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업적을 이룩하였습니다]
[대전사를 살해한 자]
-그랜드 마스터에 도달하지 않은 몸으로 오크의 그랜드 마스터, 대전사를 최초로 살해하였습니다.
-보상 : 1회에 한해 일정 시간 동안 살해한 그랜드 마스터의 기억을 재현, 체감할 수 있습니다.
“…….”
말을 잊었다.
그랜드 마스터의 시점을 재현, 체감한다고?
‘벽을 넘을 수 있는 결정적인 힌트를 준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내가 살해한 이는 카바락, 막 그랜드 마스터에 돌입했던 대전사다. 그의 시점이라고 해 봐야….
‘벽을 넘는 그 순간, 그리고 막 올라온 시점으로 나에게 살해당하던 기억.’
그 정도밖에 없었다.
일정 시간이라고 했지만 그렇게까지 짧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라면 아예 카바락이 그랜드 마스터로써 살아왔던 생애를 전부 체감하는 수준일 터다.
정말 내게는 절실하고도 유용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보상의 시점을 조금 뒤로 미루었다.
당장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조금 준비를 하고 완전한 상태로 체감을 하고 싶었다.
아쉽게도 나는 카바락과 다르게 전투 중에 벽을 넘는다는, 기괴한 체험을 하지 못했으니까.
만화 속 주인공도 아니고 싸우면서 진화한다니, 그런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나는 사방에서 나를 찬양하는 소리를 들으며 쉴 수 있는 장소로 복귀했다.
“고생하셨어요.”
“하연 씨도요.”
주하연은 어딘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기야 과거처럼 목숨이 어쩌구 하기에는 환경이 많이 변해버렸고 이번 싸움 자체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저희는 한 게 없는 걸요?”
“다른 네임드들을 경계해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오빠, 그 오크의 시체는 왜 챙겨온 거야?”
“그래 보여도 경지에 올랐던 녀석이야. 내부를 확인도 해야 하고… 은주한테 도움이 되기도 할 테니까.”
남은주는 자신을 위해 시체를 챙겼다는 말에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남은주는 어떻게든 정신을 수습해 공포에 떨면서도 주하연을 지키며 앞으로 나섰고, 비록 아무것도 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전쟁터 한복판에서 버티는 것에 성공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 전투 자체는 보는 것을 권했었다. 카바락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줄 생각이었으니까. 힘들기는 할 테지만, 그래도 본인이 의지가 있는 데다가 경지도 있는 만큼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생각보다 승부가 어려웠고 하마터면 패배할 뻔했기에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지는 확인을 해야 하겠지만.
“이쪽 지역에 쳐들어온 인원들의 동태를 확인했으면 합니다. 도망칠 가능성이 높지만, 일단 의뢰로 온 만큼 해결은 해야 하니까요.”
“…그런 것을 봤는데 남아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시디안 지역을 완전히 정리하고 난다면 일행들은 또다시 전장을 떠돌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 다들 90레벨에 도달하지 못했고 전쟁 자체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다만 나는 90레벨에 도달하였으니 먼저 전직을 하고 만약을 위해 함께 다니기만 할 뿐 전쟁에 참가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 같은 불상사는 막아야 하니까.
‘키우는 것도 일이군.’
중층의 일들이 여러모로 끝나가는 시점인 만큼 더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이 되자 아니나 다를까 모든 수인과 오크들이 시디안 지역에서 물러서 버렸다.
하기야 몇만 단위가 찾아와도 카바락 수준도 되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나를 막을 수 없었다. 심지어 나는 수가 많으면 지치지도 않으니까.
네임드 오크들이 카바락의 시체를 완전히 포기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놀랍기는 했다.
‘나중에 찾아오려나….’
가능성은 무척 낮지만, 오크 로드가 카바락의 시신을 되찾으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금술을 다른 이들에게도 적용하는 것으로 보아 더는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만 일단 왕자이기는 하니까.
게다가 생존한 네임드들로 부터 그가 죽기 직전 대전사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될 터.
그러니 그 전에 확인을 해야 했다.
