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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18화 (218/317)

# 218

나는 이전에 백작의 작위를 달라 하며 수련자들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점을 어필했었다.

그 점은 사실이다. 내 명성에 짓눌려 과도한 행동을 한 이들은 없었지만 만약 그런 짓을 했다면 아무리 배경이 있더라도 내가 고위 귀족이라는 점을 들어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었다.

아무리 배경이 있다고 해도 이런 상황이면 명분에서부터 밀린다.

보호 자체가 힘들어지는 것.

그런데 랭커 제도는 그보다도 더욱 직접적이다.

황제에 의해 임명되는 랭커들은 수련자들을 견제하고 그들을 처벌할 권한이 생긴다.

그렇다 보니 랭커들은 길드들과 친할래야 친할 수가 없었다.

일종의 자정 작용을 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랭커의 자리에 나를 올리려고 한다.

황제는 사실상 나를 이용하고 싶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었다.

황제의 설명을 들은 나는 침묵했다.

랭커라는 존재가 1회차에서는 대단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 권력이 수련자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나마 배경을 등에 업은 거대 길드나 저항할 수 있을까. 다만 거대 길드들도 랭커들과의 마찰은 되도록이면 피했다. 랭커는 대부분 개인이고, 마찰을 해 봐야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의 피해가 더 컸었으니까.

그러나 2회차에서는 막 랭커가 태동하는 시기이고 나는 그런 거 없어도 최고 수준 길드의 길드장이자 개인의 명성은 1회차 시절의 랭커와 비교해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1회차처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랭커의 명성이 커진다고 한들 나는 지금의, 지금 이상의 이름값을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솔직히 필요가 없었다.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상층으로 떠날 계획을 잡고 있었으니까.

하나씩 중층에서의 일을 정리하는 마당에 랭커라는 이름값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서 내가 거절한다고 한들 황제가 크게 뭐라 하지는 않을 거다.

그것을 알기 때문인지 황제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물론 우리 관계가 있는데, 일방적으로 도와달라고 하지는 않겠네.”

나는 대답 대신 그를 바라보았다.

일방적으로 이용해먹겠다는 말에 내 기분이 좋을 턱이 없었다. 아무리 내가 백작의 작위를 얻기 위해서 그런 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는 했으나 백작의 작위와 다르게 랭커가 그런 목적이라면 거의 강요나 다름없었으니까.

“대신 이전처럼 황실 비고에서 2급 이하의 물품 중 원하는 것 하나를 그대에게 하사하지. 게다가 그대에게는 의무를 모두 면제할 생각일세. 권리로 사용하겠다면 묵인하겠네.”

“…랭커의 이름값을 빠르게 올리기를 원하시는군요.”

“수련자들의 성장 속도가 무척이나 비정상적이니 말이야.”

‘그렇군. 하기야 이번 회차에서는 그런 점이 있기는 하니까….’

근본적인 원인은 나였다.

몇 년에 걸쳐 발견되어야 할 알짜배기 던전들은 모조리 털어버렸고, 휘하 길드원이나 산하에 해당하는 이들에게까지 제법 유용한 정보들을 푼 상태였다.

수많은 연구와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효율적인 정보, 성장 방식 등이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이 퍼져버리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장 선구자인 우리 길드의 방식인 만큼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수련자들이 따라 할 수 있었고, 그 결과가 현재의 빠른 성장이었다.

무법자들이 과거보다 더 날뛰다 보니 수련자들의 스스로 위기감을 느낀 것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단순히 이름만을 올리는 데 2급 이하의 보물 하나라….’

실소가 흘러나올 뻔했다.

확실히 명성이 독보적인 것이 체감된다고 할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좋은 조건을 제시해 주시는 데 거절할 수는 없죠.”

“고맙군.”

황제는 내심 거절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내가 허락하기 무섭게 미소를 지었다.

‘보물은 아멜리아나 프레드를 주는 것이 좋으려나?’

프레드는 어느새 성장해 전쟁에 참가 중이었다. 작지만 명성을 날리는 중이라고. 가이아 길드 직속 길드원인 만큼 주변에서 어느 정도의 기대감을 갖기 마련인데 기대감에 맞는 충분한 활약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들었다.

