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카바락과의 전투에서 형편 없이 져 버린 덕분에 공포심이 생겼다. 솔직한 말로 그간의 잔혹한 전투와는 달랐다.
초기에는 분명 비슷한 위기가 있기는 했다.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와 싸워왔고 내가 전투를 가르칠 때만 해도 내가 지키고 있었다뿐이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이와도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과거의 남은주와 지금의 남은주가 다른 점이라면 그녀가 현재 마스터에 도달했다는 것.
처음, 자신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고 자신에게 살의를 가진 최상급 마스터, 그랜드 마스터나 드래곤과 같은 상위 존재에 가까운 자와 정면에서 싸운 것이다.
과거의 자신과는 다르게 마스터에 도달함으로써 이전의 외형뿐만이 아닌 압도적인 마력과 경지의 차이에 자신이 온갖 보정과 아이템 스킬을 갖고 있음에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버림으로써 지금과 같은 상태에 도달한 것이었다.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스스로 이겨내는 것이다. 문제는 으레 정신적 문제들이 그렇듯이 혼자서는 해결하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하지만 지구와는 다르게 최소한의 의지와 여러 정신에 도움을 주는 아이템들을 이용하면 해결이 가능한 만큼 나에게는 큰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여러 차례 상위 존재에 가까운 카바락과 싸워봄으로써 훗날 거인과의 전투에서나 경험해 볼 것을 미리 경험하고 이겨내 볼 기회까지 얻었다는 것이니, 나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아마 다들 정도가 남은주에 비해 약하기는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공포를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나도 그렇기는 했었으니까.’
다만 무너지지 않았지. 무너질 수도 없었고. 아이템의 도움을 받으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데, 과거의 나에게 그런 돈은 없었다.
아마 이겨내지 못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겠지.
그렇기에 나는 이것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투자를 해 줄 가치가 없는 놈도 아니고 남은주다. 완전히 내 파티원이 되어버린 그녀에게 내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었다.
내가 공포의 근원, 카바락을 없애버리겠다는 내 말에 남은주는 얼이 나간 듯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하긴… 신후 오빠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은데?’
카바락에 대한 공포가 정말 깊숙한 곳까지 새겨진 만큼 나에 대한 신뢰도 어마어마한 모양이었다.
카바락의 존재감이 과장되면 과장되었지 그리 만만한 이미지가 머리에 박힌 것도 아닐 텐데도 불구하고 나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니….
거의 우상화 수준이다.
확인해 본 결과, 나서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인원이 카바락에 대한 공포심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그 한바다조차도 내게 불안한 얼굴로 조심하라고 말했을 정도니까.
“전부 푹 쉬세요. 내일은 아마… 나설 일이 없을 겁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에 오는 바람에 상대의 전력도 모르는 수준이다. 잠시는 눈으로 본 것이 다일 정도.
나는 그럼에도 일행들을 향해 나설 일이 없을 거라고 대답했다.
카바락도 마찬가지겠지. 아니어도 상관은 없었다.
네임드 몇몇이 있지만 이쪼겡 비하면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사실상 카바락을 죽이면 나머지는 얼마든지 학살할 수 있고 카바락 또한 마찬가지로 나만 죽이면 이쪽 지역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일행들 앞에서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고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안정감을 선물했다. 동시에 몸 상태를 최선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새롭게 해가 떠오른 날 아침, 새벽부터 카바락이 나를 기다렸다.
***
“유신후!”
쩌렁쩌렁 울리는 카바락의 부름.
나는 그런 카바락의 애타는 부름을 무시하지 않았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카바락이 환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팔 하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럽게 잘생겼다.
하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과거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대전사의 경지에 들지 못했다.
“오랜만에 보니 좋기는 하나, 그대와의 싸움을 기다릴 수가 없구나.”
오크 특유의 사나운 웃음을 지으며 카바락이 말했다.
“그러니….”
스릉.
나는 카바락의 말을 끊듯 가볍게 검을 꺼내 들었고 카바락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검 또한 꺼내 들었다. 대화 따위는 필요 없었다. 몇 번이나 싸워온 상대다. 오랜만이라고는 하나 오늘은 분명한 결착이 날 것이다.
