋이 나간 표정과 약간 비슷해 보였다.
어딘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 정확히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초점이 미묘하게 흐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분위기가 달랐다.
‘방금… 뭐였지?’
나서윤이 마법을 쓰는 것은 많이 봐 왔다. 하지만 방금과 같은 모습은 처음이다.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잘했어.”
가벼운 칭찬의 말을 흘리며 거인의 등 뒤를 향해 접근한다.
나서윤의 흐릿한 표정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도움이 되어 다행이야.”
“이런, 빌어먹을!”
회심의 기회를 날렸기 때문일까.
나와 나서윤과 다르게 거인의 표정이 참혹하다.
방금 전 나를 향해 사용했던 공간의 일그러짐.
제대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으나 규모가 컸고 기술 자체가 사용하는 마력이 보통이 아니기 때문인지 거인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맴돌고 있었다.
주변의 마력을 지배하는 모습이 상당히 허약해 보였다.
순간 나서윤이 사용한 마법 자체가 거인의 주변에서 나타났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지배된 영역 내에서… 마법을 쏟아내?’
게다가 아주 작은 영창조차 없었으며 마법이 사용되고 난 후에야 나서윤의 모습이 드러났다.
전혀 마력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했었다.
잠깐 생각이 스친 사이 나는 어느새 거인의 앞으로 이동해 있었고 단숨에 상대의 영역을 찢어발기며 다리를 그어내고 있었다.
거인은 순간 내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움직였으나 거인은 몹시 지친 상태였고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스슥.
다시금 거인의 등 뒤에서 수십 개의 마법이 시전된다. 확실히 거인의 영역 내부였다.
순간적으로 보였다.
거인의 영역을 허물어뜨리고 허공에서 생성되는 수십의 마법을.
얼굴을 일그러뜨린 거인은 마법을 무시했지만 이전 그의 마법 저항을 뚫었던 것처럼 이번 공격 또한 거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끄아아아아아!”
거인의 집채만 한 다리 하나가 잘려나간다.
묽은 피가 미친 듯이 쏟아졌고, 내 갑옷은 미친 듯이 그런 피를 빨아먹었다.
계속 성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확실히 3등위의 거인은 달랐다.
가진 마력의 질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마치 갑옷이 환호하는 것 같았다.
연결된 감각을 통해 대강의 수준을 확인한다.
‘미쳤군. 그냥 흡수했으면 마력 자체가 성장했겠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엄청나게 큰 양은 아니었겠지만 내가 인지할 수 있었을 정도였을 터다.
하지만 나는 모조리 갑옷에게 양보했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다리가 통째로 잘려나가 도망칠 방법을 잃은 거인, 두사사는 어떻게든 자세를 가다듬으며 미친 듯이 주변을 훑었다.
확실히 내가 보았던 플로어 마스터들 처럼 공간을 찢거나 가른 이후 그곳을 통해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추하네.”
나느 그런 두사사를 바라보며 도발했다.
“놀아준다고 할 때는 언제고 도망칠 방법을 찾기 급급해.”
“…네놈!”
딱히 할 말은 없을 거다.
“거인이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겁쟁이로군. 꼭 죽을 때만 되면 쥐새끼마냥 도망칠 구멍을 찾아대. 그러면서 만나면 한다는 말이 항상 소인이지. 몸뚱이만 클 뿐이야. 네놈도 다를 바가 없군.”
두사사의 손이 분노로 떨린다.
얕보던 인간에게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것이 무척이나 굴욕적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화가 날 터다. 저놈 입장에서는 우리의 위험성이라도 알리려고 했던 것일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두사사는 결국 도망치는 것을 포기했는지 무기를 치켜들었다.
내 모욕 때문인지 방법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인지는 모른다. 놈은 하나 남은 다리를 움직이며 나서윤 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빠르게 움직여 상대의 경로를 차단한다.
“일단 빠져, 서윤아! 나 혼자 충분해!”
까드득.
“하나는, 데려가겠다!”
일순간,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규모의 공간이 뒤틀린다.
목표는 내가 아닌 나서윤이었다.
나는 조금이지만 당황했다. 이러한 규모의 공격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으며, 동시에 목표가 내가 아닌 나서윤일줄은 몰랐다.
하지만 속도가 그리 빠르지 못했다.
공격을 끊어내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기에 강기를 최대한 늘리며 거인에게 휘두른 순간이었다.
나서윤의 기척이 소멸한다.
공격이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나서윤의 모습은 거인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어느 마법인지 모르겠다. 전혀 느끼지도 못했다.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진다.
거인 또한 얼굴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너… 설마……!”
내가 놀란 사이, 나서윤은 거인의 전신에 마법을 쏟아부었고 두사사는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방금의 공격 자체가 무리한 것인지 거인은 나서윤의 폭격을 전혀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쓰러진 틈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두사사의 목이 하늘을 난다.
조금은 허무한 최후. 두사사가 죽은 것을 확인하는 즉시 웅웅대며 피를 탐하는 갑옷을 억제하고는 나서윤을 향해 달려갔다.
“벽, 넘은 거냐.”
내 말에 나서윤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그게 다가 아닐 거다.
“무영창도 완성한 거고?”
나서윤이 재차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나서윤의 공격은 상대의 영역을 빼앗았고, 동시에 아무런 기척도 없이 폭격처럼 마법이 쏟아져 내렸다.
