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한 달간 여기서 머무른다고?”
우리를 안내했던 남성 엘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되었네.”
“그 정령사는?”
“잔딜리엔과 함께.”
“…말을 높여. 그분의 성함을 그리 쉽게…….”
“너희에게나 대단한 엘프지, 우리이게는 아니다. 잔딜리엔 본인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네가 뭐라고?”
내 말에 남성 엘프가 침묵한다.
“…알겠다. 잔딜리엔 님께서 허락하셨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외곽에 지낼 곳을 정해 주겠다.”
남성 엘프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하나둘 엘븐하임에서 지내며 조심해야 할 행동들을 내뱉었다.
“숲을 과하게 훼손하지 말 것. 특히 거목(巨木)들을 훼손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사냥은 허락하지. 그 외에 일정 구역 이상을 함부로…….”
조잘거리는 엘프의 말을 반쯤 흘려듣는다.
사냥이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는 돌아다닐 수 있다는 뜻이다. 구석구석까지는 안 되더라도 일단 숲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다면 던전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과하게는 안 되겠지만.
남성 엘프의 기나긴 주의가 끝났을 때, 우리는 지낼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븐하임, 그 도시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외곽에 있는 동굴이었다. 그것도 제법 커다란.
설마 숲속에서 동굴로 안내될 줄은 몰랐기에 일행들은 상당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나무에서 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너희는 엘프도 아니고, 한 달 지내자고 그런 것까지 해줄 수는 없어. 어차피 야영 장비는 다 갖고 있을 텐데?”
그는 며칠간같이 이동하면서 우리가 야영 장비를 상당히 잘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동굴은 너무하지 않나 싶었기에 가볍게 항의하자, 남성 엘프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도 한때 강한 마물이 지냈던 곳을 정화한 장소다. 들어가 보도록.”
실제로 생각보다 동굴 환경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래 쓰지 않은 흔적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엉망이라고 할 수준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한 달간 이곳에서 지내기로 결정했다. 특히 마물이 지냈던 동굴이라는 말이 끌렸다.
‘외곽이고, 한때 마물이 지냈던 곳이라면…….’
결계 내부이기는 하지만, 정말 얼마 가지 않으면 세계수를 지키는 결계를 지날 수 있다. 그 정도로 외곽이다.
“결계 바깥은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되나?”
“…본래라면 안 되지만… 잔딜리엔 님께서 거주를 허락하셨으니…….”
조금 골치라는 표정을 짓던 남성 엘프가 끝내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숲에는 마물이 많나?”
“제법. 결계 바깥에는 많은 편이지.”
정말, 던전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국에는 때때로 영지 내부에서도 던전이 발견된다.
그런 만큼 돌아다닐 가치는 있었다.
“잔딜리엔 님이 찾으시면 따로 오도록 하겠다. 그전까지는 되도록… 엘븐하임에 접근하지 않는 것을 추천하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엘프들이 널렸으니까. 뒷일은 책임 못 진다.”
아마 완전히 무시를 당할 것이며 구경거리로 전락할 거라고 덧붙였다.
직설적인 말에 일행이 발끈한 표정을 짓는다.
“그딴건 봐서 알아. 단, 먼저 적대감을 보이면 이쪽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다는 것 알아 둬.”
“그 어떤 이유라도 엘프에게 손을 댄다면… 그 책임은 크게 져야 할 거다.”
나서윤의 말에 남성 엘프가 강하게 경고한다.
“맞고만 있으라는 말인가요?”
일방적인 말에 주하연이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결코 맞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덤비면 죽여버릴 것 같은 일행들의 태도에 남성 엘프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알겠다. 경고를 해 두지. 가만히 있는다면 원한이 있더라도 나서지 않을 거다. 너희의 실력을 알려두도록 하지.”
“…엘프는 하나같이 예의가 없군.”
한바다의 중얼거림에 남성 엘프가 짧게 대답했다.
“너희는 인간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피해버린다.
“…기분 거지 같네.”
남은주의 중얼거림에 일행들이 동조했다.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무슨 동물원 원숭이 보듯이…….”
“후우… 언니 일만 아니었으면…….”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뻗대는 거죠? 세계수가 대단한 것은 이정하지만…….”
“은신도 못 하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국가 간 관계가 엉망인 만큼, 게다가 서로의 원한도 큰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최대한 정보를 모아주겠다고 말했는데 그게 쉽지 않을 모양이었다.
우리는 우선 한 달간 지내야 할 장소를 정비했다.
인벤토리에는 언제나 식량과 야영 장비가 준비되어 있는 만큼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동굴 자체도 커다란 상황이었기에 공간도 상당히 넉넉했다.
자리 정리가 끝나기 무섭게 식량 상황을 확인한다. 식량 자체는 널널했다. 한 달이 아니라 반년은 버틸 수 있는 양이 비축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사냥을 할 생각이기는 했지만.
혹시 좋은 던전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특히 이 주변은 경쟁하는 수련자들도 없는 만큼 우리들의 세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던전 찾기에 열을 올릴 생각은 없었다.
전쟁, 수련, 전투.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휴식을 할 타이밍이 부족했다. 아예 쉬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꾸 일이 터지고 기회가 생기다 보니 제대로 쉴 상황이 아니었을 뿐.
그렇기 때문에 이번 한 달은 나름 작은 휴식기로 삼을 생각이었다.
마물 사냥이나 던전 찾기 등은 어디까지나 완전히 무기에서 손을 놓지 않기 위한 방편 정도로 볼 셈이었고.
‘아무리 그래도 한 달 넘게 손에서 무기를 놓으면… 풀어지니까.’
