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무슨 일이지?”
“바사론. 도움이 필요해요.”
바사론. 들어본 이름이다.
‘황제에게 수련자의 존재와 지구의 상황을 전달한 존재.’
아무래도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던 모양인지 지금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조금 늦은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플로어 마스터가 나를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피니아는 바사론에게 내가 하려는 일을 말했고, 상황을 파악한 바사론이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새삼 대단하군. 확실히 어지간한 회귀자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야. 위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운도 실력이지.”
“그렇죠. 이번 잔딜리엔 건만 해도 그래요. 마침 라이칸스로프가 휘하로 들어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아무리 우리의 지지가 있었더라도 곤욕 좀 치렀을 거예요.”
“듣기로는 하층에서도 몇 번이나 틀어질 뻔했었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아, 그 성녀 때.”
“그 외에도 황제도 그렇고, 헬모사 지역을 완전히 무너뜨렸을 때도, 3대 귀족과 거래나 무법자도…….”
과거의 사건들이 하나둘 튀어나온다.
“튜토리얼 때야 회귀를 한 덕분이 크기는 했지만, 다른 것들은 천천히 뒤틀어졌을 텐데 말이야. 잘도 버텼군.”
노골적으로 뒤틀린 것은 중층에서였다. 나머지는 어떻게든 되는 수준이었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플로어 마스터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둘은 떠들면서도 손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내 상태 창이 열렸고, 흐릿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전 그게 신기했어요. 이성훈 때… 동료들로부터 신임을 잘도 받고 있더라고요? 보통은 사소한 걸로도 잘만 무너지던데. 남은주였던가요? 아예 먼저 잘라버리더라고요.”
“눈이 좋았지. 동료를 잘도 모아서 키웠어. 운도 좋았고. 끝까지 경계를 잘한 것도 있었고.”
노골적인 칭찬들의 향연에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내심 바사론까지 이렇게 떠들어 댈 줄은 몰랐다.
“최근에는 다른 애들을 지원하자고 하던 파벌이 다 무너졌죠? 이번 차원은 가망 없으니 팔아서 자원이나 챙기자던 애들도…….”
순간적으로 관심이 팍 쏠리는 주제였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을 눈치챈 피니아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플로어 마스터들 중에서는 회귀자들을 몇 번이고 본 이들이 있어요. 대부분 회귀자를 본 플로어 마스터들은 회귀자에게 기대하지는 않아요. 처음에 대부분 중립을 지키거나 다른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을 살피죠.”
“피니아.”
“뭐 어때요. 이제는 사실상 굳혀졌는데. 이제는 괜찮지 않아요? 어차피 더는 반대할 파벌도 무너진 마당인데? 누가 항의하겠어요? 게다가 탑에 영향을 주는 정보도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기는 하지.”
사실상의 허락에 피니아가 이어 입을 열었다.
“사실상 회귀는 마지막 선택이나 다름없기에 영 가망이 없다 싶으면 일부 플로어 마스터들은 다음 회차를 위해 간섭력 확보 차원에서 인재들을 타 차원에 비싼 값에 팔아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가능성이 0이나 다름없으니까 차라리 다음 세계를 위해 힘을 비축하자는 의미죠. 물론 대부분의 플로어 마스터들은 그런 행동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차원이 멸망당한 이들이니까요. 낮은 가능성이라도 시도하려고 하는 편이죠.”
“…이번 차원은 상대가 좋지 않았지.”
“상대가 왕자와 그 친위대니까요. 하지만 의외로 재능 있는 이들이 많았고 지구의 관리자, 가이아의 현명함과 행운 덕택에 지구의 시간이 멈췄다는 이점도 있었으니까 파벌이 나뉘기는 했지만 차원을 버리자는 이야기는 별로 없었죠.”
생각나는 이들이 있었다. 1회차의 랭커들.
“포디스였던가요? 왕춘이라는 사람을 지지해야 한다고, 길드 하나 잡고 100년 정도 수련시키면 충분히 지구 구할 수 있다고 했었죠, 아마?”
