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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45화 (245/317)

245화

황제의 전언. 솔직한 말로 내가 전할 말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대공과는 거래한 적이 있기는 하고 덕분에 아르테인 공작과 이어지며 덕을 본 것은 맞다. 그때의 배운 경험은 이후 라이칸스로프와의 전투를 통해 벽을 넘는 것에 큰 도움이 되었었으니까.

하지만 그뿐이다. 결국 그런 관계일 뿐이고 1회차에서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내가 아무리 거대 길드 소속이었다고는 하나 핵심 길드원도 아니었고 천양 길드는 황실에 속한, 과거에나 대공과 인연이 있었던 전혀 다른 길드에 불과했다.

그런 만큼 나는 대공과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황제의 말을 전해 줄 뿐.

한 번쯤은 3대 대귀족 중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를 대비해 황제가 전언을 남겨 두기는 했었으니까.

그렇기에 대공이 조금 무례하게 찾아왔어도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처음 텔레포트 게이트에서 만났을 때도 무시하려고 작정을 했다면 가능은 했다. 그래도 대공이 곧바로 나를 적대하기는 힘드니까. 적어도 몇 번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대화의 물꼬를 틀 터다. 경지 하나 오른 것이, 그만큼 내 위치를 크게 바꿔 놓았으며 동시에 라이칸스로프를 휘하로 넣은 것은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었다.

괜히 귀족들이 소식을 듣기 무섭게 내 기분이 상할 것을 알면서도 나를 중앙 전선으로 파견해야 한다고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마저도 앞에서 당당히 하지도 못했지만.

“전언…….”

내 말에 대공이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좋은 소식일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터다.

“포기하라고 하시더군요.”

“…….”

“조용히 영지로 돌아가라고, 최소한의 끈 정도는 남겨두겠다고 전해 달랍니다.”

“…하,하하… 공작을 부른 이유도… 항복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라는 말입니까?”

항복. 사실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대로 시작되지도 못한 일이지만.

“공작 각하는 아마 꽤 많은 배려를 받으시겠지요.”

“…그렇겠죠. 대신 스스로 많이 희생해야 할 테지만.”

“중앙 전선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겠죠.”

공작은 잃어서는 안 되는 카드다. 그 경지와 무력은 제국에 꼭 필요하니까.

그에 반해 대공이나 애슐란 백작은 다르다.

대공은 선대부터 이어온, 황제도 무시하기 힘든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애슐란 백작은 요충지를 오랜 기간 지켜온 공적과 저 거대한 세력인 다이딘 대공과도 비교할 수 있을 만큼의 재력 또한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의 힘으로는 나를 막아내기가 힘들 터다. 상성이 좋지 않다. 나는 지켜야 할 거라고는 내 길드원들이 다였고, 어차피 제국을 떠날 예정이었기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나마 아르테인 공작은 황제가 필요하니 배려라도 크게 받지 저 둘은 입장이 다르다. 그래도 다이딘 대공은 최소한의 세력을 유지는 할 수 있게 될 터다.

‘다이딘 대공마저 완전히 무너뜨리면 아무리 황제라도 수습이 힘들기는 하니까.’

뭐, 명목 정도는 유지할 수 있을 거다. 권력은 거의 잃겠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든 황제가 무너뜨릴 수 있는 꼴로 전락하겠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저와 제 가문더러 천천히 죽어가라는 말로밖에 안 들리는군요, 백작.”

“제 의견이 아닌 황제 폐하의 말일 뿐입니다.”

“왜 당신이 황제를 돕는 겁니까.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요? 어차피 떠날 것이라면 이렇게 저를 핍박한 다음 갈 필요가 있나요? 저희가 나쁜 관계였던 것도 아닌데?”

“약속했으니 말입니다. 그 대가로 여러 지원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내 말에 대공은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백작이 신의가 깊은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요. 당신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평등하다고 했다더군요. 즉, 생명 하나하나가 소중했다는 뜻인데,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나는 설마 대공이 이런 구차한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 솔직한 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제 와서 말입니까?”

내 반문에 대공의 입이 강하게 다물어졌다.

그런 사상이 있다는 것 정도야 알려졌다. 다만 그런 이들은 대부분 재능도 없는 하층민에 불과했고, 대부분 제국에서 쫓겨나 죽는다.

애초에 능력 있고 재능있는 수련자들은 이러한 신분제에서 이득을 보면 보았지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이익이 있으면 입은 자연스럽게 다물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현재 백작의 신분이며 애초에 그런 소리를 하기에는 너무 오래 탑에서 지냈다.

알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

이후로도 포기할 수 없었던 대공은 여러 이야기를 내뱉었다. 그놈의 무공 이야기라던가 권력, 더 나은 무력, 재력, 원한다면 결혼을 통해 자신의 자리까지 내어줄 수 있다는, 일국의 왕이 되어보는 것도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까지 꺼내 들었다. 어차피 지구의 시간은 멈춰있지 않느냐며. 그리 급할 필요가 있느냐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차갑게 변해버린 내 표정에 더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럴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된다.

“결국… 끝까지 황제를 따르다 떠나겠다는 뜻이군요.”

황제가 나를 버린다거나 황제가 약속을 지킬 거냐는 등의 이야기는 없었다.

내가 먼저 떠나는 거였으며 수련자의 강화는 황제에게 도움이 되면 되었지 손해가 되지는 않는다. 말을 해도 의미가 없었다.