하루를 푹 잔 덕분인지 정신적인 피로는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회복이 되기 무섭게 나는 곧바로 남은주를 찾아갔다.
“신후 오빠?”
어제 큰 전투를 치른 만큼 짧은 통보 이후 곧바로 휴식에 들어갔던 내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으음….”
나는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카바락과의 싸움에서 상당히 유리할 줄 알았는데, 정말 목숨을 다해 싸우고 나서야 승리할 수 있었다.
얕본 것은 아니다. 다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리될 줄은 몰랐으니까.
‘카바락이 중간에 갑자기 벽을 허물 것이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내가 조금 주춤거리는 모습에 남은주가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어색하게 물었다.
“일단, 어때?”
“…이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졌어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단숨에 알아챈 남은주가 대답했다.
“아직은 힘들지 않아? 당장은 전투를 피하는 것보다는….”
“아뇨. 차근차근 회복해야죠. 확실히 오빠가 카바락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는 조금 나아지기는 했어요. 절대적으로 대적할 수 없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절대적으로 대적할 수 없는 상대라….’
마계라도 가지 않는 이상에야 그런 이는 없을 거다.
적어도 탑에서 대적할 수 없는 상대는 없었다.
애초에 수련을 위한 장소니까. 언젠가, 넘을 수 있는 이들뿐이다. 다만, 모든 이들이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마지막에 카바락의 경지가 올라 더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기에 조금 걱정했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나마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도 못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카바락의 시신을 챙겼어.”
카바락의 이름에 남은주의 얼굴이 조금 굳는다.
“한 번쯤…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지 몰라.”
아예 마주하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 정신력이 범인과 다른 마스터인 만큼 가능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마스터이기에, 상대와의 차이를 눈치챈 덕분에 공포심이 파고든 것이니까.
게다가 남은주의 의지가 강한 만큼 한 번쯤 시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남은주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내게 물어왔다.
“…같이 가주실 수 있을까요?”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안 그래도 조금 걸렸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주는 이왕 결심한 김에 바로 가겠다는 의사를 표했고, 나는 그녀의 뜻을 존중했다.
우리는 곧바로 카바락의 시신이 보관된 장소로 향했다.
남은주는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다.
꿀꺽.
카바락의 시신은 특수한 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내가 관 뚜껑을 열려 하자, 남은주가 나를 제지했다.
“직접… 하고 싶어요.”
“…그래.”
남은주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다만 이전보다 나아졌다는 말이 사실인 것인지 아니면 내가 함께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행동 자체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약간의 머뭇거림. 몇 년간 죽음에 익숙해졌지만 지금은 조금 특별한 상황이었다.
남은주는 눈을 질끈 감더니 곧바로 관 뚜껑을 열어젖혔고 그 안에는 상처 투성이었으나 거의 멀쩡한 상태의 카바락이 누워 있었다.
흠칫.
남은주는 떨리는 눈으로 카바락을 바라보았다.
분명 죽은 시신임에도 불구하고 남은주는 한동안 카바락의 얼굴을 제대로 응시조차 하기 힘들어했다.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몸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스터가 제 의지대로 몸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치명적이다. 마스터쯤 되면 그 미세한 떨림이 어마어마한 빈틈으로 보이니까. 그만큼, 남은주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한동안 카바락을 바라보던 남은주가 물었다.
“…신후 오빠는, 무섭지 않았어요?”
“조금은.”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은… 익숙하니까.”
10년이 넘었다. 아니, 20년도 넘었나? 1회차를 포함한다면 이미 20년도 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인간성이 마모되고, 지구에서부터 이어진 인격은 이미 없다시피 하다.
망가졌다는 자각은 있지만 그 망가짐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오히려 적응했다고 생각한다. 이곳과 지구의 환경은 다르고, 살기 위해서는 변한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거인이 침공한 이상 지구 또한 과거의 지구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가족들은 어색해하겠지. 내가 그들을 그리워한 만큼 그들은 나를 그리워하지 않았을 테고, 내 집착은 가족들에게 짐이 될지도 모른다.
