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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215화 (215/317)

# 215

강렬한 폭발음이 주변을 울린다.

안 그래도 나와 카바락의 대결로 인해 일대가 초토화가 된 상황이었는데 그곳을 한 번 더 파헤치는 일격이 작렬했다.

“크헉!”

폭발이 가시자 카바락의 몸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있었다.

“…크으… 같이 죽자는 건가?”

나 또한 멀쩡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말해, 한순간 의식이 끊겼었다.

호신 강기를 둘렀지만 순식간에 깨져나갔고 전신이 피투성이로 변해버렸다.

너무 무모했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오크인 카바락이, 본능으로 싸우는 종족이 내 검술을 훔치고 있었다.

게다가 거기에 자신의 전투 방법까지 섞고 있었다. 마력의 눈동자로 보이는 카바락의 마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기도 했고.

조금 늦기는 했지만 제대로 알아챌 수 있었다.

카바락은 벽을 넘고 있었다.

내 검술을 훔치고 내 전투 방법을 이용하면서 뭔가를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막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바락이 벽을 넘었다가는 승리는커녕 생존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다.

나는 전설급 아이템을 제대로 장비하지도 않은 상태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장비라도 제대로 갖췄다면 카바락의 경지가 오른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내가 노리는 장비는 아직 등장할 시기가 아닌 만큼 일행과 휘하 길드원들의 장비를 우선한 덕분에 현재 내 장비 수준은 일행들 중에서도 최하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카바락을 막아야만 했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쿨럭….”

나와 카바락은 서로 선홍빛 피를 토해낸다.

“…젠장.”

“하하… 역시 전장의 신께서 그대와의 만남을 주선해주신 이유가 있었군.”

카바락은 이미 벽을 허물어버렸다.

아슬아슬하기는 했다.

내가 기습적으로 강기를 폭발시킨 시점에 경지에 진입한 모양이다.

그 때문인지 약간의 대응은 성공했고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생명이 한순간에 끝장날 수도 있었다. 카바락 뿐만이 아니라 나 또한.

그렇기에 이런 무식한 방법을 시도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내가 죽을 수도 있었고 살아난다고 해도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힘들다.

만약 카바락이 여기서 죽었더라면 즉시 네임드들이 달려들었을 거다.

그렇기에 내게 유리하고 안전한 장기전을 이용해서 천천히 말려 죽여버릴 생각이었는데, 그게 잘 되지 못했다.

이미 외부의 네임드들은 무척 위험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카바락이 죽는 즉시 나를 죽이려 들 것 같았다. 다행히 일행들이 그들을 견제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움직이지는 않는다. 카바락이 살아는 있는 모습을 확인했으니까.

내 일행들과 신경전을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크흐흐. 단 한 발자국. 허락해 주신 것은 그곳이 다인가….”

자신이 대전사가 되었음에 희열을 느끼던 카바락.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씁쓸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드높은 경지에 발을 내딛은 것 치고는 무척이나 자괴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다. 솔직히, 나는 대충 이유를 알고 있었다.

실제로 카바락이 벽을 넘는 순간 무언가 강렬한 마력의 움직임이 있기는 했다. 다만 카바락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다.

기껏 대전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에 죽어버릴 뻔한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호신 강기를 전신에 휘감았고, 그렇기에 대전사가 됨으로써 얻어야 할 것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것을 알고 경지가 오르지는 않으니까. 아마 다른 대전사들을 찾아가거나 기록을 뒤지지 않을까.

물론 살려 보낼 생각도 없었지만.

나는 피투성이가 된 몸이 서서히 아물어가는 것을 느꼈다.

본래라면 아무리 불사의 육체라고 해도 무형 강기의 폭발에 입을 피해를 이리 빠르게 복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강기는 나의 것이었다.

그런 만큼 상처 회복을 거의 방해받지 않았다.

덕분에 계속 피를 흘리는 카바락과는 대조되게 나는 천천히 어깨를 돌리며 서서히 다음 움직임을 준비했다.

