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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58화 (258/317)

258화

검은 가죽. 7m에 달하는 키. 전신이 근육으로 뒤덮인 데다가 분노와 살의로 일그러진 얼굴은 무척이나 흉측했다.

마수화가 된 오우거의 겉모습이었다.

그런 오우거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파티의 전위인 한바다와 남은주였다.

“수호!”

마스터에 도달한, 그것도 평범한 마스터도 아니고 한 명은 상급에 도달한 한바다고 한 명은 마기와 상극인 신성력을 사용하는 성기사인 남은주의 스킬이다.

특히 남은주 같은 경우에는 수호에 도발 기능까지 붙은 만큼 오우거의 시선이 단숨에 돌아갔다.

한바다 또한 곧바로 아이템의 기능인 도발을 사용했지만 이미 시선은 남은주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효과 좋네.’

애초에 상극인 기운인 점이 크게 영향을 미칠 터였다.

게다가 그간 꾸준히 써 오며 남은주의 스킬 숙련도는 최고 수준에 달한 만큼 한 번 돌아간 고개를 다시 돌리기는 어려울 터였다.

“크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함성이 일대에 울려 퍼진다. 아무리 도발에 걸렸다고는 하지만 거리낌이 전혀 없었다.

일대 지역에서도 제법 강한 영향력을 가진 모양이었다.

곧바로 달려드는 상대를 보며 남은주가 다리를 대지에 박는다.

“여신의 가호, 철벽의 수호자.”

7m가 넘는 괴물을 상대로 젊은 여성이 제자리를 지키며 방패를 치켜드는 모습은 언뜻 무모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 누구도 걱정 따위는 없었다.

쿠우우웅!

쩌저적.

오우거의 무식한 주먹이 방패 위를 때린다.

바닥의 대지가 갈라지고 어마어마한 굉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지만 남은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밀림 저항. 철벽의 수호자에 붙어 있는 옵션이었다.

과거 내가 저 스킬을 탐냈던 이유였다.

버틸 수만 있다면, 절대 밀리지 않는다.

스킬의 보정은 바닥이 갈라지는 위력에도 그녀를 제자리에서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하유진이 전설급 은신 스킬 세계 동화를 풀며 단숨에 오우거의 팔 한쪽을 그대로 그어버린다.

단순한 긋기가 아니다. 강기 크기를 키웠고 그대로 팔 위쪽을 달려가며 길게 자상을 남긴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큰 상처가 되지는 못했다.

“쳇.”

하유진의 작은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상상 이상으로 피부 가죽이 두꺼웠다. 마기를 머금은 오우거의 피부 가죽은 강기로도 쉽게 뚫기 힘든 모양이었다.

“유진아! 이탈해!”

나연의 외침에 하유진이 빠르게 허공으로 단검을 집어 던졌다.

틈새의 단검. 그 아이템 효과를 사용해 즉시 허공에서 사라져버린다.

““불타올라라!””

화르륵.

“크아아아!”

어느새 사샤와 합신한 것인지 나연이 곧바로 손을 휘저었다.

나연의 모습은 마치 불길에 휩싸인 듯한 모습이었는데, 그녀의 뒤에는 반쯤 투명화한 사샤가 나연과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동시에 같은 말을 외친 듯했다.

정형화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마치 순수한 정령이 자유롭게 힘을 사용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리 방어는 거인보다 강한 듯하지만… 마법 저항은 훨씬 떨어지는군.’

거인의 마법 저항이 이상한 것이었을 뿐 사실 대부분의 종족은 강력한 마법 저항을 갖기가 힘들었다.

하유진이 입힌 상처 위에 나연과 사샤의 정령 마법이 작렬하자 오우거가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단순한 휘두르기임에도 불구하고 경시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한바다는 망설임 없이 그 경로에 끼어들었다.

파아앗.

강렬한, 어마어마한 마력이 허공에 분사되며 강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방패가 허공에 출현한다.

아르테인 공작가에서 받은 수련과 3차 전직을 통해 한바다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다.

