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패배자들.
에키는 거인들을 가리켜 패배자들이라 칭했다.
“우선 여쭙고 싶습니다. 목적이… 어떻게 되십니까?”
“거인의 몰살.”
숨길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흡……!”
내 대답에 주위의 노예들이 놀란 듯 강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런 내 대답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드워프 NPC 에키가 입을 열었다.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거인들은 동족을 제외한 세력은 인정하지 않으니, 애초부터 어느 한 쪽이 무너지지 않는 한 영원히 싸우실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자신들보다 경지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소인소인 거릴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다.
잠시 숨을 고른 에키가 말을 이었다.
“저들은 우리들의 땅을 지배해 본 차원에 바치고 다시금 자신들의 차원으로 돌아가기를 꿈꿉니다. 그를 위해서 저들은 우선 이 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은 패배했고, 노예가 되었노라 말한다.
일부는 숨어들었지만, 대부분은 붙잡혔다고.
“그러나 문제는 저들끼리도 세력이 갈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저희들을 무너뜨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경계하는 티는 냈지만 직접적인 충돌은 피해 왔습니다. 그러나 원주인인 저희가 무너지기 무섭게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더군요.”
마치 원수를 대하는 것 같았노라고 말했다.
“사실 처음 세력은 두 세력에 불과했습니다. 지금은 꾸준히 거인들이 유입되어 여러 세력이 난립하게 되었지만… 결국 가장 강한 세력은 처음 저희들을 침공했던 두 세력입니다.”
어떤 세력인지 알 것 같았다. 가장 강한 세력이라고 한다면 뻔하다. 클라이디스와 커나더. 둘이 이끄는 도시일 터다.
“거인이 아닌 종족이 세력을 세우면 어떻게든 거인과 충돌하게 됩니다. 그들은 다른 지성체가 세력을 이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차원을 상납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건이라고 하더군요.”
짧든 길든 언젠가는 저들과 싸우게 될 것이라 말한다.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준비만 충분하다면 이쪽이 먼저 친다. 내 목표는 거인의 몰살이니까.
‘서브 퀘스트 같은 느낌인데?’
내 입장에서는 본래 해야 할 일, 거인들을 몰살시키는 과정에서 나올 노예들을 최대한 살려달라는 부탁이나 다름없었다.
거절해도 상관은 없었다. 다만 히든 퀘스트인 만큼 나름 보상이 괜찮을 터였다. 무엇보다… 상층의 히든 퀘스트다.
“어차피 해야 하실 일, 대가는 치르겠습니다. 부디,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에키는 나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느새 정리가 끝난 길드원들이 하나둘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일부는 나연의 지시 아래 아직 살아 있는 노예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무슨 대가를 치르겠다는 말이지?”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대부분이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미 거인의 지배가 시작된 지 100년 가까이 되었다 보니 남아있는 잔당들 또한 거의 없습니다. 다만, 완전히 전멸한 것은 아닙니다.”
‘역시 아직 연결되어 있었군.’
몇 년 전부터 구원자에 관한 소문이 돌았다는 이야기 때부터 짐작하기는 했다. 각 도시 간에 교류는 거의 없다시피 할 터다. 언제 등 뒤를 노릴지 모르는데 교류가 활발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러한 소문이, 노예들 사이에서 돈다는 것은 무언가 연결된 끈이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연락할 방법까지 갖추고 있었다.
놀라는 노예는 없었다. 이들 또한 그 안에 포함된 모양이었다.
“내부 정보와 필요하시다면 최선을 다해 구해 오겠습니다. 또한 저희를 이용하시면 성 내부로 일부 인원이 잠입할 수도 있을 겁니다.”
확실히 그런 방법을 쓴다면 일이 한결 편하다. 수많은 거인의 시체가 확보되었다. 테이밍한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는 장비 또한 준비할 수 있었고, 내부에서 소란을 일으킨다면 전투가 훨씬 쉬워진다.