특히 제국으로 돌아갈 경우 황제의 칼 역할과 상층으로 가기 위한 준비들을 해야 하는 판이다.
직후에 가게 될 상층의 수준을 생각하면, 아예 손을 놓는 것은 힘들다.
쉬는 것은 중요하지만 우리의 처지가 쉽게 그것을 허락해 주지는 않았다.
괜히 마물에 대해 물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연이 중요한 순간이지만 다른 일행들도 계속 성장하는 중이었고, 마침 운도 좋게 특이한 환경에 도착했다.
무언가 성과를 얻는 일행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해도, 확실히 세계수가 있는 장소라서 그런지 느낌이 다르기는 하군요.”
한바다가 중얼거린다.
“마력이 이질적이라 신성력을 모으기가 힘들어요.”
“아, 맞아요, 하연 언니. 저도 그래요.”
“마력은 마력인데 정령력에 조금 가깝다고 해야 하나… 아주 못 쓸 정도는 아니지만 솔직히 조금 불편하네요.”
자리를 정리하기 무섭게 명상을 시작했던 일행들이 한 마디씩 내뱉었다.
수련이 습관인 만큼 화제가 어찌 된 것이 이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여기에도 던전 있지 않을까요? 형, 바로 나가서 찾아봐도 돼요?”
“따로 움직이면 안 되니까… 감시자들도 있기는 하고. 그래도 남아 있는 이들은 상관없겠지. 이 정도로 뭐라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신후 님, 그래도 괜찮습니까?”
벌써부터 의욕적인 한바다와 하유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되기는 하지만, 그간 열심히 달려왔으니 이번 한 달은 쉬어간다고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거지 같은 엘프들이 주변에 많기는 합니다만…….”
엘프들에 관한 감정이 좋지 않은 만큼 거지 같은 엘프라는 말에 일행들 사이로 작은 웃음이 흘렀다.
“숲 자체는 제법 괜찮으니 말입니다.”
“도시 안에 비하면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건 확실히 그렇기는 해요.”
“수련도 중요하고 결계 밖으로 나가면 마물들도 있는 편이라고 하니 수련 자체를 막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너무 혹사는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신후 님.”
“네, 형. 적당히 할게요.”
확실히 그간 빠르게 달려온 만큼 일행들 또한 내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달간 엘프의 숲에서 휴식기가 시작되었다.
* * *
“오빠?”
멍하니 숲을 거닐고 있자 나서윤이 나를 찾아왔다.
약 삼일. 일행들이 휴식기에 접어드는 것에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간 어마어마하게 바쁜 일정을 보낸 만큼 습관적인 수련에서 손을 떼기가 쉽지 않았던 듯했고,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 느긋한 모습을 일행에게 보여야 했다.
나 또한 휴식의 필요성을 느끼는 중이기는 했다. 급격한 환골탈태를 2회나 겪었다. 그것도 짧은 텀을 두고. 그런 만큼 안정의 필요성을 느꼈다.
여러 스킬들을 조금씩 파악하고 있기는 했지만 미친 듯이 몰아치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왜 그래?”
배시시 웃으며 다가온 나서윤이 가볍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거 때문에.”
나서윤이 한 손을 인벤토리에 넣었다가 빼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익숙한 무기가 들려 있었다.
베갈타.
확실히 아주 오래된, 미뤄 놓은 숙제 같은 기분이었다.
“이거 슬슬 얻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베갈타를 얻는 방법은 간단하다. 일정 수준을 갖추고 베갈타의 인정을 받을 것. 그리고 얻은 퀘스트를 수행할 것. 이전에 약속했었지만 여러 일들이 차례로 지나가면서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참에 마침 휴식기이기도 하고, 우리 수준이 수준인 만큼 어렵지 않은 퀘스트라고 생각해 같이 깨자고 온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약속했었지. 미안하다. 늦어서.”
“아냐, 오빠. 오빠 바쁘고 중요한 시기였잖아. 나도 그렇고. 헤헤.”
나서윤이 예전 생각이 나는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퀘스트 내용은 간단했다.
베갈타를 사용하면 하나의 던전이 눈앞에 생성되는데, 생성된 던전에서 모랄타를 찾아 보름간 생존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혼자서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나서윤은 퀘스트 자체를 그냥 유희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걸리는, 색다른 여행 정도? 물론 몬스터들이 나오는 만큼 단순한 여행이라고 보기에는 힘들겠지만.
나 또한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서윤이 상급 마스터에 상급 마법사고, 나는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전사다. 어려울 이유가 없었다.
사실 그간 경지를 중시했고 자신의 성장을 우선했다. 수련의 흐름도 나쁜 상황이 아니었기에 보름이라는 시간을 내기가 곤란했었는데, 이번에는 시간도 되고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라이칸스로프 놈이 남아 있을 테니까…….’
“알았어. 같이 가자. 일행들에게는…….”
“내가 말했어.”
“…그래?”
이미 작정한 모양이었다.
‘하유진에게는… 지시를 해 두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크게 힘을 쓸 일도 없었고, 가벼운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될 터.
내 허락에 나서윤이 기쁜 표정으로 눈앞에 던전을 생성했다.
“오빠, 빨리!”
“오냐.”
나서윤의 재촉에 나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게이트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우리는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오빠. 저거… 설마…….”
“허…….”
나와 나서윤의 말문이 막힌다.
유희. 가벼운 운동.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준은 분명히 낮다. 나서윤 혼자서도 가볍게 놀 수 있는 수준의 던전이다.
내 감각에 걸리는 것들 중 위협이 될만한 요소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다만, 조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눈앞에는 수인과 엘프들이 군대를 이루고 있었고, 그 뒤에는 분명 어리고 허약해 보이기는 했지만… 거인 하나가 서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