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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63화 (263/317)

263화

무척이나 오랜만에 보는 퀘스트 알림이었다.

심지어 상층의 퀘스트였다.

위치가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완전히 무너진 건물 아래로 보였으니까.

‘거인? 아니, 거인은 아냐.’

느껴지는 마력이 거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마 노예로 부려지던 이들 중 하나일 터다.

어떤 형식의 퀘스트일지 대강 짐작이 간다. 닥쳐봐야 알 것 같기는 하지만.

일단 이쪽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기에 저쪽으로는 더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NPC가 있기는 있었군.’

감옥에서의 제단을 생각해보면 NPC가 아예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내 힘이 상상 이상임을 깨달았으니 더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라이칸스로프처럼 밀리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만, 내가 더 빨리 쓰러뜨릴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생각을 마치고는 거인들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그동안 거인 넷은 어느새 나를 포위한 상태였다. 알고는 있었다.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

우습게도 분명 포위를 당한 것은 나인데 조심은 저쪽이 더 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금 자신들에게 집중한다는 것을 눈치채기 무섭게 저들이 먼저 움직인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포위하기 무섭게 파고들려던 순간이었으니까.

애초에 한눈을 팔았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한 행동이었다.

내가 움직이면 일격에 포위망이 박살 난다. 넷이서 해 봐야 사방을 막는 것이 전부이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돌파가 가능했다.

한 명이 죽임을 당하더라도 어떻게든 내게 피해를 입히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인간 하나를 향해 집채만 한 거인 넷이 동시에 달려드는 모습은 어떻게 생각하면 우스운 행태였다.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지만.

“흐읍. 크아아아아아아!”

마력을 집중해 워 크라이를 사용한다. 이전과는 그 위력이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내 지배하에 있는 마력이 동조하며 무시무시한 파동을 사방에 쏟아낸다.

움찔.

달려들던 거인 넷이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고 나는 가장 가까운 거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용오름.”

아래에서 위로 검을 올려 긋는다.

그러나 그 단순한 휘두름은 이전에 거인 하나를 지워버렸었다.

다른 기술이나, 본질적으로는 비슷했다.

단숨에 마력이 전사 하나를 휩쓸며 하늘로 솟아올랐고 거인은 공중에서 그대로 전신이 찢기며 육편으로 변해버렸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나는 아직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거인 하나를 향해 검을 내뻗었다.

안 그래도 거인의 크기에 맞춰 무시무시한 크기를 유지하는 무형 강기가 주변의 마력을 끝없이 흡수하며 인식하기 힘든 속도로 뻗어 나갔다.

내 지배하에 있는 마력들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빠르게 흡수되었고 동시에 나 자신의 마력 또한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카바락의 기술을 그대로 응용한 기술.

그 결과는 처참했다.

무형 강기가 단번에 거인 하나의 머리를 관통한다. 아니, 관통을 넘어서 그대로 머리를 으깨버렸다.

“후룸을 위하……!”

콰득.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은 거인 둘. 이미 희생은 예상했을 터다. 그렇기에 둘은 목숨을 도외시한 채 나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그 순간 시야가 붉게 물든다.

생각 이전에 몸이 자동으로 반응한다. 내게 무기를 휘두르는 놈들 중 더 허술한 쪽을 향해 단숨에 파고든다. 순식간에 블링크가 사용되었고, 자연스레 그 흔적을 지운다. 완벽한 빈틈. 내 검은 단번에 거인의 중심을 그대로 꿰뚫어버렸다.

강기의 끝이 상대의 정수리 위로 뾰족하게 솟아오른다.

살해 본능. 그 스킬의 발현이었다.

일순간 상대의 빈틈을 파악하고 치명적인 공격을 가한다. 직감의 영역에서 펼쳐지는 기술로 내 평소 전투 스타일과는 다른 완전히 이질적인 모습을 보인다.

상대가 어떤 존재라도 생명체라면 그 약점을 단숨에 파악해내는 위협적인 스킬이다.

좋은 점만 있지는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기술이다. 치명적이지만 조심해서 다뤄야 할 기술. 단숨에 충동을 억누르고는 마지막 남은 거인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아직 시야가 조금 붉다. 나와 눈을 마주친 거인이 몸을 떨어대었다.

“괴, 괴물…….”

거인의 말에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꼼짝하지 못하는 놈의 급소에 거대한 강기를 박아넣는다. 순식간에 넷이 처리되자 후룸을 호위하는 놈은 빠져나갈 타이밍을 잡지 못했고, 동료들이 모두 죽은 이후에야 뒤늦게 현장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둘을 처리한 이후 구석까지 몰린 라이칸스로프를 구해낸다.

“아우우우!”

“시끄러워. 가서 마수 놈들이나 도와.”

이미 상급 마수 하나는 죽어버린 상태였다. 일행들은 확실히 승기를 잡았기에 시민 계급을 살해하는 길드원들을 살폈다.

사방에는 마수들과 거인들의 시체가 한가득이었다.

현재도 두 세력은 끝없이 충돌 중이었고, 그 사이에서 파티를 이룬 길드원들이 기회를 엿보며 하나씩 거인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확실히 덕분에 크게 다친 길드원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히 위험한 곳에는 마수를 집어넣었고, 거인들은 알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한 채 달려드는 마수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마수들이 죽어나가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마수는 다시 보충하면 되니까.

점차 승기는 이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나는 현장을 빠져나와 보라색 느낌표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안전하게 승기를 잡았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저들의 성장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아래쪽인가?’

어스퀘이크에 의해 완전히 무너진 도시. 그 폐허의 일부에서 아직 살아있는 기척들이 느껴진다.

