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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59화 (259/317)

259화

기절해 버려 더는 반항도 하지 못하는 오우거 마수를 뒤로한 채 나연이 건네는 천을 받는다.

몸에 묻은 피를 대강 닦아내며 나연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고마워.”

“아냐. 내가 가장 한가하니까…….”

그녀의 말대로 일행들 중 가장 한가한 것은 맞았다. 사샤는 이전 나에게 나연을 신경 쓰라는 말을 한 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한가해지기 무섭게 내 옆에 나연을 붙여버렸다.

다른 일행들은 여전히 바쁜 상황이다.

개인적인 수련도 있었고, 아직 만레벨이 아닌 만큼 4차전직을 노리는 것도 있었다.

주하연은 길드원들을 다루고 그들의 사냥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돕고 있었고 하유진은 일대의 추가 조사를 하는 등 각자 주어진 일을 찾아서 하고 있었다.

나서윤은 마법사들과 함께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길드원들의 또한 마수의 영역 같은 경우 저들끼리 견제하고 싸우기 바쁜 거인들이 잘 찾아오지 않는 곳인 만큼 자신들이 조금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곳임을 이용해 사냥에 집중했다.

중층보다도 더 쉽게 마수를 찾을 수 있으며 경험치마저 더 주다 보니 대부분의 길드원들은 사냥을 하는 내 직속 파티원들에게 달라붙거나 저들끼리 최대한 뭉쳐 안전하게 사냥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 또한 상황을 종용하기도 했다. 3차 전직은 성장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니까.

새로운 무기인 마수들을 길들일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한들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련자들의 성장이니까.

그에 반해 나연은 시간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나연을 보낸 사샤 본인이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정령석… 이라고 했던가?’

나연이 엘프의 숲에서 배운 것들 중 하나로 정령석을 이용해 정령 자체를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다만 고대의 정령인 사샤는 여러 속성의 정령석이 필요했고, 정령석은 마정석보다도 더 구하기 힘든 물품이라 하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스템 상점과 네비오스가 있었고 가격이 높기는 하지만 투자가 불가능한 것도 아닌 만큼 현재 사샤는 정령석을 통해 스스로의 힘을 높이고 있었다.

다만 정령석을 통해 수련하는 동안에는 장시간 활동이 제한된다는 단점이 있었고, 효율 자체가 좋은 방법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급박한 상층 상황에 힘을 제한하는 수련법은 지양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수들을 휘하에 넣기 위한 연구 때문에 장기간 발을 멈추게 되자 이 기회를 살린 것이었다.

‘왠지 나연을 내게 붙여놓으려는 핑계 같기는 한데…….’

굳이 효율이 좋지 않은 그런 방법보다는 일대를 조사하고 레벨을 올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일단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았고 확실히 지금이 아니면 쓰기 힘든 방법인 것도 맞으니까.

레벨이야 죽지 않으면 언젠가는 오르는 것이기도 하고.

“서윤이는 여전히 바쁜가?”

“응. 아직 해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더라고.”

“상층에 와서 마법사들이 고생이네.”

“그래도 자신들이 도움이 된다는 것에 대부분은 만족해하는 것 같았어.”

숙적인 거인들에 대해 알아보고, 마법 저항력이 극심한 거인에게 피해를 주기 위한 방법을 개발한다. 게다가 지금은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 마수들을 길들일 방법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길드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새로운 마법을 배우고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수련을 해야 하며 레벨도 뒤처져서는 안 된다.

사실상 가장 바쁜 집단은 마법사였다.

“가장 천대받았었는데, 중층에서 나름 성장해서 인정받았고, 지금은 핵심 전력 취급이니까. 성취감들이 대단한 것 같더라.”

“그거 다행이네.”

미궁 시절부터 자신들을 키우고 지원하며 인정했기 때문인지 마법사들은 지금에 와서도 충성심이 대단했다. 거기에 더해 성취감과 지구의 상황에 대한 의무감까지 합쳐지다 보니 저 무리한 일정들을 어떻게든 견뎌내고 있었다.

