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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20화 (220/317)

# 220

가능성

시야가 밝아진 순간 내 눈에 처음 보인 것은 검을 든 내 모습이었다.

전신에 신성력을 흩뿌리고 은은한 푸른 빛이 감도는 눈으로 차갑게 나를 바라보는 나 자신.

서로 막 가진 기술들을 풀어내 보인 이후 무형 강기의 길이를 제멋대로 조절하던 카바락에게 인벤토리에서 꺼낸 단검을 집어 던진 직후였다.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그런 수도 있었냐며 떠드는 카바락을 무시했다.

그보다는 현재의 감각에 집중했다. 전투의 순서는 당연하게도 그날 복기를 한 상태. 다음 전투의 순서들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아직 아니야.’

현재의 카바락은 대전사가 아니다. 나와 같은 경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것이 더 좋았다.

대전사가 되는 그 순간, 깨달음을 얻는 그 순간을 체험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내 눈이 아닌 타인의, 그것도 오크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무척이나 색달랐다.

인간의 눈으로 보는 세상과 다른 것은 아니다. 세상 자체는 같았다. 달라질 이유도 없고. 시선의 높낮이와 흥분할수록 좁혀져 오는 시야, 거기에 더해 인간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오크의 감각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왜 그들이 전투에서 미쳐 날뛰는지, 그들의 전투 방식이 하나같이 본능에 의지하는지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통제 못 해.’

만약 나였더라면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한계였을 터다. 솔직한 말로 이렇게 감각이 미쳐 날뛰는 와중에도 강기의 길이를 조정하고 때때로 나와 대화하고 내 공격에 본능과 이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싸워가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카바락은 이 몸으로 전투 도중 내 검술을 훔치고 벽을 넘어 다음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했다. 미쳤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좁혀진 시야를 다시금 넓히고 본능이 외치는 것은 냉정하게 해석하고 대응한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감각은 나와 다르게 무척이나 익숙할 거다. 평생 이런 감각 속에 살아왔고, 이 감각과 함께 수많은 전투를 헤치며 살아남은 만큼 나와는 다를 수밖에. 나라도 당장 통제가 힘들 뿐 오랜 시간을 들여 통제에 힘을 쓴다면 아주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나는 오크가 아니니 무의미한 가정이었지만.

카바락의 생각까지는 알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가 나와 싸우며 느끼는 감각을 알 수 있을 뿐.

나는 내가 절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강기의 길이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며 전투에 적용하는 감각을 꾸준히 느꼈다.

하지만 이건 도저히 내가 쓸 수 없는 기술임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이건 정말로 오크의 재능인 본능 그 자체에 한없이 의지해야 하는 기술이다. 계산이 아닌, 감각으로 움직이는 검술.

인간의 몸은 오크만큼 이러한 본능이 발달하지 않았다.

내 직감 스킬이 항시 몸에 적용되는 기분이다. 만약 인간의 정신이었다면 수도 없이 미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느새 우리의 전투는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새 나는 아인모가 검술을 펼쳐 반격해오기 시작했고, 카바락의 본능은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

카바락과 맞서는 나. 나는 전투 중 저 움직임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것이 페이크고 어떤 것이 노림수인지 전부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크의 본능이 느끼는 혼란을 같이 느끼면서도 정답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본능이 이리도 혼란을 겪는 와중에도 카바락은 잘 버티고 있었다. 이는 본능뿐만이 아닌 이성마저 제대로 다루는 덕분이었다.

카바락은 내 의도를 파악하고 본능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공격을 스스로 판단해 제대로 막아내고 있었다. 극도의 마력 조절을 통해 오크의 최대 장점을 무력화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카바락은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새삼,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이였는지를 깨달았다.

본능에 완전히 의지하는 오크였다면 상당히 고전했을 검술이다. 아니, 오히려 카바락이 본능 일부를 제어하기에 제대로 판단을 못 내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잠시 떠오르는 상념을 멈추고 다시금 감각에 집중한다.

어느새 카바락은 내가 사용했던 강기 폭발을 스스로 사용해 나를 몰아내었다.

일순간 직감 덕분에 위기를 벗어난 내 얼굴에 작은 안도가 스친다.

