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결국 지금은 확답을 못 한다는 거군요.”
“네가 끼어들면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확실히 결정권은 가이아에게 있으니까.”
탑이 지구에 나타나 약간은 연관을 가졌더라도 탑 자체는 격리되고 단절된 공간이라 가이아와 협력하지 않으면 정말 방법이 없다고 한다.
수련자들이 드나들 때 잠깐씩 열리기는 하는데, 어디까지나 최하층과 최상층만, 잠시 동안 열리는 수준이라 그 틈을 노리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기왕이면 도와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마수들의 보관 정도는 지금도 가능해. 너는 자격이 되니까.”
그것만으로도 상층에서는 큰 도움이 된다. 상층에 도착했다는 것과 미궁 조각이라는 아이템, 정보 레벨 등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기왕이면 꼭 성공하라고.”
처음 미궁 조각을 줄 때만 하더라도 정말 싫은 기색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무척이나 협력도 잘 해주는 데다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는 응원까지.
‘호의도 있기는 하겠다만…….’
이익도 있는 것이다.
아키밀리와 헤어진 이후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가이아라면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었다. 그의 말대로 이미 열세 번째 꽃과도 계약을 한 마당이다.
하나 추가되는 것이 어떤 손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본 아키밀리와 같은 꼴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을 터.
‘일단은 긍정적으로.’
하지만 늘 그렇듯 대비는 해야 한다.
다시금 마을을 지나치자 질리지도 않는지 또다시 인사를 해오는 이들을 적당히 물리친 이후 마수의 영역으로 복귀한다.
내가 지시해놓은 대로 일들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한계점 또한 보이기 시작했다.
“마수를 무한히 다룰 수는 없대.”
소식을 가져온 것은 나연이었다.
“일정 수 이상의 마수들이 모이면, 걸어 놓은 마법이 흔들리나 봐.”
수준이 높은 마수들의 경우에는 그 수가 적더라도 더 빠르게 흔들린다고 한다.
“대처법으로는 더 수준 높은 신성 마법과 테이밍용 아이템, 마법 자체의 수준을 더 높은 것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하는데…….”
신성 마법에 관해서는 나보다는 주하연이 낫다. 아이템이야 골드 내지는 포인트를 사용하면 한계가 있더라도 어떻게든 되고. 마법 또한 조금 더 발전한다면 나아지기는 할 테지만 급격한 변화를 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즉 지금 당장 변화가 가능한 것은 아이템의 질정도다.
“네비오스 님께 물어봤는데, 골드로는 한계가 있다고 하나 봐. 타 지역에서 들여올 수는 있는데, 수준이 높아지면 대부분 포인트를 선호해서 다량의 포인트가 필요하다고 하셨어.”
포인트는 상당히 중요한 자원인 만큼 내 허락을 구하는 모양이다.
필요한 것에 아껴서는 안 된다. 다만 현재 포인트는 그리 여유로운 편이 되지 못했다.
거인의 감옥과 연합을 무너뜨림으로써 얻은 포인트의 대부분이 길드원들의 장비 수준을 높이는 곳에 쓰였다.
애초에 테이밍용 아이템이 이렇게 필요할 줄은 몰랐기에 여유가 없었다.
“마수를 모으는대로 도시 하나 무너뜨려야겠네.”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했지, 소규모 도시 하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길드원들 중 마스터의 비율이 70%를 넘어섰고, 합동 마법이 있는 이상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단 두 개의 도시는 건드리기가 힘들었다. 타 도시와 비교했을 때 세력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
클라이디스와 커니더. 두 왕족이 이끄는 도시다.
전사가 열 남짓한 소규모 도시들과는 다르게 이 두 세력의 전사는 각각 백에 가까운, 불균형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걸출한 지배자가 존재하는 도시의 힘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 둘은 그래도 멀리 있는 편이니까…….’
나름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고 거인 영역 전체에서도 중앙에 가까운 노른자 땅 위에 있는 만큼 아직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갔던 것은 잘됐어?”
나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능성이 있기는 한데… 확실하지는 않아. 일단 보관 자체는 허락을 받았으니 상층에서는 편하게 쓸 수 있을 거야.”
