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랭커 제도
남은주는 한동안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후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숙여버렸다.
“…신후 오빠는… 힘들지 않아요?”
“글쎄, 가끔은 그럴 때도 있긴 하지. 그래도 이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애초에 내가 견디지 못하면 모조리 무너진다. 괜히 내가 일행의 중심이 아니었다. 그나마 최근에는 조금 나아지는 경향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무너지면 오래 견디지는 못할 거다.
“그리고 이제껏 잘만 의지해 놓고는 뭘 그리 새삼스럽게?”
“그, 그건….”
남은주는 길드를 위해서 이성훈과의 연락도 끊고 지내는 중이다. 뭐, 이성훈이 조금 거지같이 굴기도 했고 이성훈 본인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부모님과도 친한 소꿉친구를 밀어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이미 준 스킬을 회수할 수도 없었고, 이만큼 믿을만한 관계를 만들기도 힘들었다.
애초에 남은주를 버린다는 선택지는 나에게 믿음을 준 시점부터 완전히 사라졌다.
‘재능만 따라주면 완벽한데….’
그러나 아쉽게도 재능과 함께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을 정도의, 맹목적인 감정을 가진 존재는 나서윤 말고는 없었다. 현재는 애인이기도 하고.
정확히는 내가 확신하는 것은 나서윤 뿐이다. 재능만이라면 현재의 한바다도 포함되는 편이었지만 나서윤 만큼 맹목적으로 나를 믿는 이는 아니었다. 뭐, 애초에 나와 갈라질 생각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녀는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에 속했다. 애초에 나서윤이 특이한 경우일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하유진도 포함해야 할지 모르지만, 하유진은 어리다. 지금 당장은 몰라도 지구로 귀환한 뒤 부모를 만난다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 지금처럼 계속 맹목적일지는… 물론 끝까지 나와 함께하기는 할 테고 거인과도 끝까지 싸울 테지만, 지구에서 부모를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간다면 지금처럼, 나서윤마냥 맹목적인 감정을 계속 유지할지는 모르겠다.
'벌써 걱정할 일을 아니고, 어차피 내 목적은 끝까지 함께할 테니 상관은 없지만.'
남은주의 부족한 능력 쪽은 내 도움으로 많이 나아진 상태이니 지금 부족한 멘탈만 잘 관리해 준다면 그녀는 이제까지처럼 본인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거다.
지구에서도, 큰 도움이 되겠지.
“…지금까지 그렇게 의지만 해 왔으니까, 그래서….”
“이제 와서 새삼 미안해지셨다?”
“…이만큼 키워줬는데도 아직도 이모양이니까, 면목이 없었어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건 거쳐야 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몇 번씩이나 거치는 과정이다. 다만 남은주나 내 일행들의 경우에는 그 재능과 내 도움 덕분에 이런 경험을 할 일이 거의 없었기에 뒤늦게 이리되었을 뿐.
“면목이 없기는 무슨… 앞으로도 계속 전쟁에는 참가할 거야. 힘들면 천천히 움직여도 돼. 마침 한동안은 쉬기도 할 거고, 나도 3차 전직을 해야 하거든.”
“…3차 전직이요?”
“어, 카바락을 죽이고 나니까 경험치가 엄청나더라. 업적도 얻었고.”
“정말, 차원이 다르네요, 신후 오빠는.”
“네가 기대도 별다른 차이를 못 느낄 만큼 대단하기는 하지.”
가벼운 너스레에 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이 남은주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부담이 많이 덜어진 모양이다.
“그러게요. 거뜬하겠어요. 근데 업적이면….”
나는 업적의 내용과 보상에 대해 남은주에게 알려주었다. 업적 보상의 내용에 남은주의 얼굴에서 넋이 사라져 버렸다.
“자, 자랑할 만하시네요.”
남은주도 마스터인 만큼 저 보상의 가치를 단숨에 눈치챘다.
“이건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테니까. 뭐, 당장에 바로 벽을 허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금 정도는 내준다고 봐야지.”
“축하드려요, 신후 오빠. 어제 말씀하시지….”
“피곤했어. 어차피 3차 전직을 먼저 할 예정이기도 하고.”
“그렇네요.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역시 신후 오빠가 제일 먼저 전직을 하게 되시네요.”
별수없는 일이다.
