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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46화 (246/317)

246화

“잘 지냈어?”

“덕분에. 장비도 제법 바꿨고.”

‘장비?’

본래라면 신경 쓰려고 했었지만 엘븐하임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는 엘프 놈들 때문에 포기했었던 거다. 그나마 스킬 관련 정보라도 훔쳐서 망정이지, 장비는 꿈도 못 꿨었다.

순간 의아했었지만 금세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황제군.’

최근 우리가 해 준 일들이 많다 보니 신경을 써 준 모양이었다.

국가 단위로 일들이 추진되는 만큼 저런 부탁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였고, 저쪽도 거절하기가 힘들기는 했을 거다. 일단 거래이기는 하지만 검문소도 세웠고 마을도 건설했다.

그를 통해 국가 간 교역도 늘어날 테니 황제 입장에서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일을 잘 해주고 있는 내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리고 그 행동은 옳았다. 상당히 마음에 들었으니까.

‘정령사용 장비는 구하기 힘들기는 하지.’

워낙 정령사 자체가 귀하고 그 수준이 높은 이들이 없다시피 하다 보니까 장비 또한 구하기가 힘들었다. 애초에 정령사용 장비가 나오는 던전은 내가 아는 것이 없다시피 했고, 그렇다 보니 대게 마법사나 사제 장비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조금 아쉬운 편이었다.

그러나 엘프들에게는 정령사용 장비가 넘쳐 흐른다. 수준도 높고. 그렇다 보니 타 일행들에 비해 부족했던 나연의 장비가 한차례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좋아 보이네.”

“고마워.”

약간 어색했다. 나서윤으로부터 들은 말도 있었고, 분위기도 변한 데다가 일행들의 태도가 우리 둘의 행동을 상당히 어색하게 만들었다.

“아, 거…….”

“사샤, 얘기 좀 하자. 정령의 숲에서 어떻게 지냈어?”

순간 사샤가 끼어들려고 하는 것을 하유진이 틀어막았다.

가장 어린 하유진이 저렇게 끼어드는 이유를 단숨에 눈치챌 수 있었다.

나와 나연이 대화할 시간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러게. 궁금하네.”

일행들 또한 그러한 상황을 눈치챈 듯 사샤를 데리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사샤는 가볍게 저항하려는 듯했지만 일행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여 버리니 일단 한 번 접은 듯 끌려가 주었다.

단둘이 남은 상황에 잠시 침묵이 감돈다.

“이야기 들었어 제국이 엄청 혼란스럽더라.”

나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었고, 대가도 충분히 받았으니까. 상층으로 가기 위한 준비는 잘 되고 있어. 길드원들이 마수를 잡으러 다니기도 하고, 필요한 재료들도 여러 경로로 얻고 있으니까. 일종의 대가지.”

“…뭐, 네가 선택한 일이니까.”

나연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지만 역시나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일이 진행되기도 했고,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들은 모양이네.”

일행들이 사샤를 데리고 자리를 피하는 시점에서 눈치를 챌 수밖에 없기는 했다.

나는 어쩐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딱히 캐물은 것은 아냐.”

“그래? 그럼 누가 먼저 말해줬나 보네. 누구야?”

“서윤이.”

“…….”

나서윤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나연이 잠시 말을 멈췄다. 주하연이나 한바다를 예상한 듯했다. 주하연은 일행을 대표해 나와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잦았고, 한바다는 나연을 가장 신경 써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잠시 말을 멈췄던 나연이 입을 열었다.

“합신. 성공했어.”

“…축하한다.”

합신. 나서윤이 말해준 바에 따르면 정령과 계약자가 서로 상당히 마음을 개방한 상태여야 한다고 했는데, 결국에는 해낸 모양이다.

“사고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마음은 열었어. 숨기던 것도 다 들켰고, 그래서 그냥 완전히 개방했지 뭐. 그렇다 보니 사샤도 알게 되었고. …뭐 결국 잔딜리엔 때문이지만.”

“과정은 대충 들었어.”

“뭐, 결론적으로는 여전히 사샤는 그 모양이고, 나를 답답하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서로 다르다는 것 정도는 서로 인정하기로 했어. 그렇다 보니 결국에는 되더라.”

막상 성공하고 나니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쉬웠다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목표는 이뤘으니까, 마음 정리하고 오려고 했어. 사샤는 왜 정리하냐고,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는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안 될 일이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내가 모르는 것 같았다면 조용히 입을 다물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일행들의 행동을 보면서 내가 안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끝을 맺으려고 하는 듯했다.

“진짜 나쁘다니까. 처음 내 기억을 읽었고, 지구에서 자란 내가 아무리 탑에서 적응했다고 해도 성격상 안 될 거 뻔히 알면서도 계속 부추기는데… 진짜 때려주고 싶었다니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고, 얼마나 생각을 했는지 짐작할 수는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딱히 뭔가를 잘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그냥 네가 모르면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는데…….”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탑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런 상황은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역시 안 돼. 아니, 안 되는데…….”

끝맺음.

“막상 보니까…….”

재회 했을 때의, 초탈한 듯한 표정이 흔들린다. 명백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잘 안 되네.”

잘 안된다고 말하는 말을 하는 나연의 표정은 약간 울 것 같아 보였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연은 절대 선을 넘지 않을 거다. 그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끝끝내 악인은 될 수 없었던 것처럼, 마지막 선을 넘지 않고 남아있는 것처럼.

한참의 시간이 지나 조금씩, 조금씩 진정한 나연은 입을 열었다.

“미안. 못난 꼴을 보였네.”

작게 숨을 내쉰 나연이 마저 입을 열었다.