카바락의 위기 상황임에도 네임드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움직이지 못하는 거다.

아직 카바락과의 전투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흐흐흐. 금술을 사용하는 시점에 대전사가 되는 것은 포기했었거늘….”

내가 일어나는 모습에 카바락이 중얼거린다.

미치도록 부러웠다. 그는 언제나 나보다 한 발자국 앞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끝이다. 그는 대전사가 되었으나 온전치 못한 몸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움직이는 모습에 카바락이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힘겹게 검을 들어 올린다.

극한으로 활성화된 마력의 눈동자가 그 검을 노려본다.

‘빌어먹을.’

마력의 눈동자가 있기에 알아챌 수 있었다. 평범한 검으로 보이는 것 주변에는 완벽한 무형 강기가 있었다.

내 수준이 최상급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거기에 더해 마력의 눈동자가 없었더라면 그 존재 자체를 알 수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마력을 바탕으로 무형 강기를 생성했다.

그 강렬하다고 느꼈던 무형 강기가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초라한 것이 맞기는 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저 완전한 무형 강기가 탐났다.

내 몸이 거의 회복되어가는 와중에도 카바락은 공격을 해 오지 못했다. 그 정도로 상처가 중하다. 오크 특유의 생명력으로 어떻게 생을 붙잡고는 있었지만 지금도 당장 치료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였다.

내가 자신을 향해 다가가자 카바락이 피곤한 얼굴로, 그렇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듯한 각오가 깃든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접근하는 것도 잠시 폭발적으로 속도를 올렸고 카바락은 그런 나를 막아왔다.

몇 번의 검격이 교환된다.

카바락의 검은 무형 강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척이나 은밀했고 내 불완전한 강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했다.

서로의 강기가 부딪칠 때마다 내 강기가 일방적으로 부서져 갔다.

그러나 결코 내 손해가 아니었다.

카바락은 경지가 올랐으나 마력을 채 회복하지 못했고, 자신 특유의 강기의 길이로 장난치는 공격을 전혀 하지 못했다.

동시에 일방적으로 내 강기가 부서져 갔지만 그의 바닥을 치는 마력은 현재의 무형 강기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나 또한 마력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카바락보다는 한결 여유가 있었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서로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나는 내 강기가 부서지는 고통과 부러움에. 카바락의 얼굴은 육체가 서서히 무너져 감에 따라 표정이 망가져 갔다.

“컥! 쿨럭!”

카바락의 몸이 천천히 무너진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런 카바락을 바라보았다.

나는 카바락을 완전하게 무너뜨리기 위해서 절대 무리하지 않았다. 마력이 부족하고 그의 경지가 대전사에 달했다고 하더라도 육체가 저 모양 저 꼴이면 결국 시간을 끌수록 내가 유리하다.

돌고 돌아 본래 내가 하려고 했던 대로 나는 빈틈 없이 철저하게 카바락을 공략했다.

그것을 느낀 카바락이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지만 지금 몸 상태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카바락의 처절한 분전에 네임드들의 손이 푸들푸들 떨린다.

눈앞에서 위대한 대전사가 된 오크가 나타났다.

그것도 로드의 자식인 왕자다. 그런 그가 죽어가는데도 그들은 구경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끼어들고 싶을 거다. 하지만 기껏 대전사가 된 왕자의 명예를 위한, 호적수와의 결투를 망칠 수는 없었다.

결투를 망치고 그를 어떻게든 살려낸다고 한들 이후 명예를 잃어버리게 된 카바락이 어떤 취급을 받을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미 패배했던 상대이자 도망쳤던 상대와 다시금 싸우는 상황이다. 또다시 제 3자의 개입으로 도망친다면 저 위대한 전사가 납득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애초에, 저쪽에서 그들을 견제하는 일행들이 있는 이상 구출하는 것조차도 힘들겠지만.

스치듯 펼쳐진 아인모가 검술. 허와 실을 뒤바꾸며 그를 속여낸 검이 카바락의 옆구리를 훑는다.