다만 아이템을 구하기에는 이쪽의 자원이 부족해 첫 습격은 그냥 깡으로 달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항시 마수들을 풀어놓고 데리고 다니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일일이 배정을 해 주기도 어렵고, 명령을 내리기도 불편하다.
테이밍용 아이템, 그것도 조종을 위한 아이템을 얻는다면 매혹한 당사자인 최상급 마법사들이 아니라도 배정받은 마수에게 한결 편하게 명령을 내릴 수가 있었다.
그렇게 되어야 길드원들이 마수를 이용해 전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습격에서는 마수들에게 길드원들이 맞춰야 할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모을 수 있는 마수가 어느 정도인데?”
“계산에 따르면 오우거 마수 수준은 셋, 그 외에 시민 계급을 상대할 수준이라면 300이 한계인 모양이야. 마법사가 셋이니 아주 멀리 떨어진다면 세배에 가까운 수를 운용할 수 있지만…….”
막상 습격한 이후라면 지배가 풀려도 상관은 없었다. 저들끼리 보다는 거인들을 우선 공격할 테니까. 보관이 힘들기는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만들어지는 군단의 힘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 보관도 결국에는 해결이 되기는 할 테고.’
현재는 보관이 안 되니 질인지 양인지도 잘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무한히 마수를 부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을 바라기에는 이쪽의 수가 한정되어 있었다.
다만 오래 걸리더라도 개개인이 오우거 마수 수준의 마수를 하나씩은 다루게 하고 싶었는데, 너무 큰 바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일단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을 모아.”
일대에 있는 마수 중 오우거 마수 수준은 고작 4개체. 더 깊숙한 곳까지 확인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일단 그거라도 모으고 나머지는 시민 계급을 상대할 마수들로 채운다.
테이밍을 할 수 있는 마법은 마력이 많이 드는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길드원들의 희생보다는 시간이 걸리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각각 떨어져서 모은 마수들의 수는 오우거 수준 넷에 시민 수준이 500개체로, 할 수 있는 한 최대치를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다.
준비가 끝나는 즉시 나는 기존의 정보를 바탕으로 습격할 도시를 선택했다.
‘후룸.’
후룸이라는 지배자가 이끄는 도시로, 전사 계급의 거인은 아홉 개체에 거인만 4천 가까이 존재하는 도시였다.
거인의 수는 많은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전사가 아홉이다. 만만히 볼 도시는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충분히 해볼 만한 도시에 불과했지만.
일행과 길드원들에게 다음 목표를 설명하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전처럼 습격에 가까운 짓은 못합니다. 저 수의 마수들이라면… 어차피 최대한 준비를 한 상태로 붙을 수밖에 없어요.”
마수들에게 예민한 거인들이 이 수준의 마수들에 습격을 못 알아챌 수가 없었다.
우리야 만만하게 봤겠지만 마수는 아니니까.
“확실히 마기는… 마력에 비해 너무 티가 나니까요.”
주하연이 좋지 못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기에 민감한 만큼 마수들이 우글우글한 상황이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물론 활동에 지장 자체는 없고, 길드원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방편이다 보니 심하게 불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후룸의 도시는 완전히 약소 도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강한 편은 아니었기에 상당히 외곽 쪽에 있었고,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지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연합과 인접했다고 봐도 좋은 도시였다.
“2등위에 해당하는 전사도 없는 만큼 작은 피해도 용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한 준비다.
내 말에 일행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침략할 길을 설정하고 공략할 순서를 읊는다. 시작부터 마수들이 뭉쳐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도착하는 시점은 비슷하도록 경로를 설정해야 했다.
일행은 내 말들을 경청했고 중간중간 의견 또한 내가며 조금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중층에서보다 한층 더 활발하게 입을 열었고,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길드원들에게 하나둘 내용을 숙지시켰다.
이후 우리는 곧바로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걸리는 감시탑들은 모조리 부숴버렸고, 그 과정에서 예상했던대로 우리의 존재를 거인들에게 들켜버렸다.
그러나 알았다고 해도 우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객관적인 전력을 보았을 때 저들은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네놈들은… 도대체 무엇이냐?”
성공적으로 후룸의 도시에 도착했을 때, 저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우리를 맞이했다.