전자를 성공하려면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야만 했고 후자를 성공하려면 무영창이 필요했다.
“도대체 언제…….”
“공간 마법을 직격 했을 때, 그때 였어.”
넋이 나간 것은 처음 당해본 공격 때문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 순간, 그 공격을 보고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오빠, 미궁 좀 열어줄 수 있어?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고는 있는데, 지금 조금 위험해서.”
나는 순간 나서윤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생각을 짐작했는지 나서윤은 고개를 젓는다.
“억지로 몸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래. 경지가 오르니까 몸은 더 나아가려고 하는데, 지금 그랬다가는 큰일 나니까.”
“…그걸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서윤을 바라보았다.
카바락은 그게 되지 못해서 애매한 놈으로 남아버렸다. 그런데 나서윤은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카바락 또한 그 자리를 벗어났다면 후에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체감한 것은 카바락의 감각이었지만, 그의 생각 자체는 알 수 없었으니까.
강제로 억제된 그것과는 다른 상태인 듯했다.
“지금은. 오래는 못 버텨. 그랬다가는 정신을 잃고 미완성이 되어버릴 거야.”
그 말이 들기 무섭게 나는 입구를 열었고 하유진을 불렀다.
“고맙다. 네 덕분에 서윤이가 살았어. 팔은 괜찮아?”
“네 형. 아프기는 하지만, 회복은 대충 되었어요.”
“일단 서윤이를 부탁한다. 전투에서는 빠져도 좋아. 이게 더 중요해.”
내 말에 하유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중요한 순간임은 하유진 또한 알 터다.
둘은 그대로 전장을 이탈했고, 나는 즉시 주변을 돌며 빠져나간 거인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전장 자체는 조금씩 우리가 앞서나가고 있었기에 가능한 여유였다.
실제로 도망친 거인들의 수가 제법 되었지만, 전사 계급도 아닌 시민 계급들이다. 흔적을 제대로 숨기지도 못했고, 그 수준의 거인들이라면 내가 못 따라잡을 것은 없었다.
우습게도 이놈들은 도망치면서도 몇 개의 무리로 나뉘어 도망쳤고, 나는 그런 무리 몇 개를 척살했다. 다른 도시까지 가기에는 체력이 모자랐는지 중간에 지친 놈들 투성이였다. 모든 거인을 잡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실제로 놓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흔적으로 추적한 이들은 모조리 지웠다고 생각했다.
‘어지간하면 다른 도시로 가도 노예 신세겠지만…….’
커니더와 연관이 된 상태다 보니 확신은 들지 못했다.
내가 돌아온 사이 전투는 끝나 있었다.
죽은 길드원은 없었다.
역으로 마수들은 전멸. 위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완승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내가 돌아오자 파티원들이 나서윤의 행방을 물었다.
“일단 미궁 안으로 피신시켰어.”
“괜찮아요? 3등위 거인이 노렸다고 하던데…….”
“문 열어줘. 서윤이 얼굴을 봐야 해.”
나연이 초조한 표정으로 말한다.
실제로 나서윤이 공격을 당할 당시는 후열에서 마법을 사용하던 상태라 목격한 길드원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와 함께 거인을 상대하는 모습도 보았을 터. 나연은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녀는 나연의 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연의 요청을 거절했다.
“미안. 지금 중요한 순간일 테니 유진이가 오면 만나도록 해. 지금… 성장 중일 거거든.”
“성장……?”
사샤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 본인이 말하기를… 벽, 넘었다고 하더라. 실제로 그런 것 같았고.”
내 말에 주변이 경악한다.
“설마 신후 오빠랑 같이 그 괴물과 싸웠다는 말이…….”
“마법으로 지원했다고 들었는데…….”
나는 그런 주변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우선 흔적부터 마저 지우세요. 나머지는 뒤에서.”
내 말에 길드원들이 빠르게 움직여 마저 전장을 정리한다.
워낙 규모가 컸고 상대가 3등위였던 만큼 모든 거인들이 이상을 인지했을 터다.
그렇지만 안 할 수는 없었으니까.
우리는 한동안 움직임을 최소화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후방으로 이동한 뒤 드로퀴노를 이용해 거인들의 동태를 살폈다.
거인들, 특히 커니더 쪽은 상당히 당황한 듯했다.
조사를 위해 보냈던 3등위 거인의 소식이 끊겼다. 게다가 그놈은 수준이 높은 지배자. 아마 죽는 순간 그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터다.
2차 조사대를 보내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나는 드로퀴노를 이용해 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정보를 은밀히 클라이디스 측에 흘려버렸다.
커니더의 직속 전사 열, 특히 3등위의 거인 하나가 죽었다.
처음 클라이디스는 그 소식을 못 믿는 듯했지만, 저쪽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었는지 자체적으로 확인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정보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채 버렸다.
2차 조사대를 움직이려던 커니더는 클라이디스의 방해 공작에 움직임을 봉쇄당했고, 천천히 상층의 긴장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휘하의 도시들이 움직이고, 거인들 사이의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난다.
늘 있는 일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분명 그게 평소와는 다른 전투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사이 나는 드로퀴노를 통해 푸른 여신상에 관한 정보를 알아올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한창 긴장감이 높아지고 클라이디스 측이 움직이던 시점, 마침내 나서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