내 속도를 따라잡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경지를 올리는 데 필요한 것들까지 단번에 얻어냈다.
역시 탑이라고나 할까… 목숨을 걸기 무섭게 그에 걸맞은 보상을 단번에 내려준다.
나는 카바락의 시신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내심 카바락의,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육신이나 그 잘난 금제, 마력 회로 등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참아냈다.
남은주가 한창 기분이 좋은 시점이다.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완전히 극복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해결할 수 있을 거다.
***
“네에에에에?”
“오빠, 그거 정말이야?”
“미친….”
일행들에게 얻은 것과 현재 레벨을 밝히기 무섭게 하나같이 경악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상에, 그랜드 마스터의 감각이라니….”
“축하해요, 형. 이러면 형은 그랜드 마스터가 되는 건가요?”
“감각만 잠깐 맛볼 뿐이야. 벽이 너무 두꺼워서 당장은 힘들 것 같아.”
“형이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형을 믿어요.”
하유진의 맹목적인 지지에 나는 절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이후 이쪽 지역에 침입하려는 조짐은 없습니까?”
“네. 전혀요. 완전히 포기한 모양이에요.”
잘 되었다. 사실상의 의뢰 완수임 셈이다.
“그렇다면 잠시 수도로 향했으면 합니다. 저 또한 3차 전직을 해야 하고, 은주도 쉬어야 하니까요.”
“물론이에요. 알겠어요.”
사실 남은주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티는 안 내지만 하나같이 조금의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주하연을 비롯한 일행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여 내 의견에 찬성을 표했다.
정확히는 나서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상태였지만.
그녀만큼은 억울함과 울분이 가득했을 뿐 별다른 공포감에 먹힌 것 같지는 않았다.
‘거인을 만나도 멀쩡할 것 같은데….’
무척 특이한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일행들에게 시디안 지역을 떠날 채비를 하도록 지시하고 시디안의 영주를 찾아가 우리가 떠날 것을 통보했다.
영주는 무척이나 걱정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이 근처를 재침공하려는 낌새가 전혀 없었고 그런 기색이 없다면 우리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음을 알고 있는 영주는 자신이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위기에서 구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짧은 송별을 끝내기 무섭게 우리는 즉시 수도로 향했다.
막 3차 전직을 위해 대신전을 방문하려는 시점에 황제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름 고위 귀족인 백작이기에 수도에 방문했다는 사실이 황제에게로 넘어간 모양이다.
전쟁 중이고 만날 이유도 없었기에 그냥 지나치려고 했지만 황제가 원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잠시 3차전직을 뒤로 미루고 황제를 찾았다.
“오랜만이군, 백작.”
“그렇습니다. 폐하.”
황제는 조금 수척해진 상태였다.
“…그대의 손에 카바락이 죽었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카바락은 잘생긴 외모와 외팔, 뛰어난 실력 덕분에 나름 명성이 자자한 오크였다. 그런 오크가 사망했다는 소식인 만큼 제법 빠르게 이야기가 전달되는 모양이었다.
“과거 그대에게 패했던 만큼 자유를 얻기 무섭게 그대에게 도전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다.”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이야기는 예상외였다.
“카바락이 대전사의 경지에 올랐다는 이아기가 있었다. 사실인가?”
‘그 사실까지 퍼졌나?’
의외였다. 나는 순간 멈칫했고, 대답이 조금 늦었다.
“…사실입니다.”
“흐음….”
내 말에 황제의 얼굴이 복잡해진다.
나는 황제가 오해할 수 있음을 알기에 상황이 특수했을 뿐 내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든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그 전투의 과정을 듣던 황제는 심각한 얼굴로 내뱉었다.
“자네, 정말 죽을 뻔했군.”
“…….”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여전히 위험한 인생을 살고 있구만. 하기야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내 목적을 아는 황제는 조금 안타깝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카바락이라는 오크도 대단하군. 그 상황에 벽을 허물다니….”
황제는 조금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최근 수련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상황일세. 야마모토 하지메도 그렇고 왕춘도 그렇고… 하지만 그렇게 활약했음에도 여전히 가이아 길드의 아래였거늘, 이번 사건 덕에 아예 비교 상대로 거론조차 되지 못하겠군.”