곧바로 침묵이 찾아온다.

나연은 둘이 있는 시간이 약간 어색한 눈치였다. 싫어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자신이 여기에 있어도 되는 것인지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인지 사적인 이야기보다는 공적인 이야기를 선호하는 것 같았고.

주하연과 나서윤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막상 둘은 자신의 일에 바쁜데 자신만 이렇게 한가하게 내 옆에서 이렇게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샤가 그러더라.”

움찔.

사샤의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나연이 반응한다. 아무래도 이곳으로 보낼 때 무언가 언질이라도 들은 모양이다.

“기껏 먼저 손 내밀어 붙잡아 놓고는 방치나 한다고.

“그건… 어쩔 수 없었잖아. 그때도, 지금도 엄청 중요한 때니까.”

그렇게 말하는 나연의 얼굴에는 작은 체념이 있었다.

그간 아주 멀리한 것만은 아니다. 밥을 먹는다거나, 휴식을 취한다거나 할 때마다 분명 함께하기도 했고 대화도 있기는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껏 둘이 같이 지낸 적은 없었다.

사실 그건 나연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에는 다들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만큼 중요한 순간이고 개인적인 감정이나 행동보다는 이전부터 중요시 해왔던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우선되는 순간이었을 뿐이다.

주하연은 길드원 관리와 성장에 바빴고 나서윤은 연구에 몰두하느라 휴식 시간마저 없다시피 했었다.

나 또한 일이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다 보니 누군가와 함께할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려웠었다.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고 할까. 물론, 변명이나 다름없기는 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으면, 책임은 져야 했으니까.

게다가 지금이라면 바쁘더라도 어떻게든 시간을 낼 수는 있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둘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사샤 말이 틀린 것은 아냐. 맞다고 생각해. 자주는 아니더라도… 앞으로는 종종 시간을 낼게. 그 말이 하고 싶었어.”

내 말에 나연이 잠시 주춤거린다.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타이밍이 좋지 못한 것일 뿐이야.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무리는…….”

‘…사샤가 뭐라 할 만하군.’

나연은 조금 위축된 상태였다.

기껏, 어떻게든 정리하려는 나연을 붙잡은 것은 나였다. 나연은 그것을 거절할 수가 없었고. 비록 내가 손을 내밀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본인이 받아들인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내가 행동하게 한 것은 본인이라는 생각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인지 나연은 무척이나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한다…….’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저런 태도를 갖게 만든 것은 내 영향이 크니까. 이후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터다.

나는 가만히 나연을 바라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다른 둘이, 뭐라고 그래?”

내 말에 나연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니! 아냐. 텃세 같은 거 없었어. 언니는 축하해 주면서도… 죄책감 갖지 말라고 말해줬고, 서윤이는 오히려 빨리 알아채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너한테 사실 알려준 게 자신이라면서 오히려 미안하다고 했는걸?”

그럴 터다. 그 둘이… 나연에게 모질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적어도 탑 초기부터 함께한 일행 간에는 내가 알 정도로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면 너도 눈치 보지 마. 시간이 된다면 언제든지 찾아와. 나도 앞으로는 어떻게든 시간을 낼 테니까.”

비단 나연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당장은 몰라도 다른 둘에게도 시간을 낼 필요가 있었다.

내 말에 나연이 가볍게 웃었다.

“응. 고마워.”

한결 편해진 웃음에 일단은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나연과의 약속을 지켰다.

마법사들의 연구가 꾸준히 진척되는 동안 진전이 없는 오우거 마수를 길들이는 시도를 계속했다. 그러면서 나연과 함께 말없이 시간을 보내거나 가끔은 목적을 이루면 지구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사샤가 활동을 할 수 없다 보니 공적인 자리에도 둘이 함께 행동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사냥 위주인 길드원들 중 마법사를 제외한 아직 마스터에 들지 못한 길드원들을 수련시키거나 때때로 내가 이끌고 사냥을 갈 때도 언제나 곁에는 나연이 함께했다.