다시금 붉은 피가 대지에 뿌려지고 카바락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온다.

카바락 또한 내게 베껴낸 아인모가 검술을 사용했지만 그 몸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서서히 파탄을 드러냈다.

대전사가 되었지만 제대로 된 실감 하나 하지 못한 카바락은 천천히 움직임이 둔해져 갔고 곧이어 다리 한쪽이 내게 베어 한쪽 무릎을 꿇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런 상태가 된 카바락을 바라보면서도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카바락은 마지막까지, 바닥까지 힘을 쥐어짜 순식간에 강기를 늘려 나를 찔러왔고, 나는 가볍게 공격을 피해내었다.

카바락의 얼굴에 절망 어린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하. 정말 슬프군. 기껏 대전사가 되었거늘, 고작 발만 잠시 담그고 이렇게 가는가….”

마력이 바닥나 무형 강기조차 유지하지 못하게 된 카바락이 탄식했다.

나는 집요할 정도로 그를 괴롭혔고 그는 작은 희망의 불씨마저 일으킬 수 없었다.

내가 그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을 때, 그는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급격한 표정 변화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닌지 절로 경계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카바락은 정말 만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신후.”

“…….”

“즐거웠다.”

저딴 몸 상태만 아니었다면 제대로 상대하기도 힘들었을 오크가, 자신을 죽인 나를 향해 말했다.

“그대들은 강자를 죽이고 성장한다지? 부디 올라와라. 내가 도달했던 이 장소에. 나를 죽인 전사가, 벽을 넘지 못하고 죽는다면 정말 한스러울 것 같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대답을 들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덕분에 그토록 염원하던 곳에 도달하였다. 후회는… 없다.”

카바락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서서히 눈을 감았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의 죽음에 여운을 느끼지도 못한 채 나는 곧바로 내게 달려오는 네임드들을 맞이해야만 했다.

몇 개의 메시지 창이 눈을 가렸지만 즉시 치워버렸다.

휘하 일행들이 즉시 마주 달려 나와 네임드들을 막아내었다.

네임드 오크들과 휘하의 길드원들은 하나같이 흥분에 손을 떨면서도 서로를 죽여버리겠다는 듯한 공격을 연신 퍼부었다.

네임드 오크들은 카바락의 시체라도 회수할 요량인 듯했다.

그러나 나는 카바락의 시체를 넘겨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전사의 시체다. 남은주의 일도 있었고, 쓸 곳이 많았다. 금술도 알아봐야 하고 대전사의 경지에 도달한 이의 몸은 다른 오크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만 했다.

결국 네임드 오크들은 카바락의 시신마저 챙기지 못한 채 울분에 찬 표정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쫓지 않았다. 아무리 불사의 육체 덕분에 몸이 거의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심적으로 심각하게 지쳤고, 이번 전투를 통해 알게 된 것들을 정리해야만 했다.

성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나를 바라보는 일행들의 불타는 듯한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나와 카바락의 전투. 평범한 마스터들의 전투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전투에 일행들의 가슴에 불이 붙은 모양이다.

하기야 둘의 전투에 의해 주변이 초토화가 되었을 정도니까.

“성, 성자님 만세!”

“으아아아아아! 위대한 영웅이시여!”

몇몇 병사들이 광기에 찬 표정으로 나를 향해 외쳤다.

그러자 다른 병사들이 나를 향해 마찬가지로 칭송의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왜인지, 오늘따라 그 꼴이 무척이나 보기가 싫었다.

잠시 치웠던 시스템 메시지가 생각났다.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와 업적을 달성했다는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달성한 레벨은 90. 달성한 업적은 최초로 그랜드 마스터를 살해한 자.

그토록 오르지 않던 레벨이 카바락을 잡음으로써 단숨에 90에 도달했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업적을 획득했다는 것이 더욱 신경 쓰였다. 그리고 업적에 대한 보상을 보았을 때 나는 성으로 복귀하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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