우리와 같은 전장에 설 수는 없었다. 전쟁 직전까지는 정진현이 시간을 내서 키우고 있었지만, 전쟁에 참여함에 따라 따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프레드의 재능이 출중하다고 한들 시간은 필요했으니까.

아멜리아는 이미 상급 마법사에 도달해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었고.

‘아니면 검을 바꾸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흡혈검이 최고 수준에 도달한 만큼 다른 흡혈검을 찾아 진화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나는 황실 비고에 있었지….’

그것을 꺼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쌓아 놓은 공적이 얼마인데 2구역도 아니고 3구역에 있는 검 하나 꺼내오지 못할까.

총 2자루를 먹여야 하는데, 다른 하나는 뭐 적당히 상금이라도 걸면 얻을 수 있을 거다.

정 뭐하면 도적 길드에 의뢰해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대충 이전 흡혈검을 사용하던 사람이 어느 지역에서 얻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직접 가서 찾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가장 큰일이 해결되자 나와 황제는 적당히 풀어진 기분으로 적당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황제의 최고 관심사는 전쟁과 수련자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최대는 아닐지라도 무려 두 종족이 합심해 제국을 공격한 거다.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대 덕분에 위기를 쉽게 모면할 수 있었네. 지노가드 요새에서의 일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군.”

“과찬이십니다. 무척 특수한 상황이었을 뿐이니까요.”

“이번 카바락도 그렇고… 수련자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대니 가능했던 일이라고 알고 있네.”

대부분은 칭찬이었다. 나는 적당히 겸양도 떨고 황제가 가끔씩 물어오는 수련자 관련 이야기들에 최대한 성실하게 답변해 주었다.

황제는 최근 들려오는 무공의 소식에 관한 이야기들을 전해왔는데, 나는 솔직한 말로 무공의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전에야 갓 나온 기술이라 신뢰성이 떨어졌습니다. 아르테인 공작가의 비약처럼 쌓아온 것이 우연히 맞아떨어지거나 다수의 실험이 빠르게 가능한 것도 아니고… 특히 스킬화 되어버린 기술은 지우는 것도 무척이나 힘듭니다. 그렇기에 조심했었습니다. 다만 현재까지 보이는 모습을 보면 특수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효과가 좋지 못한 것 같더군요.”

“하지만 아르테인 공작가의 비약과 무공은 무척이나 잘 맞는 듯하더군.”

“그 내공이라는 것을 확인해 본 결과 수련자 본인의 재능과 기량이 무척이나 중요한 것 같더군요. 컨트롤이 쉽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건 그렇다고 들었네.”

실제로 최근에는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흘러나오는 추세였고 상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황제 또한 새로운 무공을 개발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바람에 조금 실망하는 눈치였다.

아쉽겠지만 무공 개발은 다이딘 대공 휘하의 개발자들을 제외하면 성공하는 이들이 나올지나 의문이었다.

“그러니 그 이번에 영입했다는 형제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것은 개인적으로 반대입니다.”

그 둘은 싫지만 황제가 신성의 계약서까지 이용해 묶어두었다고 하니 충분히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거다.

황제와의 관계를 생각해 개인적인 의견이라며 최대한의 조언을 해 주었다. 선택하는 것은 황제 본인이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약 한 시간가량의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야 나는 황제와의 독대를 끝마칠 수 있었고, 황제는 내가 3차 전직을 하러 간다는 말에 크게 웃으며 무운을 빈다는 말을 해 주었다.

“3차 전직을 한다면 벽을 허물 수 있겠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불가능할 겁니다.”

1회차 시절 랭커들은 3차 전직을 달성했다고 들었는데, 그들이 대전사들을 상대로 우위조차 점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뻔한 이야기다. 이전에야 직접 마스터조차 되어 보지 못했기에 확신할 수 없었으나 이번 회차에서는 다르다.

조금 아쉬워하는, 하지만 내심 안도하는 듯한 황제를 뒤로 한 채 나는 곧바로 대신전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오셨군요, 성자님, 성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성하.”

“잘 지내셨나요, 성하.”

“그간 두 분의 소식은 듣고 있었습니다. 성녀님도 대단하셨습니만은….”

나를 바라본 교황이 말을 이었다.

“성자님의 활약은 독보적이더군요. 성자님 다운 활약이었습니다.”

황제에 이어 교황에게까지 칭찬을 듣고 있자니 솔직한 말로 조금은 질릴 정도였다.

