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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44화 (244/317)

244화

“그렇…습니까.”

토펜 티드린드. 하층의 망하기 직전이나 다름없었던 영지의 영주이나 나를 만나고 마정석 광산을 가진 데다 황실과 연결점을 얻어 새롭게 일어난 신흥 귀족.

“엘리자베스라면… 예. 그간 교류가 많기도 했고… 황실과 연결도 된다고 하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동시에 황제파에 소속된 귀족이기도 하다. 무력은 부족하나 재력은 뛰어나고 내가 없다면 황실과 관계가 틀어질 시 위험해지는 귀족 중 하나다.

워낙 변방이고 신흥 귀족이라 중앙에 영향력도 없고. 황제도 굳이 쳐낼 필요가 없는 귀족이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니 내가 없어도 잘할 사람이기도 하고. 솔직히 이정도 성장시켜 줬는데 아직까지 의존해야 한다면 어차피 오래 못 간다.

그런 그에게 내가 곧 떠난다는 사실을 알렸고, 이후로는 엘리자베스 공주가 내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고 일러두었다.

“언젠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수련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저도 들었으니까요.”

워낙 유명하니까. 그 또한 꾸준히 준비를 했을 터다.

“그럼 광산에 대한 권한은 그녀에게 돌아가겠군요.”

내가 떠날 때쯤 되면 정확하게 권한이 넘어갈 터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 저 또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연한 권리의 행사였습니다. 이만큼 발전하게 해 주셨고, 그중 일부만을 누리신 것이니 말입니다.”

겸양을 떨기는 했지만, 토펜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덕분에 가이아 길드원들뿐만이 아닌 여러 수련자들을 키울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현재 티드린드 영지에 와 있기는 하지만 내 길드원들은 지금도 여러 명분을 갖고 귀족들과 전쟁에 가까운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 또한 방금 일 하나가 끝나 시간을 내 토펜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제국은 현재 몸살을 앓는 중이었다.

엘프&드워프 연합은 현재 내가 엘프의 숲에 다녀가면서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가졌고, 그쪽 요청에 따라 마을을 건설 중이었다.

제국이 인력과 자재를 모조리 대면서 현재도 공사 중이다.

수인들과는 최근 협정을 하며 그쪽과 싸울 가능성은 무척이나 낮았고, 오크 또한 최근 전쟁 때문인지 곧바로 격렬한 전투를 하는 대신 작은 국지전이 조금씩 일어나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평화에 가장 가까운 시기라고나 할까.

황제로서는 가장 원하는, 좋은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제파에 속하지 않는 귀족들을 상대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동을 취했다.

내 길드원들은 황제의 요청에 따라 대리 기사전, 영지전, 범법자인 귀족들을 연행하는 등의 역할을 떠맡았고, 나 또한 스스로가 간혹 직접 결투를 신청하러 다니는 등 여러 영지들을 돌아다니며 온갖 사건 사고를 일으켰다. 그간은 사방이 적인 제국의 특성상 거의 금기나 다름없었던 내부를 향한 정도를 넘는 투쟁.

오래전부터 이러한 때를 기다려왔던 황실은 이제껏 제국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넘겨왔던 것들을 모조리 터뜨렸다.

암묵적인 규칙들이 모조리 부서지고 제국 전체의 공기가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나를 제외한 길드원들 중 가장 바쁜 사람은 나서윤과 한바다였다.

황제는 이 틈을 타서 과거 수련자들, 특히 무법자들과 연결되었던 귀족들을 샅샅이 건드리기 시작했고, 수련자와 관련된 것들은 랭커가 움직일 수 있음을 이용해 대놓고 그들을 핍박했다.

위로 올라가고자 했던 군소 귀족들과 힘이 있지만 애매했던 이들은 나서윤과 한바다를 막아낼 수 없었다.

물론 아무리 시기가 좋다고는 해도, 제국 자체의 힘을 과하게 약화시키는 것은 황제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영지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기사전이나 결투 형식을 선호했고, 설령 상대 영지를 무너뜨려 군대를 해체한다고 해도 대부분을 황제파의 귀족이나 황제가 직접 다시 고용하는 형태를 취해 최소한 군사력을 과하게 약화시키지는 않았다.