‘상관은… 없겠군.’
그때는 또다시 적응할 뿐이다.
“신후 오빠도 우리랑… 아니 나랑 같은 시기에 소환되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신후 오빠는 자기 몫을 그렇게 퍼 주면서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이렇게 강한 데….”
그에 비해 자신은 너무 나약하다고, 지금도 미세하게 떨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글쎄… 나도 공포 정도는 느껴. 이번 전투 때도 카바락이 예상 이상으로 강한 덕분에 힘들었고. 잘못했으면 죽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신후 오빠는 그 상황에서도 뭘 해야 할지 알고, 그게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해버렸잖아요. 죽을 수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압축된 무형 강기를 그대로 폭발시켜 같이 죽자고 했었던 그때를 말하는 듯했다.
“저는… 그런 거는 도저히 못 할 것 같아요….”
“하라고도 안 해.”
애초에 해서도 안 된다. 남은주가 뚫리면 바로 후열이다. 악착같이 살아서 막을 생각을 해야지 같이 죽자는 기술을 쓰는 순간 이미 진 거다.
나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만들며 말했다.
“애초에 널 죽게 둘 생각도 없어. 내가 있는데 왜?”
“…거인은 하나하나가 괴물이라고 들었어요. 드래곤과 동급이라고.”
나는 정정하려고 했으나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구를 침공한 거인들은 실제로도 그렇다.
일반적인 거인들이라면 모를까 지구를 침공한 거인들은 하나하나가 최소한 카바락 수준은 된다고 봐야 한다.
일반 거인들만 해도 하나같이 마스터보다 강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그런 평범한 거인이 아닌 만큼 말해도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더 강해져야지. 지구로 귀환을 포기할 건 아니잖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엄마도 보고 싶고… 여기서 영원히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알아요. 그런 곳이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더 위험하다는 것도 겪어 봐서 알고요.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이 꼴이네요.”
남은주는 어딘가 씁쓸한 표정이었다.
목표가 있고, 뜻은 있는데 몸이, 재능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 슬픈 듯했다.
“고칠 수 있어. 여기는 지구와는 달라. 너도 성장했고.”
“거인을 봤을 때 또 그럴 거예요. 저는 그게 무서워요. 그때 가서 또 이 꼴이 되었을 때, 또 신후 오빠가 고치겠다고 위험에 뛰어들고, 또 저만 이렇게 돼서 신후 오빠가, 하연 언니가, 다른 동료들이 저를….”
“글쎄, 내가 봤을 때는 전혀 아닌데. 너는 그렇게 생각해?”
“…….”
남은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부정적인 감정에 삼켜졌을 뿐, 그녀도 진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나와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내가 있었고 내가 이끈 덕분에 4년이 넘는 시간 동안에도 내 일행들은 비교적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팀원들 사이에서도 유대감이 강했다.
1회차에서는 같은 길드라고 할지라도, 설령 대형 길드의 1군에 속하는 파티일지라도 이 정도 수준의 유대를 갖는 경우는 드물다고 할 수 있었다.
1군 끼리도 전설급 아이템 하나를 얻는다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차지하기 위해 싸웠고 작은 이득도 칼같이 나누어야 속이 풀리는 족속들이었다.
그나마 무법자처럼 최후의 선을 넘지 않았을 뿐, 대부분의 수련자들은 극도로 이기적이다. 그런 이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기도 했고.
“그리고, 까짓것 그런 상태가 된다고 해도 내가 너를 버리겠어?”
남은주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남은주를 향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얼마든지 넘어져라. 오래 걸려도 다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줄 테니까. 별것도 아닌 걸로 고민하지 마. 너는 충분히 제 몫을 다하고 있으니까.”
“…또, 신후 오빠에게 짐을 지우라고요?”
…늘 그래 오지 않았던가? 뭘 새삼스럽게 구는지 모르겠다.
“그래. 필요하다면 짐을 지우고, 힘들면 기대.”
나는 과거의 나서윤에게 했듯 남은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내가 파티장이고, 길드장인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