그러나 교황과의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기도실을 이용하고 싶습니다.”

“흐음? 이미 다녀오시지 않았습니까?”

사제인 이상 대신전에 들르면 먼저 기도실에 들러야 한다. 그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개인실이 필요합니다. 실은 이번에 조건을 충족해 3차 전직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수련자들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만큼 교황은 무척이나 놀라는 눈치였다.

“…3차 전직은 현재 아무도 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최초일 겁니다.”

잣미 멍한 표정이던 교황이 크게 웃어젖혔다.

“하하하. 역시 성자님답군요. 대단하십니다.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요.”

오히려 그는 이번에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개인실보다는 이전처럼 중앙의 기도실을 사용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덧붙였다.

잠시 고민하기는 했지만 큰 기대를 하는 듯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간 받은 것들이 있는데, 저런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할 것은 없었다.

“별다른 일은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관은 없습니다. 그저 신도들과 추기경들에게 성자님의 3차 전직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을 뿐이니까요. 하하. 신전 내부에서의 성자님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하신지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추기경은 전쟁 때문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중앙 전선에서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을 터였다.

유일한 인간의 제국인 만큼 신전도 타 종족의 침략에 관한 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금새 내가 수련자 최초의 3차 전직에 도전한다는 소식이 대신전에 퍼져 나갔고, 휴식을 위해 돌아온 추기경 둘과 교황의 허락하에 대신전에서 봉사하는 특수한 신도들이 내 전직을 보기 위해 다들 찾아왔다.

생각보다 많은 수에 조금 얼떨떨해지는 것도 잠시, 어차피 별일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만큼 곧바로 기도실의 중앙의 여신상을 향해 다가갔다.

[3차 전직의 요건에 도달하였습니다.]

[3차 전직을 진행하시겠습니까? Y/N]

나는 고민 없이 Y버튼을 눌렀다.

[전직이 가능한 목록을 불러옵니다.]

여전히 나타나는 수 없는 목록을 무시하고 현재 전직한 직업을 유지했다. 성자는 이미 신성 계통에서는 최상위 직업이라 직업명이 변할 것은 없었다. 아름다운 검사 또한 마찬가지. 히든클래스인 이상 스킬을 배울 기회가 생길 뿐이었다. 배울 것은 없었지만.

그러나 성자의 등급이 준신화가 된 것을 보고는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직업의 등급은 보정에 큰 영향을 끼치는 만큼 신성 관련 스킬들의 효율이 엄청나게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3차 전직으로 인한 보정의 강화에 더해 등급 상승 보정까지 생각한다면….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열세 번째 꽃이 오랜만이라면 반가워합니다.]

전직 타이밍이기 때문일까 열세 번째 꽃이 갑작스럽게 난입했다.

‘…오랜만기는 하네.’

[열세 번째 꽃이 중층의 관리자들은 더럽게 까다롭다며 어떻게 말 한마디 못 건네게 하냐고 짜증을 부립니다.]

‘얼마 안 남았어. 곧 상층으로 진출할 계획이다.’

[열세 번째 꽃이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라며 기뻐합니다.]

비록 상층에 도달해도 그리 자주 말을 걸 수는 없겠지만.

‘길드 단위로 이동할 예정이라 몇 년은 걸릴 거다.’

짧으면 1년 정도면 되겠지만, 길면 2년 이상 걸릴 수도 있었다.

[열세 번째 꽃이 이미 그 속도만으로도 엄청난 거라고 대답합니다.]

‘이번에는 왜 나타난 거냐. 딱히 줄 것도 없을 텐데?’

[열세 번째 꽃이 오랜만에 대화하는데 너무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대에게는 이미 무언가를 줘 봐야 수준이 너무 높아서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건 그렇지.’

[열세 번째 꽃이 열심히 고민한 결과 어차피 스킬은 받지도 않을 것, 기왕이면 그 힘을 모조리 직업 보정에 쏟아붓겠다고 외칩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아니, 오히려 환영한다고 할 수 있었다. 쓸모없는 것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게다가 검사 관련 보정인 만큼 업적 보상을 통한 카바락의 감각을 ‘체험’할 때 검 관련 보정이 높으면 큰 도움이 될 터다.

내가 허락하자 곧바로 상태 창이 변하는 것이 느껴졌고, 동시에 내 몸이 빛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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