“지금은 잘 안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잘도 그러겠다.”

내 말에 나연의 동공이 커졌다.

나서윤의 말이 맞았다. 나연은 끝끝내 감정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선도 넘지 못했고, 숨기는 것마저도 실패했다.

이대로 미루고 미루고 미루면 끝내 균열이 갈 뿐이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본래라면 나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방침이었다. 이대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었다. 어차피 균형만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면, 그것을 목표인 거인을 몰살시킬 때까지 유지만 할 수 있다면, 이후 내가 목표를 이루어 서로 가끔씩만 얼굴을 보는 그런 사이가 된다면 정리가 될 수도 있겠지.

나연이 진정하는 동안 나 또한 고민했고, 결론을 내렸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저쪽이 선을 못 넘으면 그냥 내가 넘기로,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안 된다는 거, 너도 알 텐데?”

“…….”

내 말에 나연이 침묵했다.

나는 손을 뻗어 나연의 손을 붙잡았고, 가볍게 끌어당겼다.

나연은 저항하지 않았다.

* * *

한참의 시간 동안 나연을 끌어안고 있었다. 품 안에서, 나연이 꿍얼거리는 것들이 들려왔다.

이러면 안 되는 이유, 연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수십, 수백 가지가 튀어나온다.

나는 그런 나연의 입을 틀어막았다. 결국, 선을 넘은 것은 나고, 나연은 저항하지 못했다.

잠시 시간이 지난 이후 나연이 입을 열었다.

“지구로 가면 우리 엄마한테 두들겨 맞을걸.”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네.”

그렇다는 것은 내가 목적을 이룬다는 뜻이니까.

“충분히 감수할 테니까. 결국 저지른 건 나야. 책임도 내가 져.”

“…….”

책임을 질 자신은 있었다. 지구로 돌아간다고 해도, 거인을 막아낸 뒤에도 수련자들의 힘이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수련자들의 필요성은 늘어날 터다. 지구는 이미 변해버렸으니까.

아무리 거인을 잘 막아낸다고 해도 지구의 피해는 천문학적일 터다. 그 틈을 잘 이용해먹을 생각이었다.

사실상 이야기가 끝난 이후 일행들은 금세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눈치챘다. 일행들은 놀라워하면서도 잘 되었다는 반응이었다.

“안 될 것 같더니, 거 봐. 된다니까?”

사샤의 말에 나연이 조금 어색한 듯 시선을 피한다.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어 하는 일행들은 내가 자리를 비켜주기를 원하는 듯한 눈치를 보였고, 나는 나연을 바라보았다.

“내가 말할게.”

나연의 단호한 말에 나는 결국 자리를 피해 주었다.

일행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든 중층에서의 일은 차례로 해결되어갔다. 3대 대귀족과의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 그들이 침묵하기 무섭게 일은 빠르게 진행되어 갔다. 황제파에 들지 못한 귀족들이 뭉쳐 대응했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일부는 독립을 하려는 시도까지 보였지만, 몸부림에 불과했다.

해가 지났을 때, 황제는 목표한 바를 이룬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고, 우리들 또한 상층으로 가기 위한 준비가 사실상 끝난 상태였다.

그사이 나는 던전에 들러 방랑 상인을 만나고 있었다.

“상층으로 가십니까?”

“준비는 끝났으니까요.”

“히야. 정말 빠르시네요. 처음 뵌 것이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나 또한 설마 이렇게까지 빠르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방랑 상인, 네비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정보 레벨을 올리고 싶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포인트는… 충분하시군요.”

당연하다 이룬 업적이 몇 개고 가진 아이템이 몇 개인가. 제국 내에서 내 위치는 황제 다음이나 다름없었으며, 귀족들에게 있어서 나는 황제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였다.

“정보 레벨은 90까지입니다. 적어도 여기에서는 올릴 수 없습니다.”

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는 올릴 수 없다. 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애초에 90이 목표였던 만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이제껏 가져보지도 못했던 다량의 포인트. 그러나 정보 레벨 90은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단숨에 포인트가 뭉텅이로 빠져나간다.

나는 상태 창을 확인했고, 곧바로 정보 레벨 90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솔직한 말로 80으로도 부족함을 느끼지는 못했었다. 어지간한 전설급 아이템 정보도 충분했고, 경지에 집중하느냐고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상층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준비가 필요했다.

나는 즉시 인벤토리를 열어 오래된 아이템 하나를 꺼내 들었다.

[미궁 조각]

―등급 : 준신화

―한 세계의 일부였던 조각 중 하나. 부서진 세계의 파편이다. 소유자는 자신만의 공간을 얻을 수 있다.

―공간 내부에서 다른 공간과 이어진 문을 열 수 있다. 하루 세 번 가능하며, 소유자만이 문을 열 수 있다.

―하루에 한 번, 소유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공간 내부로 초대할 수 있다. '손님'은 하루간 공간 내부에서 머물 수 있다.

―경계의 미궁 전 층 관리자만이 사용 가능하며, 획득 시 귀속된다.

―정보 추가 : 특별한 힘에 의해 숨겨진 기능 일부가 해방되었다. 일정 패턴을 입력해 기능을 완전히 개방시킬 수 있다.

한 줄의 설명이 추가되었고, 동시에 미궁 조각 위로 특이한 길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작고 복잡해 보였지만, 내 눈에는 숨겨진 길들이 명확하게 보이고 있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 정보 레벨 90이 되면서 얻은 정보들이다.

나는 지체 없이 미궁 조각을 향해 마력을 집어넣었다. 그런 나를 네비오스가 환한 미소를 띠며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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