“마수들로 모자라 소인들이라니…….”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인, 후룸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야 그럴만했다. 그들 입장에서 하찮기만 한 인간이 자신들도 다룰 수 없는 마수들을 다루고 있는 모습으로 보일 테니까.
“설마 얼마 전 쓰레기 같은 연합이 무너진 이유가…….”
다행히 이쪽의 노림수대로 저쪽은 연합이 무너진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항복해라.”
나는 입을 열었다.
“너희가 살아날 방법 따위는 없다. 괜히 귀찮게 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도록.”
“개소리!”
내 말에 후룸이 분노한다.
“약자가 강자에게 굴복하는 것은 너희에게 당연한 이치 아니었던가?”
“…누가 약자라는 말이냐! 고작 마수들을 믿고 방자하구나, 소인 따위가!”
후룸은 무기를 집어들며 외쳤다.
“뭉쳐 봐야 고작 마수와 소인일 뿐이다! 우리는 수백 년간 이 도시를 지켜왔다! 우리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후룸의 외침에 거인들이 동조한다.
어차피 항복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거인들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럼, 죽어야지.”
동시에 가볍게 손짓을 한다.
그러자 곧바로 어마어마한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마력의 유동에 도시의 거인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사의 의지가 느껴졌다.
전사 계급과 시민 계급들 또한 성벽 위로 올라서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평범한, 인간의 성벽도 아니고 거인의 성벽이다. 절벽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습격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들킬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짐작했다. 그런 만큼 우리가 대비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곧바로 나서윤과 아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어스퀘이크(Earthquake)”
상급 마법 어스 웨이브를 뛰어넘는, 진짜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마법.
최상급에 해당하는 마법이, 하나도 아니고 둘에게서 쏟아진다.
쿠쿵.
대지가 울린다.
쩌저저적.
겹쳐진 마법이 충돌하지 않고 서로의 위력을 배가시킨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직 이연솔의 마법이 남아 있었다.
“파이어 레인. 폭(爆), 리피트.”
그녀는 정신 계통의 마법을 제외한 최상급 마법을 익히지 못했고, 덕분에 상급 마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한 최상급 마법사다. 앞선 둘에 비해 떨어질지 몰라도, 이전과 같은 상급 마법을 사용해도 그 위력이 다르다.
거기에 더해 속성을 둘이나 추가한다.
어마어마한 지진에 절벽과도 같았던 도시의 성벽이 흔들린다.
그 위로, 떨어질 때마다 폭발하는 불꽃의 비가 거인의 마법 저항력을 뚫으며 미친 듯이 쏟아진다. 한 차례도 아닌 재사용되어 도저히 혼자서 사용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불꽃의 비가 쏟아졌다.
그래도 전사 계급들은 무난하게 버텨냈다. 하지만 진짜 노림수는 시민 계급의 거인들이었고, 그들은 막을 수 없었다. 다만 이 마법 하나만으로 수천에 달하는 거인을 모두 죽이지는 못할 터다.
그래도 단일 마법이 이뤄냈다고 보기에는 믿을 수 없는 성과다.
‘이건 상상 이상인데…….’
갈수록 대지의 흔들림이 거세진다.
“우우웅!”
“크아아앙!”
마수들이 두려움에 떨며 울어대고 있었다.
각기 서로 다른 모습의 마수들이 하나같이 쏟아지는 자연재해에 불안을 숨기지 못한다.
콰콰콰콰쾅!
쿠아아앙!
쩌저적!
“버텨라! 고작 마법이다! 조금만 버텨내면 끝난다! 물러서지 마…!”
후룸과 전사 계급의 거인들이 외쳐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떨리고 있었고, 마침내 우리가 원했던 결과가 나타났다.
콰아아아앙!
쿵! 쿵!
균열을 견디지 못한 성벽이 마침내 뒤틀리고, 끊어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거인들의 비명이 사방에 울린다.
성벽이 무너지며 떨어진 파편이 굉음을 흘리며 바닥에 충돌했고, 그 위로 거인들이 쓰러진다.
거대한 흙먼지가 일대를 뒤덮었고, 그 안에서 끔찍한 비명들이 흘러나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