나름 1회차 시절 랭커를 차지했던 이들답달까. 나름 준수한 활약을 펼치는 듯했지만 지금의 나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란 실력이었다.
잠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황제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의 실력은 현재 완전히 독보적이더군.”
“…….”
“자네와 비교되는 수련자는 사실상 없었어. 게다가 이번 소식이 빠르게 퍼지는 만큼 그대의 이름값이 한층 더 비싸질 모양이야.”
더 오를 이름값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내가 이번에 자네를 부른 이유는 따로 있다네.”
잠시 말을 멈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나는 랭커 제도를 도입할 생각이야.”
랭커 제도. 그 말에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설마….’
“랭커… 제도라니요?”
“그대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네. 수련자의 성장은 보통이 아니더군. 물론 그대와 같이 독보적인 이는 아직 나오지는 않았지만 자네 못지않게 엄청난 성장세나 활약을 보이는 이들이 늘어났어. 자네는 성자이기도 하고 한 세력의 수장이기도 하며 목적이 제국과 충돌하지는 않네만… 모든 수련자들이 자네 같지는 않지.”
모든 수련자들이 나 같지는 않다.
정확히는 나와 가이아 길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빌레딜 지역을 처리하며 유능한 인재들을 얻었네. 정확히는 몇 되지 않네만… 특히 우두머리였던 형제 둘이 심상치 않더군.”
‘…우두머리 형제?’
“특이한 이름의 형제였는데…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하층민인 척하고 있더군. 속을 뻔했네만, 층 전체가 사실상 무법자나 다름없는 이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고 전쟁 중에 분류할 수도 없어서 몰살을 명했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들일세. 몇몇 쓸만한 이들만 빼내려고 시도했던 거였는데, 그리될 줄은 몰랐지.”
‘…러시아의 형제 랭커가… 본래는 마피아의 우두머리였다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피해자인 척하는 가해자였다니. 솔직히 제법 충격적이었다.
황제가 속일 이유가 없었다. 1회차 시절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숨겼다는 뜻이 된다. 죽은 이후에도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보면 상당히 철저하게 자신들의 과거 흔적을 지운 모양이었다.
“재능이 너무 아쉬워 신성의 계약서를 통해 제약까지 걸며 휘하로 받아들였다네. 이들은 괜찮을지 몰라도 앞으로도 이런 이들이 늘어난다면 무척이나 곤란하겠더군. 특히 수련자들이 이번 전쟁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지지 세력을 끌어모으는 것을 보고 관리의 필요성을 느꼈다네.”
황제의 눈은 차갑게 변해있었다.
“그렇기에 랭커 제도라는 것을 도입할 생각이야.”
랭커 제도. 그것의 탄생 배경이 이렇다는 소문은 있었다. 사실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했고. 랭커들은 수련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은, 저에게 협력을 하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자네에게는 미안한 말이나, 맞는 말일세. 나는 자네가 첫 번째 랭커가 되어 주기를 원하네.”
“…….”
첫 번째 랭커. 과거 왕춘이 얻었던 자리다. 그 자리가 이번 회차에서는 내 손에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이 랭커라는 것이 미안한 말이지만 자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걸세. 대우가 좋기는 하겠지만 지금 자네가 누리는 것에 비하면 별거 없네. 다만 엄선된 이들인 만큼 개인의 명성에 더해 랭커라는 명성이 더해지기는 할 것일세. 그대에게는 별 의미가 없겠지만.”
과거 1회차 시절의 랭커 제도. 랭커는 고위 귀족에 준하는 위치를 보장받고, 수많은 혜택을 얻는다. 다만 이미 내가 받는 대우가 그 대우보다 상위 호환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이미 고위 귀족이고 거기에 더해 성자다. 명성도 대우도 랭커보다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었다.
황실은 그런 엄선된 랭커들에게 적절한 예우를 했으며 황실과도 나쁘지 않은 관계를 구축했던 것으로 안다. 게다가 황제의 말대로 랭커라는 이름값은 어지간한 강자들은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수준에 달하게 된다.
“랭커들의 의무는 하나. 수련자들을 감시하고, 그들이 문제를 일으킬 경우 처리할 것.”
그 수련자들에는 랭커들 또한 포함된다. 즉, 서로 또한 견제를 해야 하는 셈.
나는 침중한 눈동자로 황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