상당히 재정에 타격이 가기는 할 테지만, 황제는 자신의 창고를 개방하며 상황을 감수하는 중이었다. 지방 자치에 황제가 적극 개입해 어떻게든 얻어낼 것들은 얻어내는 중이었지만.

물론 귀족들이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자신들끼리 뭉치고, 3대 대귀족에게 붙어 위기를 넘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토펜과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나는 다음 일을 위해 티드린드 영지를 벗어났다.

이전 일의 연장이다. 과거 가이아 길드를 향해 공작을 시도했던 길드의 리스트를 황실로부터 전달받아서 뒤늦게 하나씩 처리하는 중이었다.

명목상으로는 개인적인 복수. 그랜드 마스터가 행하는 일이다. 막을 수 있는 이는 없다시피 했다.

움찔.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다음 영지를 향해 이동하자, 눈앞에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

“…대공 각하?”

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대공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바쁜가요, 백작.”

“그런 편이죠. 최근 좋지 못한 목록을 얻어서 말입니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내 태도에 대공의 표정이 잠시 웃는 상태 그대로 굳었다.

하지만 이내 수긍했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그 위치가 확연히 다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도 나를 위해서 시간을 조금 내어 줬으면 하는군요.”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요청이었다.

약속도 없이, 대공씩이나 되는 이가 텔레포트 게이트 앞에서 시간을 내어달라 일방적인 요구를 해온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원하신다면 시간 약간이야 얼마든지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만, 제가 어떻게 여기에 올 것인지 아신 건지 여쭤보고 싶군요.”

“간단해요. 스타거스 자작이 내게 도움을 요청했거든요.”

스타거스 자작. 이번 차례의 내 목표다.

이미 무너뜨린 가문들이 몇 있었고, 그에 따라 이미 정보 자체는 퍼진 상황이었다. 아마 가이아 길드에게 이미 공작을 시도했던 가문들은 자신들이 이미 목표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다.

황실의 정보력이다. 내가 황실파인 것은 이미 유명하다. 게다가 이전에는 넘겼을 일을 지금에 와서는 하나씩 들추고 있는 시기였고.

그렇기에 스타거스 자작은 3대 대귀족 중 하나인 다이딘 대공에게 붙어 연명하려는 듯했다.

스타거스 자작이 대단한 귀족도 아닌데 대공이 직접 나서는 것은 평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못했다.

‘대공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곤란하군요. 스타거스 자작은 저와 일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왔답니다. 자작이 중재를 요청했거든요.”

피식.

“중재라…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평소라면 거절했겠으나, 대공 전하의 부탁인 만큼 받아들이죠. 여기까지 나와 주셨는데 말입니다.”

“무례한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군요, 백작.”

가볍게 비꼬았음에도 이전과는 다르게 대공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습게도 나와 대공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스타거스 자작의 성이었다.

자작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나와 대공을 영접했고, 나는 그러한 자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발이 빠르군, 자작.”

“백작 각하를 뵙습니다.”

자작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내가 찾아온 이유는 알고 있을 테고…….”

나는 가볍게 황제가 제공한 정보들을 자작의 면전에 들이대었다.

“과거 내 길드를 향해 공작을 했던 기록들이지. 할 말이 있는가?”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대가는 치르겠습니다. 허나 가문의 안위만은…….”

“글쎄. 나는 당한 것은 백 배로 갚아 줘야 하는 성격이라서.”

내 말에 자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다. 이전까지 무너진 가문들을 본다면 내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 또한 알 터다.

“그런 이야기는 들어가서 했으면 하네요.”

대공의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별로 들어줄 마음은 없었지만.

응접실에서 자작이 제공한 다과를 들며 다이딘 대공은 내가 제공한 증거들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확실히 자작의 잘못이군요.”

대공의 선언에 자작은 몸을 떨었다.

가이아 길드가 그렇게까지 크지 않던 시절이다.