“따른 다라… 그냥 약속을 지킨다고 해 주시면 좋겠군요.”

차갑게 내뱉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자작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몇몇 병사나 기사들이 덜덜 떨며 나를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시선하나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으니까.

“백, 백작 각하.”

스타거스 자작. 그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는다. 대공을 찾는 듯했다.

내 곁에 대공이 없었고, 내 차가운 표정을 바라보며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백작 각하. 저의 보는 눈이 부, 부족하여!”

“결투를 신청하지, 자작. 이유야 이미 알고 있을 테고.”

뒷공작. 음해, 암살시도. 그런 식으로 적혀있을 터다. 워낙 그러한 자료가 여럿이다 보니 일일이 기억은 나지 않는다.

“용, 용서를, 용서하십시오, 각하!”

“결투를 거절해도 좋지만, 그 결과야 알고 있을 테고…….”

영지전. 제국의 특성상 황제의 승인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리고 어지간해서는 성사되지 않는 일이지만, 최근에는 하루가 멀다고 영지전이 일어나는 상황이다. 대부분이 이름만 영지전이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명분도 있고, 애초에 황제가 원하는 일이다. 승인은 당연히 날 터였다.

“대, 대공 전하! 전하! 중, 중재를 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전하!”

스타거스 자작이 허공에 아무리 외쳐 보았자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대공에게 있어서 중재는 핑계에 불과하고 나와의 대화를 위한 자리가 필요했을 뿐인 터였다. 자작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거다. 어차피 이대로 간다면 3대 대귀족도 목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으니까 자작을 핑계 삼아 움직였겠지.

내가 설득당했다면 모를까, 거절한 시점에서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결국 한참 동안 비명을 질러대던 자작은 뒤늦게 황실에 복종하겠다는 뜻을 비치었지만, 나는 개인적인 복수에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항복을 가뿐하게 무시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귀족들은 이미 미리 분류가 된 이들이다. 스타거스 자작은 거기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는 결국 가족들을 살린다는 조건 하에 결투를 승낙했으며, 대리인을 쓰지 않고 내 손에 죽어버렸다.

그 대가로 가문은 멸문, 영지는 사실상 황실에 귀속되는, 최근에는 무척이나 흔한 일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아마 황실에서 파견한 총독이 올 터였다. 나는 황실 정보 길드에 이야기를 전한 이후 자리를 비켜주었다.

어느새 대공은 사라진 상황이었다.

* * *

그 뒤로 같은 일의 반복이었으며 대부분의 귀족들은 가이아 길드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떠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황실파 귀족들도 두려움에 떨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대부분은 황제에 의해 상당한 권력을 빼앗겼지만, 그래도 황실파에 소속된 덕분에 가문 정도는 유지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수준일 정도였다.

대부분의 군소 귀족들이 내 손에 무너졌을 무렵, 대공이 황제를 찾아갔고, 이후 영지로 돌아가 칩거를 시작했다.

이후 애슐란 백작은 반란을 일으키려고 시도했으나, 자신이 키웠던 수련자, 크리스토퍼의 손에 생을 마감했다.

1회차에서는 전혀 없었던 일이다.

소문에 따르면 크리스토퍼는 나와 싸우고 싶지 않았기에 그런 일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무리 마스터라고는 하지만, 3대 대귀족 중 하나인 애슐란 백작을 암살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 텐데도 용케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그는 갈리아 길드와 함께 전원 황실에 항복해 버렸다.

솔직히 대공 또한 반란을 일으키면 일으켰지, 순순히 항복할 줄은 몰랐다. 오히려 둘이 연합이라도 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의외였다.

황제가 바보가 아닌 이상 대비 정도는 해 놓았겠지만……. 한 번쯤은 겪을 줄 알았었다.

아르테인 공작이 순순히 중앙 전선으로 넘어간 것을 보면 확실히 뭔가가 있기는 한 듯했다.

어쩌면 더 좋은 대가를 약속하거나 나와는 관계없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거기까지는 내가 알 필요가 없었다.

제국은 지각 변동을 일으켰고, 굵직한 이들이 천천히 해결되며 상층으로 가기 위한 조건들이 하나둘 만족되어 가는 시기, 나연이 엘프의 숲에서 제국으로 돌아왔다.

* * *

나연의 모습은 상당히 달라진 상태였다.

장비들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솔직한 말로 그런 것이 눈에 거의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나연의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이전보다도 침착해졌고, 고요한 느낌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과거의 잔딜리엔이 떠오르는 듯한 분위기다. 가끔 보였던, 묘하게 초탈한 듯한 모습.

‘정령력이…….’

상당히 성장했다.

곁에 서 있는 사샤의 모습은 거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크기로 성장한 상태였다.

여전히 중성적인 외모이기는 했지만, 얼굴에 보이는 표정에는 짙은 장난기가 섞인 소년과도 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리더! 오랜만이야!”

상급 정령. 아무래도 벽을 넘는 것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사샤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사샤느 생각보다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언니!”

“…연아.”

“와! 사샤! 이제는 나보다 크네!”

나서윤과 한바다, 하유진이 둘을 반겨주었다.

주하연과 남은주 또한 둘을 반겨주었지만 변해버린 분위기에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다들 잘 지냈어요?”

“벽을 넘기는 했구나.”

“네. 다들 걱정해주신 덕분에.”

“축하해요, 누나. 그럴 것 같았어요!”

가벼운 해후. 일행의 환영에 나연은 일일이 답해주었다.

나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나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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