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잔딜리엔의 표정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직감이 강한 경종을 울렸다.
“크아앙!”
동시에 라이칸스로프가 강하게 짖었다.
순간적으로 드러낸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과거 랭커를 둘이나 살해했던 전적이 있었던 만큼 강할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직접 만나본 순간에도 직감했었고. 그러나 직접 자신을 드러낸 잔딜리엔의 기세와 살기는 그녀의 힘을 예상했음에도 절로 몸이 긴장하게 만들 수준이었다.
나는 저절로 손이 간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가 다시 손을 펴내며 긴장을 떨쳐냈다.
아무리 히든 NPC라고는 하지만, 잔딜리엔이 그리 쉽게 우리에게 먼저 손을 댈 수는 없었다.
1회차에서는 어지간한 일이 있더라도 특유의 사무적인 태도로 수련자들을 대해 왔었지만, 지금은 아직 처음이기 때문일까 저쪽도 감정 조절을 잘하지 못하는 듯했다.
‘유명… 했었으니까.’
인간 혐오자 잔딜리엔.
특유의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유지해 왔으며 제국과 가까운 장소로 몸을 옮겼을 때는 여러 엘프들이 그녀 주변에서 선을 넘는 수련자들을 막아왔다.
하지만 현재 잔딜리엔은 혼자서 우리를 만나러 왔으며 처음에는 어떻게 성공했으나 지금은 감정을 제대로 조절해 내지 못했다.
“…후우. 못 들은 것으로 하지. 인간. 그만 돌아가셨으면 하는데.”
인간. 1회차 시절, 잔딜리엔이 수련자들을 많이 지칭했던 호칭이다.
처음이기 때문인지 이름을 부르며 어떻게든 숨기려던 것과는 다르게 한 차례 감정을 드러내자 포기한 모양이었다.
나는 슬쩍 일행들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흥분했다지만 그녀는 자신의 기세를 잘도 조종했다. 나나 라이칸스로프는 눈치챘지만, 일행은 그 순간적인 살기와 기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 듯했다.
‘수준이 되지 못하면 화조차 감지하지 못한다라…….’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눈이 있다면 보일 텐데? 정령사의 정령은… 고대의 정령이다.”
“알아. 아쉽긴 하네. 엘프와 계약했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타락한 정령의 동굴을 클리어한 것이 너희였었지.”
감시자를 통해 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게다가 1회차에서는 초대까지 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번 회차에서 우리를 방치했다.
인간을 혐오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령사는 상당히 대우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녀는 이미 3차 전직을 끝냈고 사샤는 중급 정령의 끝에 다다랐는데도 상급 정령이 되고 못 했다. 자격은 충분할 텐데… 그 이유를 알고 싶군.”
“대답해 줄 이유가 없다고…….”
“제국과 가까운 지역에 마을 하나를 건설해 주지.”
“…뭐?”
“어차피 옮겨야 하지 않나? 엘프들 성격에 저 많은 수련자들이 상층으로 가기 위해 여기까지 오게 만들 생각은 없었을 텐데?”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둘 중 하나일 터다. 정말로 내가 첫 번째라서 그렇거나, 예상보다 내가 빨랐기 때문이거나.
“마을은 우리가 알아서 할 수 있…….”
“터를 준비하고 검문소도 세워 주지. 일정 수준이 아니면 아예 찾아오지도 못하도록. 주거야… 원한다면 이쪽에서 준비해 줄 수도 있고.”
1회차에서는 석조 건물에 여러 식물들을 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야 엘프의 숲 초입의 나무들은 그렇게까지 크지 못하니까.
나무를 옮기는 것은 엘프들이 싫어할 테고.
“그녀의 수련을 도와주는 대가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더 해주지.”
내 재력에다가 황제의 권한이면 먼저 말한 것들은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외교의 성과라고 포장해도 나쁜 일은 아니고. 핑계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 그럼 그 고대의 정령을 넘겨. 그러면 너의 정령사를 상급 정령과 계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
“거절할게요.”
나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직업이 문제라면, 계약이 해제되는 순간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거란다. 스킬들 몇 가지가 변하기는 하겠지만…….”
“아뇨, 관심 없어요.”
나연의 단호한 태도에 잔딜리엔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사샤 또한 자신을 갖고 주네 마네 하는 것이 짜증 났는지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꺼져. 내가 있을 장소는 내가 정해.”
“그렇다면 성장도 너희가 알아서 하렴. 그렇게 서로가 친하면 알아서 하겠지.”
그게 안 되니 이러고 있는 것 아닌가.
솔직히 조금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내가 경지에 들었고, 라이칸스로프가 있기 때문일까 잔딜리엔이 선을 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인간을 혐오하고 사무적으로 대하며 성가셔하는 저 괴물은, 자신에게 거슬리는 순간 더러운 본성을 드러낸다.
그 결과는 상황에 따라 다르나, 보통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 대표적인 결과가, 랭커 살해였고.
나 또한, 저 괴물의 마수에 걸렸었다. 그나마 나는 나은 편이었다. 내가 그녀를 거슬리게 만들었다기보다는 내 어떤 점을 보고 저쪽이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며 나를 건드렸었다. 마치, 내가 선을 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때, 그 차가운 눈동자를 보면서 늘 경계심을 가졌어야 했을 정도였다. 먼저 공격하라고, 자신이 나를 죽일 명분을 달라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반발심이 강하다. 몇 가지 조건과 나서윤이 정령사이고 고대 정령인 사샤를 본다면 어떻게 다른 엘프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계수의…….”
“그쪽은, 정령을 도구로 생각하나 보네.”
“……….”