일행들에게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카바락을 얕본 적은 없었다. 내가 유리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나 카바락 또한 그간 가장 치열한 중앙 전선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다.
순순히 당하지는 않을 거다.
카바락은 자세를 잡는 나를 보더니 워 크라이도 없이 순식간에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당연하게도 무형 강기가 씌워진 검이 있었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키기긱.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게 내 능력치는 이미 전부 100에 달한 상황.
공격해 온 카바락의 검에 같은 무형 강기로 맞서며 나는 천천히 카바락을 밀어내었다.
텅!
그러자 카바락이 물러나며 말했다.
“…정말 많이 성장했군. 역시 내 감은 틀리지 않았어.”
“꼭 전에는 이긴 것처럼 말한다? 도망치다가 팔 하나 날려 먹은 주제에.”
“크하하하! 거 반박조차 막아버리는군!”
카바락은 웃으며 내 도발을 가볍게 흘려보냈다.
나는 반대 손을 쥐었다 펴며 카바락을 주시했다.
이전보다 느껴지는 차이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게다가 이전에 사용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근력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아마 근력은 호각.
“이제는 기습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네?”
“그거야 전쟁이니까. 설마 그것도 도발이라고 하는 건가? 수준이 정말 낮아진 것 같군. 예전 같은 도발을 더는 못 하게 되었는가?”
역으로 도발을 걸어오는 카바락의 모습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말은 필요 없었다.
단숨에 앨거차의 문신을 극한 활성화 시킨다. 이전과는 다르게 시간제한은 크지 않았다. 불사의 육체가 거의 성장을 마친 지금 바리치의 문신 극한 활성화도 두렵지 않은 나였다. 다만 써본 적은 없었고 카바락을 상대로 도움이 되지 않을 뿐.
나는 카바락이 했던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카바락에게 달려들었고, 카바락은 워 크라이를 사용하고 팔의 근육을 부풀림과 동시에 내 공격을 막아내었다.
콰아아앙!
곧바로 검을 틀며 카바락의 몸을 찔러갔고 카바락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젖혀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다리를 쓸어오는 발길질에 나는 즉시 몸을 띄웠다.
눈을 빛내는 카바락. 그는 곧바로 내 몸통을 찔러왔고 나는 하늘 밟기를 이용해 한 차례 더 위로 뛰어올랐다.
쉭!
걸리는 즉시 몸이 두 동강 난다. 하늘에 머물게 된 김에 나는 곧바로 더 높은 지대에 있다는 이점을 바탕으로 허공을 자유롭게 밟으며 카바락을 일방적으로 공격했다. 위력은 지상보다 떨어져도 무시는 불가능하다.
카바락은 모든 공격을 한 팔로 침착하게 막아내었다. 몇 번이고 매혹이 발동되었다. 그러나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심지어 고개를 단 한 번도 돌리지 않았을 정도. 스킬 효과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재차 울리는 워 크라이. 카바락의 등이 밝게 빛나기 시작한다.
‘문신인가?’
문신은 마고그 족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제국에서도 마고그 족의 문신보다는 오크의 문신이 더 유명할 정도였다. 다만 대부분이 장식이지만, 지금처럼 빛이 난다거나 마력에 반응해 색이 변하면 무언가 효과가 있는 문신들이다.
그의 눈이 예리하게 빛난다.
그리고는 곧바로 심상치 않은 기색이 느껴졌다. 직감 스킬이 경종을 울려왔다.
촤악.
불완전한 무형 강기가 순식간에 길어진다.
직감의 신호를 느끼기 무섭게 나는 하늘 걸음을 세 발자국 밟아 즉시 위로 빠져나가며 동시에 무형 강기 대신 강기로 바꿔 들며 단숨에 세 개의 강기를 카바락을 향해 날려버렸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금이 가면서 파편화되는 공격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빠르게 위로 이동하며 검을 피한 덕분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으나 내 공격은 카바락의 공격에 휩쓸려 버렸고, 동시에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파편 따위는 뿌리지도 못했다.