조금 신경을 써서 노예들을 구해주고 이쪽은 한동안 거인을 수월하게 처리한다. 언제까지 우리들의 존재가 비밀이 될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알려질 터다. 그때까지는 충분히 도움이 될 터다.
‘내부에 정보원을 넣어 두는 결과가 되기도 할 테고…….’
심지어 이쪽이 목숨을 건 것도 아니다. 위험 부담은 오롯이 저쪽이 진다.
모든 노예들을 구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저쪽도 바보는 아니니 그런 요구를 하지는 않는다. 도움을 구걸하는 주제에 그럴 입장이 되지도 못하고.
그저 조금 신경을 써 주면 충분하다.
나는 내심 조건이 마음에 드는 것을 느꼈다.
“…좋아. 돕지.”
[히든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반란 협조]
-과거 본래 세계를 지배했던 지성체들은 추방된 거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세계를 빼앗겼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핍박받아 그 세가 크지는 않으나 아직까지 작은 희망의 불씨는 남겨두었었고 그 불씨가 이제는 당신의 손에 들어왔다.
-조건 : 반란군, 드로퀴노와 협조해 최대한 많은 수의 노예들을 해방할 것.
-드로퀴노의 협조를 요구할 수 있다.
-보상 : ???(성취도에 따라 변화)
서브 퀘스트와 비슷한 느낌의 히든 퀘스트. 하지만 히든 퀘스트인 만큼 분명 보상은 비교가 안 될 터였다.
저쪽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해 왔지만 사실 퀘스트가 나왔을 정도면 따로 보상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별로 기대는 안 되지만.’
아쉽게도 성취도에 따라 변화되기 때문에 내가 만족할 만큼의 보상은 얻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리의 존재가 알려진 뒤라면 더더욱 구출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후라면 지금처럼 노예들을 생각하지 않고 싸우게 될 테니까.
노예들을 더 구하는 것보다 이쪽 길드원들의 목숨이 더 소중하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히든 퀘스트를 통해 새로운 수단을 얻게 되자 길드원들 또한 무척이나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피해는?”
“없습니다!”
후룸의 도시는 완전히 무너졌다. 생존자는 전무했고 이쪽의 피해는 다수의 마수들이 사망한 것이 전부였다.
시민 계급을 상대했던 마수들은 살아남은 것이 수십 마리에 불과했다. 상급 마수는 절반인 두 개체가 사망했고.
라이칸스로프가 뒤늦게 합류했지만 전사 계급의 거인이 끝까지 한 개체를 더 데리고 죽은 모양이었다.
가시적인 성과에 길드원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진짜 승리였다.
나는 즉시 미궁 조각을 이용해 입구를 열고는 거인들의 시체를 팔아버릴 것을 명령했다.
미궁과 상층이 연결되기 무섭게 후룸의 노예들과 소규모 연합의 노예들이 서로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들 중 극히 일부는 반란군에 소속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에키와 같이 지위가 있는 이들은 없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후룸 성에 반란군과 연관된 이들이 많은 이유는 이곳에 에키가 있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이런 곳이 오히려 적다고.
대부분은 이미 길들여진 이들이 많다고 한다.
에키를 비롯한 이번에 만난 반란군들은 이미 우리가 소규모 연합을 해체하고 상당수의 노예들을 구출했다는 것에 무척이나 감격한 모습이었다.
다수의 거인을 학살한 덕분에 레벨이 오르고 3차 전직을 할 수 있는 길드원들이 다량 발생했다.
이번 전투를 통해 마스터의 벽을 허문 길드원들도 나타났으며 내 직속 파티원들은 비록 1등위이기는 하나 전사 하나를 수월하게 잡아냄으로써 경험과 자신감 또한 상승했다.
한 도시를 궤멸시킬 때마다 확실한 대가가 돌아오고 있었다.
게다가 히든 퀘스트를 통해 약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고.
며칠에 걸쳐 정비를 끝마치고는 가장 가까운 마수의 영역을 향해 이동한다. 마수들을 보충한 뒤 다음 도시를 노릴 생각이었다.