히든 퀘스트를 줄 NPC는 그들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빠르게 폐허의 잔해를 치워 나간다. 거인의 도시인 만큼 그 잔해들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나 또한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세심하게 잔해를 치워나갔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NPC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중년의 드워프.

“사, 살았다!”

“인…간?”

제법 깊숙한 곳. 아무래도 노예들의 숙소인 모양이었다. 상당수의 노예들이 살아있었다. 운이 좋은 건지 무너지는 건물 틈으로 어떻게 생존한 모양이었다.

“어째서 인간이…….”

노예들이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같은 노예 처지인, 그것도 모든 종족들 중 가장 떨어질 터인 인간이 자신들을 구할 수 있었는지 의아한 모양이었다.

“자네, 밖은 마수들이 습격했다고 들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마수들이 습격을 해 왔다고 알고 있을 터인데 뜬금없이 거대한 지진이 일어났고 완전히 고립되어버렸다.

덕분에 이들은 외부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노예들 중 하나는 히든 퀘스트를 갖고 있는 NPC였다.

“습격자는 마수가 아니다. 인간이지.”

“…인간이 거인의 도시를 습격했다고? 그게 도대체 무슨 헛소리인가?”

거인의 노예로 지낸 시간이 얼마나 된 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거인이란 종족은 뛰어넘는 것이 불가능한 거대한 벽과 같았을 거다.

그런데 인간이 그런 거인의 도시를 습격했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본다면 당연한 소리였다.

“자살 시도라도 한 건가? 기껏 자유를 얻고 그게 뭐 하는…….”

‘자유라.’

의외로 그런 의식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말보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빠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을 무시한 채 곧바로 밖을 향해 이동했다. 저들은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조금 발끈한 모양이었지만 일단은 탈출이 우선이라 생각했는지 곧바로 나를 따라왔고, 상상 이상으로 높은 폐허의 상태에 놀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설마 우리를 혼자서 구했다는 말인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자 한 수인이 중얼거렸다.

나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고, 드높은 폐허를 거슬러 올라 밖으로 나온 노예들은 올라온 즉시 보이는 거인의 시체에 기겁했다.

“이게 도대체…….”

드넓은 폐허. 그리고 널려있는 거인과 마수들의 시체. 그것만 보았다면 내 말이 거짓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마수들과 거인들이 싸우는 사이에서 보이는 인간들의 모습에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냥 끼어드는 것이 아닌, 분명하게 마수를 이용하는 모습이었다.

이곳의 노예들은 하나같이 최소한의 능력은 있는 이들이다. 그런 만큼 이게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는 것이 빨랐다.

“인간들이… 마수를 이용해?”

이해되지 않는 현실에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던 중 한 노예가 죽어있는 거인 하나를 가리켰다.

“저, 저거… 저거 설마…….”

떨리는 손끝과 목소리.

후룸. 그의 시체였다.

아무래도 후룸의 얼굴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시의 지배자가 죽었다. 도시의 중심이 죽어버린 이상 이 도시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기 그들의 얼굴에 불안함과 해방감이 동시에 드러났다.

“당신… 본래 이곳의 사람이 아니시군요… 역시 구원자이신 겁니까?”

구원자. 상층에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호칭이다. 뭐, 미궁 내부의 노예들에게는 구원자처럼 보일 수는 있겠다 싶었다.

문제는 내게 그런 말을 한 놈이 히든 퀘스트를 손에 쥐고 있는 NPC라는 점이다.

“…여기 사람이 아닌 것은 맞지만 구원자라는 말은 처음 듣는 소리인데.”

“거인들의 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실, 구원자가 올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상대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럴 만했다. 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는 널려있었다. 도저히 혼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자신들을 저 폐허 깊숙한 곳에서 꺼내주었고 마수를 지배하는 것으로 보이는 인간들 중 하나다.

내가 저들의 우두머리라는 것까지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평범한 이는 아니라는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을 터다.

드워프는 천천히 구원자의 존재에 대해 입을 열었다.

“여신님의 예언이 있었습니다. 인간들이 거인을 몰아낼 거라고.”

“에키 님, 그건 헛소리…….”

한 엘프가 드워프에게 말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실제로 인간들이 거인의 도시를 무너뜨린 것을 직접 봤으니까.

“여신? 그게 누구지?”

“성함은 모릅니다. 그저 저희가 모시는 존재일 뿐.”

‘가이아… 인가?’

몇 년 전부터 서서히 퍼지기 시작한 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은 헛소문 취급을 해 왔다고.

“저는 당신들이 구원자라고 생각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저희들을 도와주십시오.”

NPC의 부탁.

그 말이 들리기 무섭게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히든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저희들.’

나는 에키라 불린 드워프를 향해 물었다.

“저희라는 것은… 너희가 다가 아니라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이들이 다라면 이미 이 도시를 멸망시킨 시점에서 해방 자체는 끝난 일이다.

“설마 여기서 살 기반이라도 마련해달라는 건가?

“아닙니다. 저희뿐만이 아닌, 다른 도시의 동족들 또한 도와주셨으면 한다는 뜻입니다.”

동족이라고 말하지만 아마 드워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터다.

에키의 말에 엘프와 수인, 인간들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왜지?”

“저희는… 거인이 침략하기 전, 때때로 적대하고 연합하기도 했지만 일단은 비슷한 뿌리를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부족도, 국가도 갖고 있었죠.”

거인들의 침략. 순간적으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 저 거인들은 정확히 말하면 저희를 침략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저들은 자신들의 차원에서 패배한, 패배자들에 불과합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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