“그루핀은 크리스토퍼를 지지했었지. 재능이 넘친다고.”
“카렐리는 그루핀이 담당하는 하층의 톰 뮐러를 지지했었어요. 크리스토퍼랑 톰 뮐러가 사이만 좋아지면 지구는 안전하다고 외쳤었는데…….”
“웃기게 됐겠군. 크리스토퍼는 유신후에게 기가 눌렸고 톰 뮐러는 아예 반한 것 같던데. 여차하면 스승으로 모실 기세였어.”
“킥킥. 둘 표정이 완전히 썩기는 했죠.”
그 외에 잘루스 라는 사람은 인성 쓰레기인 러시아의 쌍둥이는 팔아버려야 한다고 답이 없다고 했었다고.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항상 보는 것은 아니더라도 수련자들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동시에 의외의 말도 들었다.
“아키밀리가 초반부터 유신후를 지지했던가?”
“그랬었죠. 아무리 보상이라고는 하지만 미궁 조각도 순순히 내어주고 나중에는 정보까지 밝힐 정도였으니까요.”
“…….”
준신화 급 아이템, 미궁 조각. 업적도 업적이라 정보 레벨 90은 달성이 가능한 상황이다. 그런 만큼 곧 달성할 생각이기는 했었다. 예전 같으면 꿈같은 소리다. 방랑 상인을 만나기가 정말 어려웠던 1회차와는 다르게 제국에서의 위치와 무력이 차원이 다른 만큼 지금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아예 그쪽에서도 호의적이라 더더욱 어렵지 않았다.
‘달성, 빨리해야겠네.’
생각지 못한 뒷이야기를 들은 기분이다.
그 외에 에파토스와 리베리드를 비롯해 초기부터 나를 지지해 준 플로어 마스터들 덕분에 알게 모르게 편의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황제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한 바사론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사론이 나를 지지한 것은 하층에서의 성과를 보고 난 뒤였다고.
“…끝났군.”
어느새 요구했던 사항이 끝나 있었다.
자유 능력치의 100 미만이라는 문자가 100 이하로 수정되어 100인 능력치에도 사용할 수 있게 변경되었다.
고작 2글자 수정이었으나 그 효과만은 차원이 다를 터였다.
수정이 끝나기 무섭게 바사론이 입을 열었다.
“과거에는 의견이 나뉘었지만, 지금은 사실상 너에게 전원에 가까운 이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
남은 이들조차도, 내가 상층에 무사히 도착하고 활동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하면 모두가 나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플로어 마스터 전원이 당신을 지지한다면, 어지간해서는 탑의 수련자들을 타 관리자들이 빼낼 수 없을 거예요.”
“네가 키운 전력 모두가 안전하게 지구를 위해 쓰일 거라는 뜻이지.”
“게다가 지구 쪽은 번외 계약도 있으니까요. 이 정도의 압도적인 성과를 내신 보답은, 분명 돌아올 거예요.”
번외 계약. 알고는 있지만,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확실히 슬슬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열세 번째 꽃…….’
“정보, 감사드립니다.”
“뭐, 여러 조건이 충족돼서 그런 거니까요. 평소 당신의 끝없는 노력 덕분이랍니다.”
플로어 마스터들의 압도적인 지지에 높은 정보 레벨, 타 수련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성과와 자신의 고향을 구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드높은 경지 등이 이뤄낸 결과라고 말했다. 일종의 자격을 얻었다고.
“능력치를 올릴 때는 한 번에 다 올리는 것을 추천하지.”
“이전과는 다르게 주변에 영향을 많이 끼칠 테니 지금 바로 하시는 것은 추천드리지 않아요.”
“…혹시 이번에도 오래 정신을 잃습니까?”
“그렇지는 않을 거다. 너는 이미 벽을 넘었으니까.”
둘의 조언에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흥미로운 정보와 더불어 내가 플로어 마스터들의 지지를 온전히 얻어낸 상황이나 다름없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득들 또한 알게 되었다.