잔딜리엔의 얼굴에 냉기가 어린다.
무표정한 것은 같았지만,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쪽은 파트너로 생각하는 터라.”
나연이 화사한 웃음을 보였다. 어딘가, 도발하는 듯한 미소를.
‘…귀찮게 되었네.’
아무래도 사샤를 내놓으라는 말이 나연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네 옆의 짐승과, 유신후를 믿고 떠드는 거니, 인간아?”
“네가 보인 태도를 보고 보이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잔딜리엔은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나연을 얕잡아 보는 것 같은 태도로 입을 열었다.
“분에 넘치는 것을 얻었으면서도 제대로 쓰지도 못하면서, 입만 살았구나.”
“아, 그래서 그 고통받는 정령들을 방치하셨어요?”
“이쪽도 사정이라는 것이 있단다. 너희 같은 하등 종족은 모르겠지만.”
인간 자체를 눈 아래로 보는 태도에 일행들 또한 슬슬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라이칸스로프가 있으니, 막는 것은 가능할 터다.
최초로 여기까지 온 수련자인 데다 플로어 마스터들 또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터. 잔딜리엔이 쉽게 우리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엘프족 전체가 우리를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다. 제국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을 테니까. 잔딜리엔도 그것은 막을 테고.
그렇지만 아슬아슬한 상황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막말로 저질러지고 나면 늦는다.
피식.
잔딜리엔이 순간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 좋아. 그렇게 원한다면, 가르침을 베풀어 주지.”
“그딴…….”
나연이 순간 발끈하려 하자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시켰다.
그런 나를 보며, 잔딜리엔이 예전이 생각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딘가, 뒤틀린 웃음.
“일단, 여기서 머무는 것을 허락해 주지. 그것도 더 안쪽 자리를 내어줄게.”
잔딜리엔이 어딘가 큰 인심을 쓴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큰 인심을 쓰는 것은 맞았다.
그나마도, 나연이 정령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터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나머지 인간들은 안 돼. 그래도, 수련하는 시간 동안 엘븐하임 외곽에서 머무는 것 정도는 허락해 주지.”
잔딜리엔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거기서 한 달은 버텨. 버틸 수 있다면, 엘프들의 정령술과 정령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 주겠어. 아예 퀘스트로 넘겨줄게.”
곧바로 나연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한다.
정말로, 퀘스트가 넘어온 모양이었다.
나연의 얼굴에 당황이 깃든다.
“거절하려면 해도 돼. 솔직히 말해서, 지금 네가 받은 축복이 없다면, 네가 얼마나 세계수의 근처에서 머물 수 있을까?”
뒤틀린 잔딜리엔의 웃음에, 나연이 나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좋은 기회다.
보는 것만으로도 업적이 달성되고 정령의 친화력을 올려주는 세계수다. 그 근처에서 머무는 것은 보통의 엘프들은 허락조차 받지 못하는, 어거지로 얻어낸 기회라고 볼 수도 있었다.
아마도 잔딜리엔이 그만큼 지위가 되고 가진 힘이 크기에 즉흥적으로 저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일 터다.
그렇지만, 솔직한 말로 너무 위험했다.
‘여기서 더 안쪽이면…….’
아마 가는 즉시 죽는 위치는 아닐 터다. 퀘스트까지 나왔다는 것을 보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닐 거다.
내가 옆에 있는데도 플로어 마스터들이 막지 않았다. 클리어 가능성은… 있었다.
“언니… 너무 위험해.”
나서윤이 나섰다.
“…확실히 위험해요. 제 축복과 가호는,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아요.”
“연아? 너에게는 미안하지만…….”
한바다가 조심스럽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단 한 명 의견이 다른 사람, 아니 정령이 있었다.
“하자.”
사샤였다.
“내가 도와주면, 안 될 것 없어. 여기서는… 힘을 쓰기가 더 편하기도 하고.”
사샤는 정령인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리더님아, 그래도 되겠지?”
일행의 시선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돼.”
단호한 사샤의 말에 나는 나연을 바라보았고, 그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막지는 않을게.”
나는 잔딜리엔을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직, 간접적으로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
“당연한 소리를.”
―그랬다가는 플로어마스터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
잔딜리엔이 나를 노려보았다.
전음을 통한 협박.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이미 나연이 건드려버린 벌집이다. 여기서 주도권을 내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래도 덕분에 나연이 기회를 잡았다. 나쁘지 않다. 나와 라이칸스로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주변을 이용하는 것도 능력이다.
결국 나연은 퀘스트를 수락했다.
“언니…….”
“한 달. 금방 가. 알잖아.”
나연의 말에 나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에 대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고, 기회가 왔는데, 그것도 감당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붙잡지 않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그렇기에 나서윤을 비롯한 일행은 나연에게 격려의 말을 전했다.
“…성공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빼 와. 여기만큼 너에게 도움이 되는 곳은 없으니까.”
“고마워.”
“한 달 동안… 이쪽도 최대한 여러 가지 정보 모아볼 테니까.”
“응.”
나연의 눈에는 결의 가득했다.
다시금 찾아온 발전의 기회다. 희귀한 직업이라는 특성 탓에 이곳 말고는 강해질 기회를 얻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런 만큼 실패할 생각 따위는 없는 듯했다.
그렇기에 나는 힘들면 돌아오라거나 목숨이 우선이라는 등의 그녀를 흔들 수 있을 법한 말들은 관두었다.
“따라와.”
잔딜리엔의 말에 나연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주하연이 그런 나연에게 마지막으로 가호와 축복을 내렸고, 잔딜리엔은 코웃음 치며 주하연을 무시했다.
어차피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저 정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게 둘의 모습이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