‘그렇군. 이런 방식을 썼나?’

무척 비효율적이지만 순간적인 폭발력은 나보다 낫다. 나는 괜찮은 것을 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내가 몰아붙이는 모습이 계속 이어졌다. 카바락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났고, 나는 감각을 공유하는 만큼 그 고통도 함께 느껴왔다. 마치 자해를 하는 기분이었다.

카바락의 몸에 존재하는 마력은 빠르게 고갈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유리함을 절감했고 천천히 카바락을 말려 죽일 셈이었다.

‘지금부터다.’

어느새 카바락의 시야가 미묘하게 변했다. 정확히는 내가 마력 조절을 통해 카바락의 공격을 흘리고 기만해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순간부터였다.

시야가 변했다.

약간 몽롱한 듯하면서도 뚜렷하다. 이전의 좁아지는 시야 따위가 아니었다. 그 시선은 내 발끝부터 발목, 무릎, 허리, 어깨 등을 지나쳐 팔꿈치, 시선, 손목, 손가락 관절의 움직임 모두를 순식간에 담아내고 있었다.

어느새 느껴지는 압도적인 시각의 정보량이 뇌리를 강타한다.

그리고 동시에 밖으로 느껴지는 마력을 역추적해 내 마력의 운용마저 베껴내고 있었다.

나는 그 압도적인 감각에 순간 미치는 줄 알았다.

감각의 무한한 확장. 밖에서 보이는 마력을 감지해 내부의 마력을 추적하고 그 내용을 확인한다. 겉으로 보이는 관절의 움직임으로 근육, 검술의 순서마저 베껴내고 그것을 즉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는 카바락의 천재성에 전율이 일었다.

아니, 이건 단순히 천재성뿐만이 아니다. 이미 이 시점에서 벽이 허물어지고 있던 것일 터다.

카바락의 생각을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울 정도였다.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는 감각의 폭풍에 제대로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현재 카바락을 상대하는 나는 아직 이러한 카바락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여전히 유리한 줄 알고는 수많은 정보를 카바락에게 대놓고 넘겨주고 있었다. 물론, 이딴 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한동안 그 미칠 것 같은 감각의 폭풍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운 시점이 되어갔다.

그때가 되어서야 내가 이상함을 눈치챘고,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엄청난 속도로 결단을 내렸다.

단숨에 파고든 내가 같이 죽자는 식으로 강기를 폭발시켜 버렸고, 그 마력의 폭풍을 느끼는 카바락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단숨에 벽을 넘어섰다.

그랜드 마스터.

몸 안에서 느껴지는, 찰나에 불과한 마력의 흐름을 감지했다.

카바락의 감각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는 특권에서 비롯된 결과. 그것이 없었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감각들이었다.

그러나 카바락은 그 황홀한 감각에 취하지 못했다. 당장 죽을 판이었기에 벽이 허물어지면서 세상의 마력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워 자신의 발전을 위해 사용될 마력을 모두 호신강기로 돌려버린다.

이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랜드 마스터고 뭐고 간에 내 공격이 무방비한 카바락의 몸뚱이를 육편 조각으로 만들었을 테니, 훌륭한 판단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호신강기를 갉아먹는 강기의 파편들은 끝내 카바락의 몸을 난자했고, 카바락은 성치 못한 몸으로 내가 회복되는 것을 구경만 해야 했다.

이후로는 일방적인 농락이 계속되었고, 나는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카바락의 감각 고통과 함께 최대한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솔직한 말로, 그랜드 마스터가 된 이후의 감각은 엉망이었다.

카바락의 몸 상태가 그만큼 좋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랜드 마스터에 어울리는 몸이 될 기회도 날리고 치명상을 입은 상태로 회복조차 없이 버텨야만 했으니까. 벽을 넘기는 했지만 제대로 체감도 해 보지 못했던 거다.

마침내 카바락의 죽음으로 내 체험이 끝났을 때, 다시금 시야가 암전했고 잠시 뒤 나는 내가 본래의 육체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

나는 눈을 뜨기 무섭게 명상에 돌입했다.