히든 클래스를 베푼 타 차원의 관리자들은 아마 제대로 곤욕을 치를 예정인 듯했다.
“그럼 고생하도록.”
“상층, 쉽지 않을 거예요. 정보 레벨 90으로 올리는 것 잊지 말고요.”
“감사했습니다.”
끝까지 조언을 아끼지 않은 둘은 곧이어 공간을 찢어버리고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랜드 마스터에 든 지금도 저런 마법 같은 기술은 어렵다.
‘피의 주인을 이용하면 흉내가 될 것도 같은데…….’
지금 수준으로는 어렵지만 나중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동기로 쓰기보다는 어쩐지 공격기가 나올 것 같았지만.
‘공간에 간섭이라…….’
가볍게 생각을 치운다.
보상을 받았지만 바로 사용하지 말라는 플로어 마스터들의 조언에 우선은 먼저 할 일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곧바로 내가 불렀던, 엘리자베스 공주를 찾아갔다.
* * *
엘리자베스는 진작 와 있었는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네, 네. 오랜만입니다. 유신후 님.”
엘리자베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넘쳤다.
그녀가 산하로 들어온 이후 거의 보지 못하고 지냈었다. 일단 여유가 없었다. 내 산하 길드 중 가장 거대한 길드고, 나름 위치가 공고하기는 하지만 나보다는 주하연을 비롯해 내 길드의 간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터다. 그마저도 직접 본다기보다는 연락을 통하는 경우가 더 많았겠지만.
그런 그녀를 불러낸 이유는 단순했다.
“저희 길드는 상층으로 진입할 예정입니다.”
“…네?”
직접 보지 않고 전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제법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내가 떠난 빈자리를 영국 왕실 길드에 넘길 생각이었다.
이건 그녀에게도 기회이고, 황제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내가 직접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선택했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제가 벽을 넘어 제국 내에서 손에 꼽히는 존재가 되셨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을 겁니다.”
움찔.
내 말에 엘리자베스 공주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그, 그 때문에 귀찮게 하는 귀족들이 느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래서, 가기 전에 황제와 약속한 것을 이행하려고 합니다.”
“약속이라면…….”
“권력을 강화해 드리기로 했죠. 중앙집권을 원하더군요.”
“중앙집권…….”
입헌군주제인 영국. 전혀 다른 차원의 전혀 다른 체제를 가진 왕실의 공주이기는 하나 일단은 왕족이다. 권력을 원하는 사람을 많이 겪어보았을 터. 납득이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을 들어주고 떠날 생각입니다. 지금의 가이아 길드의 위치를 전부 차지하시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타 길드보다는 훨씬 유리한 입장이 될 겁니다.”
그것을 다 받으려고 한다면 오히려 독이다. 그 위치는… 솔직한 말로 내 무력과 휘하 정예 파티, 길드원들의 힘이 없으면 유지할 수 없었다. 진작 뜯어 먹혔겠지.
영국 왕실 길드에는 랭커도 없으며 그 위치를 유지하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황제의 휘하 수련자들과 연합한다면 제법 괜찮은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 터다.
황제 입장에서는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 쓸만한 세력을 얻는 것이니 거절하지도 않을 테고.
중앙집권을 성공한 황제를 위협하기에는 영국 왕실 길드가 한없이 부족하다.
엘리자베스는 내가 떠나고 나서도 자리를 잡을 기회를 준다는 말에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지구에서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내심 쓴웃음이 나오는 것을 삼켰다.
지구에서도 내가 더 유리한 것은 변함없을 터다. 끈을 남겨두는 것에 가깝게 느껴졌다. 다만 그래도 저들이 성장해 온다면 도움이 되기는 할 터다. 거인과 직접 싸우는 것 말고도 쓸 곳은 많으니까.
수련자도 나름 하나의 세력이 되고 신흥 권력처럼 보는 이들이 있을 터다. 그런 만큼 숫자와 그 세력은 중요하다.
이제는 그런 미래도 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알겠습니다. 기억해두죠.”
내 말에 엘리자베스 공주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