그러자 이전의 소극적인 모습이 한결 나아졌고, 이전과 비교해 점점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더 많아졌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연이 생각보다 길드원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대강이야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제법 큰 차이가 있었다.

내 파티원들 중 길드원들과 두루두루, 가장 친근한 관계를 맺은 것은 신기하게도 나연이었다. 나 때문에 변하기는 했지만 본래는 나름 정의롭고 선한 성격이었던 나연이다. 현재도 근본이 완번히 바뀐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악인이거나 적이 아니라면 그녀는 친절했고, 길드원들과도 친근하면서도 격의가 거의 없는 어떻게 본다면 이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길드원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나연의 모습은 무척이나 활기차고 즐거워 보였다.

이전의 어색함이 사라지고 한결 편안해진 나연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느 날 사샤가 찾아와 말했다.

“고마워 리더님아. 이렇게 빨리 약속 지킬 줄은 몰랐는데.”

“…판을 깔아 줬으니까.”

역시 계약자라는 걸까. 처음에는 티격태격하더니 상당히 아껴주고 있었다.

“글쎄. 이건 나에게도 중요한 일이라서. 최상급이 되려면 이거 한 번은 꼭 해야 하거든.”

사샤의 말에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계약자가 수련자라는 특이한 존재인 덕분에 나도 여러 보정을 받기는 했는데, 최상급은 보정을 받아도 쉽게 올라가기 힘든 곳이라.”

어차피 벽에 닿는다면, 한 번은 꼭 했어야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가벼웃 웃음이 흘러나온다.

정령이 효율을 추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재미있었다고 할까. 정령보다는, 마치 인간 같았다.

이러는 동안에도 마법사들의 연구는 조금씩 진척되고 있었고, 길드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외부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간 거인의 습격은 없었고 하나둘 3차 전직자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내가 수련시킨 수련자들이 하나둘 벽을 깨기 시작했다.

수개월의 시간이 지났을 때, 마침내 기다리던 소식을 받을 수 있었다.

* * *

“오빠, 성공했어!”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사샤의 수련이 끝나고 이전처럼 여유로운 일정을 잃어버린 나연이 조금 아쉬워하는 듯해 함께 사냥을 나가려는 타이밍이었다.

일대 마수의 영역은 상당 부분 정찰이 끝났고, 데이터가 쌓인 덕분에 나연이 상대하기 괜찮은 마수가 서식하는 곳으로 가려던 참에, 나서윤이 급하게 달려왔다.

“어… 언니랑 사냥 가?”

나서윤의 표정이 조금 떨떠름하게 변한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쪽이 중요하다.

“성공했다는 것이… 설마…….”

“응. 오빠. 늑대 마수, 길들이는 것에 성공했어.”

“…나연아 미안. 아무래도…….”

“응. 빨리 가보자. 나도… 궁금하니까.”

같이 사냥을 나가기에는 너무 중요한 소식이었다.

우리는 급하게 나서윤을 따라 이동했고, 늑대 마수를 데리고 장난을 치고 있는 아멜리아를 볼 수 있었다.

“헥, 헥.”

마치 길들여진 개 같았다.

훈련된 짐승 마냥, 아멜리아를 따르는 모습에 길드원들이 하나같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오셨어요?”

“…성공한 겁니까?”

“네. 완전히 성공했어요. 사실 며칠 되었는데, 확인 작업이 필요해서요.”

자랑스러워하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나는 천천히 늑대 마수를 향해 접근했다.

그리고는 가만히 손을 내뻗었고, 아멜리아는 그런 늑대 마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늑대 마수가 천천히 내 손을 핥았다.

완벽하게 길들인 듯한 모습에, 나는 아멜리아를 향해 말했다.

“…오우거 마수, 길들일 수 있겠습니까?”

“네. 가능할 것 같아요.”

아멜리아의 자신에 찬 대답에, 다시금 움직일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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