막 얻은 감각 일부를 몸에 적용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 바빴다. 예상은 했지만, 대부분이 내게 적용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나는 오크가 아닌 인간이었고, 카바락과 나는 처한 상황 자체가 달랐으니까.

그렇지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와 나는 같은 경지에 있었고 직접 맞서 싸웠던 상대다.

‘도대체 뭐지? 무엇을 보고 벽을 넘었을까?’

내 검술? 마지막 강기의 폭발?

모두 내가 펼친 것이고 제삼자의 입장에서도 보았던 거다. 같은 현상을 같이 관측했는데도 그는 벽을 넘어섰고 나는 넘지 못했다.

카바락과 나는 다른 생을 살아왔고 다른 존재이니 같은 것을 보고도 느낀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다른 삶을 살아왔기에 원인은 모르나 과정은 보았고 결과는 체험했다. 그 무한한 확장을 잠시나마 체감했던 것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러나 방법으로는 힌트가 될지언정 벽 자체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나도 아쉬웠고 이대로는 명상을 끝낼 수가 없었다. 미련이 남았다.

나는 내가 다른 감각을 체감했음을 떠올렸다. 오크의 감각. 평생 느껴볼 기회가 없었던 관점. 나는 그에 대해 고찰했다.

인간은 느낄 수도 없고 알 방법도 없던 감각들. 그 본능의 향연들. 그것을 떠올리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는 미묘한 감각의 확장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내 스킬 슬롯이 하나 남았음에 감사했다.

시스템의 보정이 들어왔고, 나는 이 스킬을 얻고자 희망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메시지 창을 보았다.

[오크의 감각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내 눈이 떠졌고, 시야가 미묘하게 붉어졌음을 깨달았다.

***

“…형?”

“신후… 님?”

미묘하게 붉어진 시야에 한바다와 하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일행들은 차례대로 돌아가며 호위를 해준 모양이다. 이번 차례는 둘이었던 듯했다.

미묘한 흥분감이 몸을 지배한다.

이 감각을, 나는 알고 있었다.

‘오크.’

그들의 감각. 그것을 손에 넣었다. 본래라면 조정에만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이 감각을 얻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이 감각을 얻는 것을 선택했다.

카바락의 깨달음. 그 감각의 확장을 위해서는 오크의 감각이 필요했다. 내가 느낀 바로는 그렇다.

직감이 들었다. 이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확실한 길 하나를 보았고, 기약 없는 벽 앞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물론 카바락은 오크고 나는 인간인 이상 서로 비슷하면서도 분명하게 다른 길을 걷게 될 거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무언가를… 얻으신 겁니까?”

한바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 형! 뭐예요? 뭘 얻은 거예요?”

한바다는 내가 했던 약속을 떠올렸는지 빠르게 내게 달라붙었다.

“오크의 감각.”

“오크의… 감각요?”

“카바락이 벽을 넘는 과정을 체감했어. 하지만 힌트는 될지언정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않았지. 솔직히, 설명하기도 힘들어. 그냥 무한한 감각의 확장을 느꼈다고 보면 돼.”

“감각의 확장….”

한바다와 하유진이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직접 느끼지 않는 이상 이해하기는 힘들 거다.

“결과 중 일부를 느꼈지만, 과정의 해석이 다르고 원인도 알 수는 없었어.”

“…이해합니다. 신후 님은 카바락이 아니니까요.”

한바다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오크의 감각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카바락의 감각에 동조하다 보니, 오크의 감각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카바락이 벽을 넘는 과정을 느꼈지만 원인을 알 수 없고 결과밖에 느끼지 못하니 제 벽은 꿈쩍도 안 하더군요. 너무 아쉬운 상태라 오크의 감각에 집중했는데… 뜻밖에도 스킬화가 되더군요.”

시스템의 힘이었다.

“그래서 받아들였습니다. 이건 도움이 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카바락의 검술을 훔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가며 만들던 그 검술을. 당장은 오크의 감각을 제어하기도 힘들겠지만.

잘만 하면 내가 그랜드 마스터에 오를 수도 있었다. 단 한 걸음. 그 걸음만 내디딜 수 있다면, 나 또한 카바락이 도착했던 곳에 갈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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