물론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던 만큼 스타거스 자작이 가이아 길드에 치명적인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 이쪽에 비밀리에 손을 댄 것은 사실이었고, 자료에는 명확한 증거가 제시되어 있었다.

욕심이 날 만했다. 이런 식의 공작을 한 귀족이 한둘이었던 것도 아니었고. 내 길드가 취급하는 것이 마정석인 만큼 욕심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취급하는 물품에 비해 당시 내 길드는 그리 강한 편이 아니기도 했고.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시빗거리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가 황실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황제의 손에 걸려들었고, 내가 나서게 된 거다.

닭 잡는 일에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지만, 나는 길드장인 만큼 내가 움직이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가문을 멸망시키는 것은 과하지 않을까요, 백작?”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당한 것은 백 배로 갚아줘야 하는 성격이라.”

“대가를 치르지 않겠다는 것도 아닌데, 너무하는군요. 그 정도로 일을 크게 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크게 벌린 일에 대한 감당은 제가 합니다. 역으로 생각해 보시죠. 각하께서는 고작 저만한 놈이 대공가에 수작을 부린다면 가만히 계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지만, 대공이 그런 것을 용서할 리가 없었다.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확실히 처리할 필요가 있을 터다.

허나 나는 이미 같은 이유로 몇몇 가문들을 멸망시켰다.

그것을 예로 들어가며 말할 줄 알았던 대공은 자작을 향해 손짓했다.

자작과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모양인지 잠시 움찔한 자작은 안절부절못하더니 대공이 다시금 바라보자 곧바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대공과 나. 단둘만이 응접실에서 마주 보게 되었다.

나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대공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예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마 끝까지 가실 겁니다.”

내 말에 대공이 살며시 입술을 깨문다.

“그만한 힘을 갖고 어째서 폐하의 검 노릇을 하고 있는 거죠?”

“어차피 제국은 곧 떠납니다. 약속을 지키고 있을 뿐.”

내 말에, 대공의 눈이 살짝 커진다.

“…그렇군요. 하긴. 벽을 넘었으니… 그래도 거인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할 텐데…….”

“이 이상의 강함은 다른 곳에서 얻겠지요.”

여기가 끝은 아니다. 그러나 대공은 멈추지 않았다.

“휘하 길드원들을 더 키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나타난 거인이 한둘이 아니라던데, 백작 혼자서는 힘들 거예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저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이 돕는다면 더 편하게 성장하겠지요.”

대공의 말에 나는 절로 웃음이 나는 것 같았다.

설득. 아마 내가 그랜드 마스터에 들지 못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터다.

게다가 내 휘하에는 라이칸스로프까지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렇게 나오는 것이다.

황제가 마음 놓고 수많은 귀족들을 건드릴 수 있는 이유이자 3대 대귀족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예 내 마음을 돌려볼 생각인 듯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지원하죠. 무공이든, 영약이든, 기술이든지요. 수련자들은 그런 것들로 강해지지 않던가요? 게다가 최근에는 부작용이 없는 무공도 소수지만 개발되었답니다. 벌써 떠나기에는 아쉽지 않나요?”

“별로 아쉽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이 필요하면 황제도 줄 수 있었고, 내가 직접 구할 수도 있었다.

내 심드렁한 반응에 대공이 급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렇게까지 제국을 혼돈에 빠뜨리고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떠나는 것은 그대이지 다른 수련자들이…….”

“폐하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뭐,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 하셨으니 괜찮겠지요.”

설득이 전혀 통하지 않음에 대공이 잠시 침묵한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것을 듣고 싶군요, 백작. 설마 전혀 없다고는 하지 않겠지요?”

전혀 원하는 것이 없었다면 이러한 대화가 계속될 이유가 없다. 일방적으로 내가 우위에 있다고 봐도 되는 입장이다. 황제라면 모를까 어차피 떠날 것이라 말하는 내가 대화를 받아주는 것에 의문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대공을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저는 별로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폐하의 전언이 있을 뿐.”

내 말에 대공의 표정에 긴장이 깃들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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