그녀는 마력의 바다와 푸른 심장의 영향으로 엄청난 마력과 효율적인 운용을 손에 넣었다.

마력을 저장하고, 사용된 마력마저 일부 다시 되돌려 받는다.

그녀가 마법사였다면, 마력 걱정은 없는 수준이었을 터. 하지만 전사임에도 그녀는 자신의 장기를 한껏 살려냈다.

낭비에 가까운 강기의 운용. 호신강기의 진화 형태나 다름없는 기술을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사용했다.

쾅! 콰장!

허공에서 강기의 방패가 으깨진다.

하지만 한바다는 무사히 공격을 막아냈다.

깨진 것은 강기로 이루어진 방패뿐.

그마저도 파편들이 마력화하여 대부분 한바다의 몸으로 빨려 들어간다.

극한의 효율성. 나 또한 다수의 상대가 있다면 피를 흡수해가며 비슷한 짓을 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한바다는 현재 마스터 수준이었고, 마력을 저장만 해 놓았다면 언제 어디서든 저런 짓이 가능하다는 것이 달랐다.

한바다가 만들어낸 짧은 경직 시간 동안 길드원들 또한 놀고 있지는 않았다.

이연솔의 지시에 따라 온갖 마법들이 일제히 쏟아졌고, 조연은 또한 궁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원거리 공격이 끊임없이 박혀 든다. 근접 직군들 또한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과 같은 움직임으로 오우거를 난도질해갔다.

그러면서도 안전을 최우선한다.

거인과 싸우며 익힌 노하우 덕분이다.

더이상 전력을 잃어서는 안 되기도 했고

그런 아군을 향해 주하연을 비롯한 사제진의 버프가 쏟아진다.

마수인 오우거를 향한 레이드.

이성이 없는, 마기에 침식된 마수인 오우거는 아랑곳하지 않고 흉포하게 날뛰어 댔지만, 끊임없는 공격에 전신이 넝마가 되어 간다.

라이칸스로프와는 다르게 덩치마저 커버리니 때릴 곳이 한없이 많았고, 힘은 강하지만 속도 자체는 부족한 편이었기에 한바다와 남은주가 손쉽게 공격을 사전에 끊어내었다.

속수무책이다.

심지어 도망조차 치지 않는다.

일련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듯한 전투를 바라보며 나는 내가 끼어들 틈 따위는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대로 간다면 어렵지 않게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은 길드원들과 함께 주변을 수색했고, 일대에 달려드는 마물 따위는 없었다.

다른 생명체와는 다르게 마수들간에는 힘의 차이가 분명하다면 결사항전이 거의 없는 만큼 여기에 이 오우거가 있다 보니 약소한 마물들은 자리를 피한 모양이다.

최상급 마법사들 중 이연솔만이 전투에 나선다. 마법사들 또한 고작 200명 정도만이 전투에 참가할 뿐이다.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시도해 볼 셈인가.’

전력은 넉넉하니 현명한 판단이기는 했다.

이쪽이 훨씬 유리한 전투이기는 했지만, 강대한 마수답게 오우거는 제법 오랜 시간 버텨냈다.

2시간에 가까운 전투.

몸이 걸레짝이 되어가면서도 끈질긴 생명력과 끊어지지 않는 광기로 어떻게든 버텨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천천히 무너져 내리더니 끝내는 의식을 잃은 것마냥 바닥에 엎어져 버린다.

쿵.

덩치가 덩치인 만큼 쓰러지는 소리마저도 어마어마했다.

끝까지 나는 나서지도 않았다.

조용히 주하연을 향해 다가가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자 주하연은 인벤토리에서 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말했다.

“…확실히 이정도라면 전력에 큰 도움이 되기는 하겠어요. 앞에 세워 놓으면 어지간한 거인들은 버티지도 못하겠는걸요?”

동감이었다.