“좋은 표정이군.”
어떤 표정을 말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카바락은 자신의 공격이 실패했다는 것보다는 내 반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었다는 것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가 나를 강하게 인식하는 것은 여전한 모양이다.
피식.
나는 가볍게 웃고는 곧바로 성흔을 향해 마력을 집중시켰다.
즉시 몸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온다.
카바락은 내 모습을 기다렸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유신후지.”
이미 100에 도달한 신체 능력이 조금 더 상승하는 것이 느껴진다.
앨거차의 문신에 성자의 오러가 더해진다. 나는 바닥에 내려서기 무섭게 카바락을 향해 돌진했다.
이전보다 미세하게 빨라진 속도.
공격이 반 박자 빠르게 행해진다. 이 미묘한 차이가 생사를 가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바락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신체 능력은 내가 우위일 텐데?’
오히려 내가 조금 당황스러웠을 정도.
카바락은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내 공격을 차례차례 막아내고는 되려 틈을 노려 내게 몸을 부딪쳐 왔다.
설마 저렇게 저돌적으로 내게 달려올 줄은 몰랐기에 자세가 조금 흐트러졌고 동시에 카바락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연속적으로 검을 휘둘러왔다.
쾅, 쿵, 펑!
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아인모가 검술을 활용해 공격을 막아내었다.
새로운 검술을 방어에 이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덕분에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새로운 검술인가?”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카바락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조금 우위일 줄 알았던 전투가 상상 이상으로 팽팽했다.
능력치와 스킬의 보조를 받는 내가 카바락과 비슷하다고?
‘도대체 뭔 짓을….’
게다가 카바락은 상상 이상으로 저돌적이었다.
어떻게 저런 전투 방식으로 중앙 전선에서 살아남았는지 의아할 정도.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내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카바락이 웃었다.
“여유가 사라졌군.”
그러나 곧바로 표정이 일변한다.
“이 정도가 끝이라면 실망이다. 부디 내 적수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지.”
이전과는 다른 차가운 말투. 카바락은 생각할 틈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
유신후와 카바락의 전투를 바라보는 일행들은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둘에게는 서로 가진 패를 확인하며 상대를 점검하는 전초전에 불과했을지는 몰라도 타인이 보기에는 서로의 목숨을 필사적으로 노리며 작은 틈마저 파고들어 목숨을 앗아가길 원하는 치열한 전투로 보였다.
이제껏 유신후가 봐 주었다는 것은 명백했다. 둘은 같은 경지이기 때문인지 서로의 무형 강기를 읽어낼 수 있었고, 때문에 당장 서로에게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오빠도, 저 괴물도, 분명 둘 다 우리와 마찬가지인 마스터일 텐데….”
나서윤의 중얼거림에 일행의 얼굴이 굳는다.
저걸 과연 ‘같은 마스터’라고 할 수 있을까.
쾅! 콰아앙!
타 강기와는 다르게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 무형 강기. 그나마 마스터인 일행들은 어느 정도 관찰이 가능했지만 그래도 얼핏 보기에는 서로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마치 장난하듯 중간중간 멈추며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계속 강기의 길이라도 늘리는지 서로 멀찍이 떨어져 허공에 검을 휘둘러대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거, 신후 오빠가….”
“리더가 조금 불리한 거 같아.”
“오빠가… 밀린다고?”
일행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밀린다기보다는 팽팽하다는 것이 맞았다. 다만 유신후의 모든 공격과 스킬, 신체적 우위가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유신후가 카바락에 비해 앞서던 것들이 모조리 막혔다는 것은 이후 싸움에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어느 순간 서로 약속한 듯이 공격을 멈추었다.
일행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둘을 바라보았다.
“…강하네.”
일행은 순간 자신들이 본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유신후의 이점이 모두 막혔다. 매혹도, 하늘 걸음도, 앨거차의 문신 극한 활성화도, 성자의 오러와 본래 육체 스펙에 따른 능력치적 우위마저 잃어버린 유신후가, 분명 웃고 있었다.