“드로퀴노 반란군의 본거지 또한 마수의 영역에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사실 그곳이 아니면 거인의 눈을 피하기가 힘듭니다.”
그마저도 자신들의 세력이 하찮아질 때까지 상당한 견제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반란군이 살아남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이후의 일은 단순한 반복 작업에 불과했다.
마수를 모으고, 준비를 갖춘 이후 반란군을 통해 우리가 충분히 상대할 만한 도시를 찾아낸 뒤 그쪽부터 차례로 습격해나간다.
가능한 도시라면 내부로 잠입해 내부부터 마수를 풀어버려 날뛰게 만들고 반란군이 다수인 도시에서는 그들과 공조해 도시 자체를 점령한 경우도 있었으며 우리 쪽 세력이 부족한 곳이라면 이전처럼 노예의 목숨은 따지지 않고 그대로 도시를 쓸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에키를 비롯한 반란군들은 그럴 때마다 슬퍼했지만 어쩔 수 없음을 자신들도 알고 있기에 우리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거인과 우리 세력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승리할 가능성은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꾸준히 도시를 무너뜨려 가자 거인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외곽에서 신종 마수 군단이 나타났다.
-아니다. 강대한 왕족이 등장해 세력을 규합하고 있다.
-거인이 아닌 타 종족, 드래곤이 차원을 넘보고 있다.
“슬슬 소문이 퍼지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이미 무너뜨린 도시가 두 자릿수가 되어버렸으니…….”
시작했던 곳 주변에는 더이상 도시가 없어 점차 외곽에서 중앙으로 접근해야 할 정도였다.
이미 내 길드원들의 장비는 일 인당 최소 세 개의 전설급 장비를 갖추고 있었고 전원 3차 전직을 끝냈으며 마스터가 아닌 길드원들을 찾아볼 수 없게 될 정도였다.
하급 마법사였던 이들은 모두 최소가 중급의 마법사로 탈바꿈했고 덕분에 마법 병단의 힘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해서 상승하는 중이었다. 재능이 부족한 이들조차 레벨이 오르고 온갖 보정을 추가로 받게 되자 벽을 뚫고 한차례 위로 향할 수 있었다.
솔직한 말로 이제는 마수들 없이도 어지간한 도시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갖췄다.
이제는 2등위 전사가 포함된 도시도 그리 위협적이지 못했다. 하나 정도라면 내가 이길 수 있었고, 내 직속 파티원이 아닌 길드원들끼리만 나서더라도 1등위 전사 정도는 충분히 잡아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으니까.
‘30명 가까이 달라붙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다. 확실히 반란군과 손을 잡은 것은 상당히 잘한 선택이었다.
본래 이 세계 소속이었고 100년이나 도망쳐다니며 마수에 관한 수많은 정보가 축적된 이들이다. 덕분에 마수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더 손쉽게 거인의 도시를 공략해 더 이른 시기에 제대로 된 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
우리들 덕분에 반란군 또한 상당한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으니 일방적인 이득을 얻은 것만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어지간한 도시가 아니었다. 클라이디스와 커니더. 이 두 도시는 우리들 대부분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수준의 도시들이었다. 하나 정도라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둘은 불가능했다. 희생 없이는 아예 불가능했고.
외곽에서 중심부로 이동할수록 그들에 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에는 그 두 세력을 만나게 될 터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전원 죽어 지구로 귀환할 수도 없었다. 더욱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슬쩍 나서윤을 바라본다. 그녀는 벽 하나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최대치로 성장한 상태. 계기만 주어진다면 그녀 또한 그랜드 마스터에 오를 수 있을 터였다. 간단해 보이면서도, 끔찍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신후 오빠. 드로퀴노 반란군 쪽에서 정보가 들어왔어요.”
“뭔데?”
“커니더 쪽에서 이쪽으로 조사대를 보냈다고 해요.”
커니더. 가장 큰 두 도시 중 하나의 이름.
마침내,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