무식한 전투 방식이기는 하지만 전사도 아닌, 시민 계급의 거인들이라면 대응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우리 길드원들은 강자 하나를 상대로 어떻게 싸우는지 알고 있었고, 동시에 끊임없이 전투 훈련을 해 온 이들이지만 저들은 다르니까.

단순한 육체의 부딪침이라면 저 오우거는 1등위 전사와 붙여 놓아도 크게 뒤떨어지지는 않는다.

‘진짜 싸운다면 지겠지만.’

최소한의 기술도 없고 순수한 육체 성능은 그래도 1등위 전사가 높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강한 마물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이런 오우거 둘이 협력한다면, 1등위 전사 혼자서는 당해내기 힘들 터였다.

확실히 성능만은 합격점이었다.

나는 쓰러진 오우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근처가 이놈의 영역인 것 같은데…….”

그냥 무조건 돌아다니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이 근처의 다른 마물들이 전혀 접근하지 않았다. 가능성이 높았다.

“이놈의 주거지를 베이스캠프로 삼죠. 거기를 중점으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일부 길드원들을 풀어버렸다.

최대한 뭉쳐서 움직이고, 안전을 우선하라는 명령을 잊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아멜리아와 나서윤이 마법사들을 이끌고 다가왔다.

“오빠, 일단 먼저 해 봐도 될까?”

“바로 오우거에게 시도하게?”

내 질문에 아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가능성을 봐야 하니까요. 마법도 아직은 매혹뿐이고… 그마저도 몇 없어서 오우거에게는 힘들 거에요.”

아무래도 사로잡은 늑대를 닮은 마물에게 시도할 셈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 2시간 동안, 그렇게 요란한 전투를 치렀는데도 전혀 접근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곧바로 마법사들이 준비를 시작했다.

아멜리아를 메인으로, 30명 정도의 마법사들이 준비한다. 하나같이 중급 이상의 마법사들이었고, 그들 중 하나는 나서윤이었다.

매혹을 아는 마법사들이 소수라는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크르릉! 컹!”

어느새 깨어난 늑대 마수가 상처를 입은 채로 끊임없이 짖어대고 있었다.

그런 늑대를 향해, 아멜리아의 정신 마법이 시전되었다.

나는 조금 긴장된 눈으로 늑대를 확인했다.

* * *

오우거가 이 일대를 영역으로 삼는다는 가설은 사실이었고, 더럽기는 하지만 높은 언덕을 중심으로 오우거의 생활 반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길드원들이 나서서 일대를 청소했고, 나는 미궁 조각을 이용해 커다란 게이트를 생성했다.

아무리 내부에서 주로 생활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준비 정도는 해 줘야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마법은 반만 성공했다.

아멜리아의 정신 마법은 늑대 마수를 뒤흔들었고, 잠시지만 분명 얌전해진 늑대를 볼 수 있었다.

이후로도 영향은 남아 타 길드원들을 보면 짖어대는 늑대 마수는 아멜리아를 보면 조금은 덜 짖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계속해서 짖어대었고, 며칠에 걸쳐서 마법을 사용했지만 여전히 늑대 마수는 복종하는 기색이 없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덕분에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마법 연구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하급 마법사들도 쓸 수 있는, 협동 마법을 위한 기초 정신 마법을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정신 마법 자체가 난이도가 제법 있다 보니 예상과는 다르게 시간이 조금 걸리는 편이었다.

덕분에 최고로 고초를 겪는 것은 오우거 마수였다.

나는 매일 재생하며 깨어나는 오우거 마수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시도를 하는 중이었고, 매일같이 오우거 마수를 홀로 압도하며 두들겨 패는 작업에 한참이었다.

기를 죽이기 위해 잔혹하게 쓰려뜨려 봤지만 마수는 마수인지 끊임없이 당하면서도 내게 반항하는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라이칸스로프처럼은 잘 안 되네.”

나서윤이 소환한 라이칸스로프를 이용해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복종하는 기색은 없었다.

마기가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도 고생했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다가온 나연이 조심스럽게 내게 천을 건네주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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